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그들 방식의 신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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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그들 방식의 신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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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그들 방식의 신혼(2)
2023.07.30.
클레멘토 대공저는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산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삼촌인 그는 폐하와 혈연이라는 것 말고는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유혈로 얼룩진 황가의 가족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가의 최고 연장자이기 때문에 그의 대소사에는 황족이나 그를 대리할 사람이 반드시 참석했다. 그것은 이번에는 공작님 몫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카이델 공자는 나를 빙글거리며 바라보았다.
“부인. 오늘 달라 보입니다.”
“그 부인 소리 좀…….”
“왜요, 그럼 여보라고 해요? 여보, 오늘 당신은 유난히 빛이 나요.”
“헉…….”
나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말해요.”
“공자님은 수치심이 원래 없으세요? 아니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만 꺼내 쓰세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눈썹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랑에 수치심이 필요하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로리샤.”
“…….”
이 인간, 말발 하나는……. 말을 잘해서 혀 놀림도…….
나는 얼른 머리를 저어 이상한 생각을 털어 냈다. 그런데도 뺨이 살짝 상기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걸 보면서 빙글거렸다.
“그래서 제 감정과 욕망에 당당하고도 충실할 예정이고요. 결혼이란 참 좋은 일이 아닙니까. 세상에 욕망과 의무가 합치되는 행위가 얼마나 되나요. 그런데 당신은 나의 욕망이자 의무예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몹시 기뻐요. 나의 아내는…….”
아, 아까 거기까지만 하지.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떠오르는 대로 되물었다.
“오늘 제 어, 어디가, 어떻게 다른데요?”
사실 나는 오늘 올가 부인의 도움을 받아 잔뜩 힘주어 꾸몄다. 황녀 전하가 이용하던 양장점에서 특별히 추천받은 붉은 드레스에, 화려한 보석도 걸었다. 화장도 특별하게 신경 썼다.
나는 그의 아내였고, 그의 품위를 지켜 줄 의무가 있었다. 불행히도 그 부분의 내 의무는 내 욕망과 살짝 어긋났지만 말이다.
그런데 카이델 공자는 내 물음에 한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내 질문을 감당하지 못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나를 빤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침을 꼴깍 삼켰을 때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인내심의 끈이 끊어질 듯한 숨결에 실린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길가 어디로 마차를 돌리고 싶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날 자극하지 말아요. 여. 보.”
“제, 제가 언제…….”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혀를 꽉 물고 창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가 몹시 불편한 숨소리를 흘리더니 자기쪽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침묵 속에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공저에 도착했다.
* * *
대공저는 좋게 말하면 고색창연한 분위기였다. 고성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나란히 지나가자 그 동선을 따라 충격에 찬 듯, 침묵의 물결이 일어났다. 새끼 사자와 그 음탕한 사생아가 공석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광경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는 내 긴장을 느끼고 앞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로리샤. 키스할까요?”
“공자님?”
“저 사람들 아주 까무러치게.”
나는 그의 반듯한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참 예쁘다. 내 남편은.
나는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그건 우리 둘이 있을 때 해요. 사람들 구경하라고 뭔가 하기를 싫어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제 남편은 소중하거든요.”
흡.
카이델 공자는 흡,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참았다. 내가 붙잡은 팔을 통해 그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그의 눈치를 보자 그가 나를 흘끔 흘겨보았다. 나도 헉 하고 숨을 멈추었다. 그 눈빛은 그가 밤에 내게 덤벼들 때의 그것이었다.
그는 씹듯이 중얼거렸다.
“로리샤. 지금부터 한마디도 하지 말아요.”
“네!”
아차!
‘네’도 대답 아닌가. 내가 내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가 멈추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다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자 그가 나를 부드럽게 내려다보다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얼핏 보면 화가 난 듯한 굳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장이 둥둥 빠르게 뛰었다.
그때 근처에 서 있던 여자들의 작은 탄식이 들렸다. 카이델 공자의 행동을 보고 경악하여 그러는 것이었다.
‘흥. 이 남자 이제 내 거거든?’
그렇게 생각하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자 그도 나와 눈을 맞춘 채 환하게 웃었다.
“시작해 볼까요, 로리샤?”
“네. 공자님.”
나는 카이델 공자의 소개로 많은 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녀로 일할 때 먼발치에서 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초면이었다.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했지만 누구도 내게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그들이 예의를 갖추는 척하는 것은 순전히 카이델 공자 때문이었다.
마지막에는 클레멘토 대공 앞으로 나아가 황제 폐하를 대신할 카이델 공작님을 대신하여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나는 쪼글쪼글하게 마른 할아버지가 의자에 반쯤 기대 누워서 인사 오는 사람들에게 ‘그래. 그래.’하고 연신 끄덕이는 걸 보며, 그가 130세쯤 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길고 지루한 과정이 끝난 후에 우리는 마침내 테이블에 착석했다.
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담소를 나누거나 가볍게 춤을 추기도 했다.
카이델 공자는 대공의 손자에게 개인 서재로 불려 갔다. 손자라고 해도 공작님과 그리 연배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가 가고 혼자 남자 뒤통수에 싸한 느낌이 전해졌다. 여자들이 나를 쏘아보는 중이라는 것은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로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그 사생아인가요?”
“반반한 건 인정하겠지만, 뻔뻔함이 더 대단하네요. 이제는 공식 석상에까지 얼굴을 내밀다니! 더구나 오늘은 황실을 대신하는 사자님의 대리 역으로 참석한 거잖아요? 세상에.”
“저 보석 좀 보세요. 카이델가의 재산을 벌써 축내기 시작했어요! 로앙 보석상에서 주문했다는 그것인 모양이네요. 예쁘긴 예쁘네. 흥.”
나는 살짝 화가 났다가 바로 감동하기로 했다.
카이델 공자는 어머니께서 쓰시던 거라며 이 화려한 보석을 가져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새 보석 같아서 미심쩍었었다.
그런데 저들 말을 들으니 새로 샀다고 하면 내가 싫어할까 봐 그렇게 둘러댄 모양이었다.
그가 거짓말한 것이 화가 나기는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내게 선물을 해 줄까 끙끙거렸을 그를 생각하니 좀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어디서 보석을 주문했는지까지 꿰고 있는 저 여자들의 집착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다른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대꾸했다.
“화내지 마세요, 미용에 나쁘니까. 오죽 대단하면 황실 시녀 자리에 카이델 저의 안방까지 차지했겠어요. 하지만! 화려하게 날아오른 나비는 한 방에 불타 죽는 법이죠.”
“나비라니요? 나방이지, 무슨.”
“어머, 제가 실수했네요. 호호호.”
“호호호호.”
나는 술을 홀짝거리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내 뒤편에서 떠드는 여자들이 아니라도 많은 여자가 부채 뒤에서 내게 질시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혼자서도 카이델 공자만큼이나 많은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퍽 거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넌 이제 타가르 사교계 영애들의 공적이야. 호호호호.’
갑자기 밀리오라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라 머리를 짧게 저었다.
‘정신 차리자, 로리샤.’
허리를 곧게 펴자 내 목과 귀에 매달린 묵직한 보석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이런 걸 매달고 돌아다니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로카르드 카이델의 아내 역할에는 이 의미 없이 비싸고 예쁜 돌들의 무게도 포함된 것이니까. 그리고 저런 질투와 시기도 말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기꺼이, 심지어 기쁘게 매달고 다닐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변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있다가 그가 돌아오면 보란 듯이 춤이라도 춰야지. 한꺼번에 집단 복통이라도 일으키라고!
그런 생각도 잠시, 알록달록한 드레스 다섯 벌이 내 시야를 가렸다. 이번에는 영애들이 떼를 지어 출동한 것이다.
“로아르 양?”
“카이델 부인이에요.”
“아. 그러시죠. ‘지금’은.”
나는 처음 보는 분홍 머리 영애를 빤히 보다가 그 무리 끝에 선 케릴 라이선을 발견했다. 황녀 전하의 티 파티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남작 영애였다.
그동안 사교계 출입을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앙카르트가가 망하자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케릴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케릴 라이선. 그 정도 패기로 카이델 공자를 탐내다니.’
“뭐가 웃겨요?”
분홍 머리가 다시 쏘아붙여서, 나는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로바일 백작 영애 에벌린이에요.”
“‘지금’은 말이죠.”
“무슨 뜻이죠?”
“너무 기초적인 문장이라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누가 좀 알려 주겠어요?”
내가 비웃음을 띤 채 그녀들을 훑어보자 여자들의 얼굴이 제각기 일그러졌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면 사생아 하나쯤 짜부라트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기죽지 않으니 당황한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욕의 봉인을 풀어야 하나, 살짝 망설였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카이델 부인 하기 참 번잡하다.
“에벌린 로바일 양. 차마 내게 혼자 와서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한 그 말이 뭔지 해 보세요. 지금이라면 들어 드리죠.”
그녀는 내가 의도적으로 ‘지금’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은 것을 깨닫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설마 당신 수준의 여자가 겁이 나서, 이 귀한 가문 영애들과 함께 왔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함께 온 건 우리가 동등한 경쟁자이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