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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또 에트랑 (151/155)


149화. 또 에트랑
2023.07.31.


나는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내 반문을 기다렸다가 내가 말이 없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카이델가의 명예는 황가의 명예와도 직결된 일…….”

에벌린은 몹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뭐라고 계속 떠들었는데,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아까 만났던 클레멘토 대공 할아버지를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안 들렸다.

97세가 되면 사람이 그렇게 작아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황가에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 아닌가.

“로아르 양? 지금 듣고 있어요? 설마……, 딴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영애들께서 남의 남편을 빼앗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것 아닌가요? 보세요, 한 문장으로도 간단하게 말할 수 있죠?”

“뭐, 뭐라고요? 누가, 누가 그렇게 추잡한 짓을……!”

나는 바로 그거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영애들은 내게 쌍욕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말로 듣기만 해도 참 추잡스럽네요. 어휴!”

“하! 역시 수준이 떨어지니까 말이 안 통하네!”

그때 케릴이 끼어들었다.

“제가 보통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황궁 시녀장의 매질을 당하고도 눈도 깜짝 안 하는 여자라고요.”

나는 케릴을 조금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새로 끼어든 패거리가 고작 이런 거라니.

“순서를 정하는 게 어때요?”

“……뭐라고요?”

“한꺼번에 다섯 여자라니, 제 남편이 조금 안 되어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한 명씩 차례로 유혹하는 게 어때요? 그러면 성공할 확률이 약간은 올라갈 것 같은데요.”

“하……. 뭐야, 미친 여자였어?”

“이만 가요, 로바일 양!”

하지만 에벌린은 다른 영애가 붙잡은 손을 털어 냈다.

“우리 명문가의 여식들이 그런 추문을 일으킬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죠? 우린 당신더러 주제를 알고 빠지라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거예요. 당신도 카이델 저에 얼마나 많은 청혼서가 보내졌는지 정도는 알겠죠? 당신을 인정하는 사람은 이 제국에 아무도 없어요.”

“…….”

내가 남부에서 돌아왔을 때 공작님은 벽난로에서 편지 무더기를 태우고 있었다.

설마 그게 그거였나.

내가 기억을 떠올리느라 시선을 돌리자 내가 주눅이 드는 걸로 보였는지, 그녀는 잔인하게 말했다.

“그럼요. 우리 중에 카이델 공자님이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약간의 실수를 미리 당겨서 했다는 정도랄까? 물론 카이델 공자님 정도면 어떤 실수도 용서할 수 있죠.”

여자들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이혼하라고요! 당신의 반쪽짜리 피로 그 거대한 가문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상은 우리 다섯 가문이 섭섭지 않게 하겠어요.”

나는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면 당신들은 돈만 잃은 실연녀가 될 텐데 정말 괜찮겠어요? 그건 그냥 실연녀가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하지 않나요?”

내 조롱에 영애들의 얼굴이 내 드레스만큼이나 발갛게 달아올랐다.

“부디 영애들이 자신의 가문도 카이델가만큼 걱정하기를 바라요. 그래야 제국이 부강해지죠.”

“지금, 그, 그 더러운 발을 계속 카이델 저에 붙이고 있겠다는 뜻인가요?”

나는 에벌린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그를 이혼남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홀아비로 만드는 편이 빠를 거예요. 에벌린.”

그때 막 접견실에서 나온 카이델 공자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내가 그를 향해 웃자, 그를 발견한 영애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르르 나타나더니 그의 진로를 막았다. 이번에는 모녀 무리였다.

귀부인들은 인사를 빙자해 카이델 공자 앞으로 자기 딸을 들이밀려고 은근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버젓이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아내 앞에서 중매 시장을 연 것이다.

카이델 공자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받아 주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아아, 카이델 공자. 당신, 참 손 많이 가는 남자야.’

나는 그를 구해 줄까 말까 망설이며 술을 홀짝거렸다. 그도 이 상황의 괴로움을 약간은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뒤 그가 뭐라고 말하자 무리가 길을 텄다. 그는 내게 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채듯이 붙잡았다.

“지금 나와 춤춰요, 제발!”

나는 키득거리며 그를 따라 플로어로 나갔다. 우리는, 아니 나는, 저주에 가까운 질시에 시선 속에 춤을 추었다.

그런데 자꾸만 행복한 기분이 드는 건 또 뭔지.

카이델 공자도 금방 긴장을 풀고 피식 웃었다.

“즐거워 보입니다. 로리샤.”

“네. 사실은 그래요.”

“그 영애들 누구였습니까?”

“로바일, 라이선, 나머지는 모르겠네요. 알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대견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요. 까불면 밟아 버리고, 아니면 내게 떠넘겨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하셨기에 저 부인들 무리를 단박에 빠져나오셨죠?”

“지금 당장 내 아내와 춤을 추지 않으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모두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헉. 공자님, 수치심! 수치심을 좀 가지세요!”

“왜요, 저는 제가 팔불출로 보이는 게 자랑스러워요, 로리샤.”

나는 그를 뚱하니 올려다보았다. 타가르 사교계가 한마음으로 그의 결혼을 부정하고 있는데 팔불출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니.

그런데 그가 매력적으로 웃었다. 나를 향해서만 보이는 특별한 웃음이었다.

그는 퍽 느긋하게 말했다.

“멋대로들 생각하라고 해요. 나는 내 사랑스러운 아내와 오늘 밤을 즐길 테니까.”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나처럼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 곁에 있는 건 참 유익한 일이었다.

* * *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카데미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카이델 공자는 남부에 다녀오는 동안 밀린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는 카이델가의 장부를 공부하느라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미샤에게 초대장이 왔을 땐 나도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았다.

「로리샤, 점심 식사를 같이 했으면 해. 중요하게 할 말도 있고.」

나는 카이델 공자가 침실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그는 로아르가의 문장이 찍힌, 고급 종이로 된 초대장을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소는 에트랑이군요. 가려고요?”

“어떡할까요?”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그는 천진하게 웃었다.

“가야죠.”

“네. 가야죠.”

나는 초대장을 바라보며 카이델 공자가 에트랑에서 내게 에메랄드 반지를 내밀던 광경을 떠올렸다. 누군가 ‘에트랑’이라고 말하면 나는 그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결과적으로 그때 그가 내 손가락에 끼워 줄 결혼반지 사이즈를 재고 있었다는걸.

* * *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전에 에트랑에 도착했다. 오늘은 살짝 사람이 적은 편이었지만, 특유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미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나는 먼저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곧 어떤 젊은 부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카이델 부인이십니까?”

“누구시죠?”

“저는 제니 게일이라고 해요. 남편이 스마일란과 하는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혹시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제 남편이 부인께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부디 허락해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스마일란은 황태자비가 될 샨라 공주의 친정이다. 스마일란과 관계있는 사람들과 많이 교류해 두어서 손해될 것은 없었다.

“그러죠.”

“어머, 감사드려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제 남편이 다리를 다쳐서……. 잠시만 저희 테이블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다 정신을 잃었다.

* * *

“대단해, 아주.”

나는 골방의 거미줄 쳐진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담요 한 장이 깔린 침대는 딱딱해서 바위 위에 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방의 벽과 천장 기울기로 보아 이곳은 작은 농가나 오두막이었다. 밖에서 새 소리의 다양한 종류의 밀도로 보건대, 여기는 외딴 숲속이 분명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낡은 침대에 모포 한 장. 작은 창은 판자로 얼기설기 못질 되어 있었다.

나는 납치당한 상태였다. 에트랑에서 스마일란 무역상의 아내라는 여자를 따라 사용인 출입구 근처 테이블로 걸어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는 기억이 없었다.

살짝 두통이 있고 팔다리 몇 군데에 멍이 든 걸 보면 약으로 기절시켜 끌고 온 듯했다.

범인은 카이델가에 있는 나를 건드리기 힘드니 미샤의 초대장을 위조해 나를 밖으로 유인한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 그것도 귀족들만 드나드는 에트랑에서 나를 납치해 이곳까지 옮기다니, 납치범의 실력만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맞이할 최후는 별개로 하고.

범인의 동기는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홀아비랑 결혼하겠다고 이 난리라니.”

내가 이대로 살해당하면 카이델 공자는 홀아비가 될 테니까.

내가 너무 대단한 남자와 결혼한 것 같다. 홀아비든 이혼남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영애들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하기는 그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와 이혼을 바랄 당시에도 나는 그에게 크게 미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혼을 원하는 것과 남에게 강요당하는 기분은 상당히 달랐다.

‘납치라니……. 납치라니!’

나는 거미가 기어 다니는 천장 모서리를 바라보며 내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여기서 암매장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내가 실종 상태로 남으면 이혼 절차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지만 내 시체가 있으면 카이델 공자는 즉시 홀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고사로 처리될 가능성이 컸다. 숲에서 짐승에게 반쯤 먹힌 시체, 아니면 강에서 떠오른 시체…….

나는 배에 두 손을 깍지 끼어 얹은 채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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