150화. 범죄와 짜릿한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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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범죄와 짜릿한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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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범죄와 짜릿한 신혼
2023.08.01.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심오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살아 내느라 바빠서 97세의 내 모습 같은 것은 상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강제로 생각해 보자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상상 속, 늙고 쪼글쪼글해진 내 곁에 나보다 훨씬 반듯한 모습의 로카르드 카이델 할아버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내 미래를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게 삶인가…….’
누군가와 인생을 마지막까지 함께한다는 일이 이토록 가슴 아리게 기쁜 일이었다니.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이유, 그 단순한 삶의 비밀을 이제야 깨달아 가고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이러니 그를 미워할 수가 없는 거다.
내가 배시시 웃고 있을 때, 밖에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을 쾅 차고 들어온 남자는 위압적인 체구에 시커먼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개밥을 주듯 음식 그릇을 바닥에 놓더니 말했다.
“살고 싶나?”
“……!”
나는 놀라서 눈만 커다랗게 뜨고 심호흡했다.
남자는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그 체구에 겁을 먹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고용주께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더군. 그러니 네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거야.”
“…….”
“너를 죽여서 내다 버릴지, 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지.”
나는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내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그릇을 발로 내 쪽으로 밀었다. 거기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가 몹시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간 후, 나는 그대로 앉아 진정하려 애썼다. 내 심장이 다시 제 속도로 뛰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나는 냄새 나는 모포를 당겨 덮으며 호흡을 골랐다.
“자자. 일단 자 두자.”
* * *
나는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니 카이델 공자가 내 곁으로 파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가 작은 침대 위로 몸을 꼼지락거리며 붙여 와서, 나는 얼떨결에 벽으로 붙었다.
깊은 밤, 뻥 뚫린 창 너머로 달이 둥그렇게 떠 있었다. 각종 밤 짐승 소리는 아련히 들려왔다.
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오시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카이델 공자는 옆으로 누워 팔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이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뺨에서 슬쩍 걷어 냈다.
“기다렸어요?”
“네. 기다렸어요.”
내가 대답하자 카이델 공자의 숨결이 차분해졌다. 그가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그를 보니 그동안 겁먹었던 감정과 그를 만난 안도감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그는 내 속을 다 들여다보듯 말했다.
“나한테 일러요. 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속삭였다.
“복면을 쓴 놈이 하나 있어요. 그 자식이 절 죽여서 내다 버리거나 공자님에게 돌아갈 수 없는 몸으로 만들겠대요. 밥그릇도 막 발로 차서 줬어요. 나쁜 놈이죠?”
“아아. 나쁜 놈이네.”
“그쵸?”
그의 목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는 중이라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손끝은 이제 내 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로리샤. 이럴 필요 없어요.”
나는 그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가만히 얹고 그의 체온을 느껴 보았다. 손등의 표면적이 얼마나 넓다고, 금방까지 막막하던 내 가슴속에 등불이 켜진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다시 속삭였다.
“지금 나와 같이 저 문으로 나가요.”
그는 여유로웠다. 저 방문 밖에 있는 자들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머리를 저었다.
“아직 안 돼요. 누가 범인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
“공작님도 청혼서가 밀려들어서 곤란해하고 계시죠?”
“아버님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어떻게 그래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심호흡하자 그의 체취가 고스란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겨우 하루 떨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모든 것이 그리워지다니.
그사이 나는 아이가, 바보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 아내는 너무 용맹해. 가끔 그게 마음에 안 들어요.”
“인제 알았는데 저는 욕심이 참 많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이런 일에 시달리며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요. 카이델 가문이 이런 치졸한 협잡의 대상이 되는 것도 기분 나쁘고요.”
“카이델가의 안주인다운 말이네.”
그가 몸을 기울여 몸을 내 위로 겹쳐 왔다. 그의 묵직한 무게감이 나를 압도하자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뭔데요?”
나는 이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한껏 피하며 중얼거렸다.
“지, 지금은 공자님이 하려던 거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입술로 겹쳐 왔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트리며 그의 따뜻한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는 흐트러진 호흡으로 속삭였다.
“내가 당신 때문에 공부를 못 해요. 밤에도 당신 봐야지, 낮에도 당신 봐야지, 눈 감아도 당신 봐야지. 황태자 전하께서 오늘은 ‘너 변했다, 로카르드!’ 하고 역정을 내셨어요.”
“로리샤가 잘못했네요.”
그가 클클 웃었다.
“그러자 우리 씩씩한 황태자비께서 ‘사람이 안 변하면 그것도 정상 아니야!’ 하고 편을 들어 주셨고요. 그리고 심심하니까 이른 시일 내에 입궁하라고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어떡하지. 지금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은데.”
그는 입술로 내 입술을 꾹꾹 누르며 뱉었다.
“왜죠?”
“제 남편 때문에요. 저는 남편이 안아 주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거든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아요.”
“하아…….”
우리는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서로를 더듬으며 키스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침실에서처럼 보낼 수는 없었다. 참지 못하고 소리라도 내면…….
하지만 그 강요된 절제가 폭발하는 욕망만큼이나 자극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함께 깨달았다. 아니, 그것에 푹 빠져 즐기고 있었다.
납치당한 인질 주제에 이렇게 은밀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이야.
사실, 미샤가 보낸 초대장이 가짜라는 것은 우리 둘 다 보자마자 알아챘다.
미샤의 초대장은 로아르가에서 사용하는 카드였다. 지금 아카데미 기숙사에 있는 애가 굳이 그걸 챙겨 가서 내게 써 보낼 리 없었다.
그 애가 시험 준비에도 부족한 그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나를 밖에서 만나자고 할 리는 더욱 없었고. 미샤에게 정말 중요한 용무가 있다면 나를 바로 찾아왔을 것이다.
우리 납치범께서는 지나치게 완벽하게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납치범이 가장 크게 실패한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범인은 내가, 우리가, 자기 덕에 이렇게 짜릿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 * *
납치범은 아침에 나를 찾아왔다.
간밤에 카이델 공자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채 보니, 그자가 나를 겁주기 위해 거대한 몸을 부풀리고 일부러 쿵쿵대며 걷는 티가 났다.
하지만 나는 기죽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할게요. 당장 이혼장을 쓰고 카이델 공작님의 약점도 알려 줄게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약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당신에겐 말하지 않을 거예요! 나를 살려 줄 수 있는 사람과만 말할 거예요!”
“…….”
남자는 형편없는 죽 그릇을 바닥에 탁 놓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나는 그것을 냄새만 맡아보고 밀어버렸다.
그리고 카이델 공자가 몰래 숨겨 두고 간 부드러운 빵과 치즈를 꺼내 먹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여자의 구둣발 소리가 내게로 가까워졌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예상을 깨는 인물이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중년의 부인.
그 머리카락과 살짝 들려 올라간 눈초리는 그녀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게 했다. 그녀는 로바일 백작 부인, 에벌린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나를 쏘아보았고, 납치범은 그녀 뒤에 섰다.
납치범은 명색이 ‘카이델 부인’을 건드리는 것이 두려워서 복면을 썼는데, 백작 부인은 저렇게 맨얼굴로 나타나다니 대단한 배포였다.
그것은 내가 자기를 절대 거스르지 못한다고 믿거나, 나를 살려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내가 사생아 계집애의 헛소리나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야.”
나는 그녀의 첫마디부터 빈정이 상해 버렸다. 사실 처음에는 차근차근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는데,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제가 댁의 사생아도 아닌데, 말조심하시죠?”
“뭐라……? 지금 쟤가 나더러 뭐라고 했어, 올리튼?”
이름을 들켜버린 올리튼은 힘겨운 신음을 흘리며 복면을 벗었다. 그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저년의 버릇을 고쳐 줘, 올리튼! 적당히 곱게 가게 봐주려고 했더니 아주 막돼먹었구나.”
올리튼은 위협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나 같으면 안 그럴 텐데요.”
“하! 기죽지 않는 뻔뻔함만은 인정하마. 그러니 내 사위를 가로챘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도 치지 못했다.
이건 무슨. 어쩌다 로카르드 카이델이 온 제국인의 사위가 된 건데?
나는 올리튼이 내 멱살을 붙잡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에벌린 양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게 에벌린만을 위한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니? 수준하고는!”
헉. 방금 누가 나한테 ‘수준’이라고 말한 것 같다.
“우리 다섯 가문은 제국의 고귀한 혈통을 지키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피의 맹세를 맺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