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들 방식의 신혼(1)
(149/155)
147화. 그들 방식의 신혼(1)
(149/155)
147화. 그들 방식의 신혼(1)
2023.07.29.
17. 그들 방식의 신혼
남부에서 밀리오라 후작 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기만 했다.
이 길이 초행이라서가 아니라, 얼마 전 이 길을 지났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카이델 공자와 내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거대한 변화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예전의 로리샤일 수 없게 했다.
‘로리샤. 저는 당신을 원해요. 당신만 원해요. 저는 당신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믿어 주기를 바라요.’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는 내 가슴 바닥에서 징징 울리다가 머릿속으로 올라와 그곳으로부터 나를 꽉 채우곤 했다.
그리고 다시 가슴으로 내려가 잠들었다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각이면 다시 되살아났다.
나는 내가 어떤 말을 듣기 원하며 살았는지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말해 준 적이 없어서 내가 그걸 듣기 원했음을 알 수도 없었던 그런 말들을.
가령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거나, 믿어 달라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나는 그것을 그로부터 배웠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저 남자는 제가 하는 말들이 내 영혼에 얼마나 긴 메아리를 드리우는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는 그런 말이 박탈된 삶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 고백들이 내 가슴속 하늘을 천둥같이 울렸다고, 그래서 그곳에 찬란한 빛살 사이로 기쁨의 비가 내리고 있다고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부여잡고서 평생 마음속에서 감사할 것이다. 그것을 그에게 반쯤이라도 되돌려 비춰 줄 수 있도록 애쓰면서.
그것이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현실적인 문제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공격하겠지만, 그가 그런 것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나도 눈을 질끈 감기로 했다.
닥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나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해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살면서 한 번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이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의 곁에서라면.
* * *
우리가 카이델저에 도착해 공작님의 집무실로 갔을 때, 공작님은 벽난로에서 편지 같은 것을 태우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는 그의 주의를 돌리려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
공작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잠시 응시하더니 말했다.
“너희들, 좀 달라 보이는구나.”
이 독수리의 눈썰미 같으니라고.
나는 순간 시선을 피하고 말았는데 카이델 공자는 능글능글 웃었다. 명백하게 수상쩍은 웃음이었다.
“그런가요?”
나는 숨을 참고 그의 팔 옷깃을 슬쩍 당겼지만 카이델 공자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 임신하셨습니다. 후작 부부의 금실이 대단합니다.”
“그거 경사스러운 일이로구나. 황제 폐하께도 보고드리거라.”
“예. 아버님.”
“로리샤는 여독이 심하지 않으냐?”
“아닙니다. 공작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다행이구나. 가서 쉬어라.”
방으로 돌아오자 카이델 공자가 뒤에서 팔을 둘러 나를 안았다.
“우리 로리샤, 여독이 심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조금만 더 무리해도 괜찮을까?”
그것은 내게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서 일부러 입술을 스치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살이 간지럽기도 하고 화끈거리기도 해서 온몸이 다 오싹거렸다.
나는 목을 살살 꼬며 말했다.
“저, 저 거짓말 했어요. 여독이 심해요. 피곤해서 아주 죽을 지경이라고요. 잘 생각해 보면 공자님도 그러실걸요?”
“저런. 불쌍한 내 아내…….”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내’가 이토록 소름 돋는 말이었다니.
“공, 공자님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어쩌나. 그 피로는 내 책임인 것 같은데……. 어떻게 책임지지……?”
그의 한 손은 이미 내 가슴의 여밈 끈을 톡톡 풀어 내리고 있었다.
“공자님? 아니, 그게 아니라아……!”
* * *
늦은 아침. 나는 반쯤 정신이 든 채로도 눈을 뜨지 않았다. 잠이 살짝 덜 깨서이기도 하고, 어젯밤의 여운이 아직 내 피부 아래를 돌아다니며 몸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만이 줄 수 있는 이 피로는 참 이상하고 특별했다. 지독히 나른하고 달콤해서 침대에 늦게까지 늘어져 있어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와 내가 오롯이 하나의 존재라는 걸 느끼고 나면, 그 여운이 이렇게 아침 햇살과 뒤섞이면. 그럴 때면 내가 아는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눈을 뜨면 완전히 행복하고, 안전하고, 부족함이라곤 없는 세상만이 펼쳐져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먼저 일어난 카이델 공자가 테이블에서 그동안 쌓인 편지를 읽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남부에 다녀오는 동안 편지는 거의 바구니를 꽉 채울 정도로 쌓여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를 몰래 훔쳐보았다가 대충 걸친 가운 사이로 드러난 몸을 보고 얼른 눈을 감았다.
또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 나도 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의 근심이 이 방으로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 편지들이 미웠다.
그에게 온 편지들은 대부분 초청장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시간을 요구하는 서신들이었다.
아카데미 개학에 밤샘 신혼 생활,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보좌까지.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클레멘토 대공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군요. 구십칠 세 생일 파티라니. 제가 어릴 때부터 이번이 마지막 파티라고 생각하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에요.”
클레멘토 대공은 지금 황제 폐하의 삼촌이었다. 세상에 97세라니, 큰 비극을 거친 황가의 일족으로서는 엄청난 장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황제 폐하의 삼촌의 장수에 별로 감동할 수가 없어서 눈을 꼭 감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카이델 공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깬 것 알아요. 아까부터 실눈 뜨고 날 보고 있던 것.”
“…….”
“정말 잔다면……, 내 방식대로 깨워도 되겠죠?”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가운 자락이 사라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깨, 깨서 눈 마주쳐도 덮치려고 할 거면서!”
“정답.”
그는 삐뚤게 웃으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어쩌면 저런 얼굴에 저렇게 음란한 눈빛을 띨 수 있는지, 매번 보기 조마조마해 죽을 지경이다.
나는 번개처럼 침대를 빠져나와 가운을 걸치며 방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냈다.
“하!”
아무튼, 내 단호한 결정 덕분에 우리의 아침은 대충 평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내가 단정하게 꾸미고 식당으로 갔을 때 카이델 공자도 말끔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우리는 아까의 일이 떠올라 서로를 응시하며 동시에 피식 웃었다.
마지막에 도착한 공작님은 그런 우리를 보고 단조롭게 말했다.
“로리샤. 네 시아버지는 홀아비다.”
“헙.”
늘 지극히 단정하고 품위 있는 공작님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요하더니 공중에 손을 저었다.
“아니, 내 앞에서 그런 시선만……. 하아, 됐다. 식사하자.”
“죄, 죄송…….”
공작님은 공중을 보며, 나는 고개를 떨구고 식탁보 끝자락을 보며 민망함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천진하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로리샤, 아버님이 우리를 질투하시는군요.”
“공자님!”
나는 순간 울컥해서 그의 허벅지를 슬쩍 꼬집고 말았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얼굴을 굳혔다가 미묘하면서도 삐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는 야한 쪽으로 반응할 것이 분명했다.
공작님 앞에서 갑자기 신혼부부 티를 내서 어쩌려고!
카이델 공작님은 그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부행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구나.”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네. 아버님.”
나는 얼굴이 더 빨개져서 카이델 공작님의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는데, 공작님은 카이델 공자를 응시했다.
공작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먼저 간 로카르드의 모친은 기상 시간이 늦었다. 그 습관을 바꾸느라 여러 해 동안 고생했어. 금방 될 일이 아니니 무리할 것 없다.”
“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개미 목소리만큼 조그맣게 말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카이델 공작님의 배려는 너무 감사했지만, 나는 아직 나를 미워하거나 쫓아내고 싶어 하지 않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것은 내가 아기가 된 기분으로 처음부터 적응해 가야 할 일이었다.
내 옆에 앉은 지독히 곱게 생긴 남자를 보니 다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싸워야 한다면 그의 곁에서 싸울 것이다.
공작님이 카이델 공자에게 말했다.
“클레멘토 대공의 생일 파티에는 네가 대신해 참석해야겠다. 스마일란에서 비밀 특사가 도착할 예정이라 폐하께서 사자들에게 배석을 명하셨다.”
“네. 아버님.”
나는 괜히 혼자 긴장해서 씹던 음식을 꼴깍 삼켰다.
이런 기밀을 내 앞에서 태연히 말하다니, 공작님이 나를 믿으시는 건지, 무시하시는 건지 헛갈렸다.
아무튼 비밀 특사가 온다는 걸 보면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을 앞두고 양국 간에 각종 협의가 종결 단계에 들어선 것이 틀림없었다.
황가의 결혼이 결혼이라기보다 거래라는 게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로리샤, 부친께 전할 말이 있느냐?”
“아닙니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나는 뻘쭘하게 대답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백작님을 언제 만나러 가긴 해야 했다. 내가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는 걸 알려도 될까…….
혼자 생각하다가 내 얼굴이 달아오르자 카이델 공자가 나를 흘끔 보았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