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밀리오라의 전원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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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밀리오라의 전원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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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밀리오라의 전원생활(2)
2023.07.27.
‘네 절반의 피가 네가 온전한 사자의 딸이 되는 걸 막고 있나 보지.’
“내가 감사할 줄 모른다고? 진짜를 못 알아봐? 하아…….”
아까 쌩하니 나가 버리던 카이델 공자의 모습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눈치 없었던 것은 인정한다. 이혼 이야기는 좀 참았다가 수도로 돌아간 다음에 해도 될 걸, 괜히 미리 말해서는.
하지만 나도 계속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도사린 불안은 점점 커져 갈 뿐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 화를 내는 데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인제 와서 이러기가 어디 있어.
내가 그를 돕기로 한 건 그레이언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어서 우리 이혼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시 내가 독신 생활의 꿈을 되찾을 수 있게.
그도 그걸 알고 나한테 작위까지 내려 달라고 했으면서! 그도 그를 선망하는 다른 유력가의 딸과 재혼하면…….
백작님도 가문의 생존을 위해 백작 부인과 결혼했다. 사랑하는 엄마를 버렸다. 그게 귀족들의 삶이었다.
공작님의 말처럼, 내가 그와의 삶을 꿈꿀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삶이 내 삶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털썩 드러누웠다가 몸을 웅크렸다.
‘내가 감사할 줄 모른다고……?’
창밖에서는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왔다.
깜빡 잠이 들었나 싶을 때 카이델 공자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평상시 내게 보여 주던 웃음기가 없었다.
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똑바로 섰다. 나는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헛기침을 한번 했다.
“공자님.”
“…….”
“감사드려요.”
“뭘 말입니까?”
“다……. 어디서 어디까지 감사드려야 할지도 모를 만큼 저에게 많은 것을 해 주셨잖아요. 저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로리샤.”
“…….”
나는 그 순간의 내 기분을 표현할 말을 알고 있지 못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기분, 그 구멍으로 찬바람이 폭풍같이 지나가는 기분.
‘천만에요, 로리샤.’는 그렇게 예의 바를 수가 없었다. 마치 아무 상관 없는 남에게 하듯.
그가 말했다.
“론드 후작이 돌아왔어요. 만나러 가겠습니까?”
“네. 공자님.”
나는 기죽어 대답하고 그를 따라 내려갔다.
복도를 걸으며 바라보는 그의 등은 그렇게 넓고 단단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낯설었다.
‘천만에요, 로리샤.’처럼 낯설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론드 경이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느슨하고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이곳이 남의 가정이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웃어 보았다.
론드 후작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카이델 부인!”
“론드 후작님, 보고 싶었어요!”
나는 쪼르르 달려가 그와 포옹했다. 그에게서는 풀냄새가 났다. 정원사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였다.
내 속마음은 엉망진창이었음에도, 그런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게 사랑의 냄새구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사이 황궁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던 듯한데.”
“정말 하루하루 똥줄 태우며…….”
그때 후작 부인이 배를 감싸며 작은 신음을 냈다.
“아아.”
“괜찮습니까? 부인, 괜찮아요?”
론드 후작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표정은 금세 괜찮아졌음에도 론드 후작의 호들갑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카이델 공자도 민망해서 살짝 헛기침을 할 정도였다.
후작 부인도 살짝 눈치가 보이는지 론드 후작의 팔을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후작님, 잠깐 배가 아팠는데 지금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에요. 그런데 팔뚝이 아침보다 더 단단해졌어요?”
“기사단에서 몇 놈 집어 던지고 와서 그런 모양입니다. 사고 쳤을 때 즉시 틀어잡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네. 그럼요. 그런데 후작님이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좋아요. 론드 경도 잘 어울리지만 후작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많이 부르세요, 후작 부인.”
“네. 후작님. 호호호.”
나는 의자 팔걸이를 꽉 붙들었고, 카이델 공자는 아주 낮은 침음을 흘렸다.
‘죄 없는 자, 돌을 치라’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런 꼴을 보면 죄 있는 놈이 돌팔매질해도 뭐라고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침함과 표독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밀리오라 황녀 전하가, 눈에서 꿀물을 줄줄 흘리면서 남편 팔뚝을 쓰다듬는 모습이라니.
론드 후작은 또 어떻고. ‘그러면 많이 부르세요, 후작 부인’?
아무튼 론드 후작은 말했다.
“에리아. 후작 부인의 다과를 들일 시간이다.”
“어머, 지금은 괜찮아요. 손님이 계시잖아요.”
론드 후작이 살짝 뚱한 얼굴을 하자 그녀가 우리를 향해 해명했다.
“임신했을 땐 좋은 것만 먹어야 한다고, 특별한 간식을 만들어서 나를 자꾸 살찌우지 뭐야.”
“그, 그래도 보기 좋으세요.”
내가 겨우 대답하자 론드 후작이 그녀를 홀린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카이델 공자 때문에 진이 빠져 있었는데, 이 꼴을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카이델 공자도 당황하며 눈을 굴리더니 나를 따라 일어났다.
그러자 밀리오라 전하가 론드 경의 뺨을 쓰다듬어 자신을 바라보게 하며 건성으로 말했다.
“가니? 가서 쉬어. 내일 함께 산책하자.”
우리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휴우. 괜히 왔어요. 걱정할 필요도 없었는걸.”
“그렇군요. 새 후작가의 번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뭐 저런 늙은이 같은 소리로 대답을 하는지.
나는 뚱하게 자리에 앉았고, 그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무심코 본 복근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야 했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일 당신이 후작 부인과 보내는 동안 저는 론드 후작과 아모에 백작을 만나 기사단을 둘러보고 올까 합니다.”
“…….”
그는 저런 광경을 보고도 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부 군벌과 친교를 다지고 군사력을 점검하고.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제 그와의 대화가 두렵지 않았다. 더 나빠질 것이 없다는 체념 때문이었다.
“공자님도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셨을 거예요.”
카이델 공자의 눈매는 내가 처음 보는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마음에 드는 여자’?”
“공자님도 제가 싫었으니까 첫날밤에 다른 방에서 주무신 것 아닌가요?”
“……!”
카이델 공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소리를 하는 내가 한심했고, 이런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도 싫었다. 하지만 더 회피하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악연이었어요. 공자님이 저를 유혹한 것도 그레이언 전하의 명령이었잖아요. 제가 작위를 얻어 혼자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려고요.”
“그건……!”
그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찔리긴 찔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사이엔 보통 부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있었던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끝내자고 말하면 왜 저만 나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 감사할 줄 모르는, 좋은 걸 알아볼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나는 내 목소리가 꺽 하고 갈라졌을 때야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리샤.”
“딸 가진 귀족들이 차기 첫 번째 사자를 채어 가려고 들썩이고 있대요. 공자님도 알고 계시죠?”
나는 카이델 공자의 눈동자가 그토록 흔들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
나는 조금 슬퍼졌다. 이미 충분히 슬펐지만 조금 더.
카이델 공자가 처음으로 나에게 언성을 높였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작은 상처를 냈다.
“그들이 제멋대로 하는 짓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늘 온갖 말이 떠돌아요. 무시해요.”
나는 왈칵 나오는 눈물 때문에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 애쓰며 말했다.
“공자님은, 제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그는 잠시 이를 악물고 서 있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훌쩍거리면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빌어먹을. 꼭 부부 싸움 같네.”
* * *
우리는 다음 날 적당한 시각에 식당에 모였다. 로아르저처럼 너무 늦지도 않고, 카이델저처럼 꼭두새벽도 아닌 평범한 아침 시간이었다.
나는 약재상 점원 시절 익힌 기술과 힘을 다 끌어모아 밝은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카이델 공자도 가면을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우리는 퍽 태연한 손님을 가장할 수 있었다.
다행인 점은, 눈앞의 잉꼬부부에게 압도당해 내가 처한 감정적 곤경을 쉽게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후작 부부가 접시를 전혀 보지 않고 식사하는 기술 같은 것에 말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놀렸다. 반 이상을 서로의 입에 떠넣어 주었기 때문에 음식을 흘리는 법도 없었다.
“오늘 채소가 몹시 신선해요.”
“제가 새벽에 직접 따 왔어요. 우리 후작 부인 먹여 드리려고.”
“어머. 감사해서 어떡해요. 저 정말 감동했어요. 후작님.”
“당신이 행복해서 우리 아기가 쑥쑥 크면 좋겠군요.”
“어머!”
후작 부인이 배를 안고 몸을 움찔하자 우리 모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론드 후작은 바로 겁에 질렸다.
“부인?”
그녀는 장난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기가 방금 쑥! 자란 것 같아요!”
그리고 하하하. 호호호.
나는 눈앞이 살짝 어찔했지만 카이델 공자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태연하게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태도는 내가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무사히 식사를 마쳤다.
그러자 후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후식은 호숫가에서 먹어요. 조금만 걸으면 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