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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밀리오라의 전원생활(1) (146/155)


144화. 밀리오라의 전원생활(1)
2023.07.26.


“황태자 즉위식을 치르신 후 잠을 줄여 가며 일하고 계십니다. 약혼녀 샨라 공주께서도 이번에 동행하고 싶어 하셨으나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샨라 공주는 어떤 분이죠?”

나는 카이델 공자의 눈치를 흘끔 보고 말했다.

“류엘 님을 여자로 바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어머나!”

“하지만 그레이언 전하와 금방 친해지셨어요.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분이세요.”

“설마. 그레이언 오라버니와 금방 친해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로카르드 공자도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해 준 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껄끄러운 사이일걸?”

“그러니까요!”

“엄청난 사람인 모양이네.”

“후작 부인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예요.”

밀리오라 전하는, 후작 부인은 새 호칭이 어색한지 살짝 웃었다. 나도 웃었다.

“네가 그녀를 좋아한다면 나도 좋아할 수 있을 거야.”

“그럼요. 하지만 좀 나중에 만나시는 편이 좋겠어요. 샨라 공주님은 목소리가 엄청 크시거든요.”

“그렇구나.”

“네.”

황녀 전하는 내 손을 잡으며 방긋 웃었다.

“로리샤, 나 정원에 나가고 싶은데 몸이 이래서 못 나갔어. 나 꽃 좀 꺾어 줄래? 네가 좋아하는 향이 나는 걸로.”

“그럼요! 아기를 가졌을 땐 좋고 고운 것만 봐야 한대요. 그러니까 카이델 공자님 얼굴 잘 보고 계시면 제가 꽃도 꺾어 올게요.”

“어머, 너 지금 남편이 미남이라고 자랑하니?”

나는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객관적인 사실이니까요?”

“하……. 어서 나가.”

“푸훗. 네, 후작 부인.”

* * *

로리샤가 나가자, 밀리오라는 로카르드에게 사과했다.

“후작 부인 주제에 예비 공작 부인을 부려 먹어서 미안해요. 로카르드 공자.”

“별말씀을요. 로리샤는 후작 부인을 도우며 행복해합니다.”

“알아요. 참 이상한 아이예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밀리오라는 창밖으로 마당의 꽃밭을 돌아다니는 로리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생 황궁에 갇혀 살았다고는 하나, 그녀는 로리샤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순수한 애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론드만큼이나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녀는 로카르드에게 로리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라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로카르드 공자…….”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된 거예요?”

“다소 거친 이야기입니다. 론드 경에게 전할 테니 배 속의 아기님이 성큼 자라신 후에 들으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녀는 설핏 웃었다.

“아시잖아요. 론드 경의 말주변이 어떤지. 그냥 로카르드 공자가 말해 줘요. 있는 그대로. 나는 괜찮아요.”

로카르드는 오를의 가짜 병과 황후의 역할, 그녀가 스마일란에서 약을 구하려 했던 사실을 말했다.

“……내 결혼이 오를 오라버니의 약을 구하러 가는 구실이었다고요? 나는 황후 폐하께 끝까지 그 정도 존재였던 거군요.”

밀리오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황후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 사건의 결과로 그레이언 전하께서 스마일란 공주와 결혼하게 되셨지요.”

밀리오라는 설핏 웃었다. 그러나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를 오라버니가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난 충격에 그렇게 하신 건가요?”

밀리오라는 황후의 자살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타가르끼리의 교감이었다.

로카르드는 잠시 망설였다.

드레이크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하나.

자신이 당했던 지독한 학대가 모친의 불륜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하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좋을 것 없었다. 그것이 단지 어미로서의 지독한 편애였다고 아는 쪽이 당사자에게는 조금이나마 덜 비참할 터였다. 로카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후작 부인께서 일전에 드셨던 것과 같은 약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녀는 침울하게 말했다.

“내가 마신 그 약이 남긴 후유증으로 유산기가 온 거래요. 아기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밀리오라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나는 이 아이를, 내 아이들을 절대 그렇게 대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듬뿍 사랑해 줘서 론드 경을 닮은 이해심 많고 그릇이 큰 인간으로 키울 거예요.”

“후작 부인께서는 분명 그러실 겁니다.”

밀리오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아이들과 공자의 아이들이 함께 자란다면 더 좋을 텐데, 우리가 너무 멀리 있네요.”

로카르드는 무심결에 시선을 피했다. 밀리오라는 그 낌새를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었다.

“로리샤가 만만치 않지요? 그 애는 누구나 사랑하면서 아닌 척하려고 해요. 제가 상처받기 전에 달아날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

로카르드의 시선이 살짝 흔들리며 창밖을 향했다.

로리샤는 꽃 한 송이를 꺾어서 연구라도 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리아와 무엇을 토의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레이언 전하가 황태자가 되신 것을 반기고 있습니다. 이혼 허락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 정말.”

밀리오라는 그렇게 대꾸하고서 로카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리샤는 똑똑해요. 나보다 세상을 훨씬 더 쉽게 간파하죠.”

“…….”

“로카르드 공자는 정말 괜찮아요? 가문 간의 연합으로 얻을 그 부와 권력을 포기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카이델가의 안주인이 고작 사생아 출신이라는 수군거림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겠어요?”

“후작 부인.”

“지금 말고, 나중을 묻는 거예요. 로카르드 공자가 로리샤를 바라보는 더운 시선이 마침내 식었을 때. 로리샤도 그걸 두려워할 테니까.”

로카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묵묵히 창 너머 로리샤를 바라보다 물었다.

“제가 지극히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제가 지극히 오만하기 때문입니다. 후작 부인.”

밀리오라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저는 오직 제힘만으로 전쟁 영웅의 칭호를 얻었고, 다른 가문에 의지한 적 없이 첫 번째 사자의 자리를 약속받았습니다. 남에게 기대서 얻을지 얻지 못할지 모르는 그 부와 권력이 저에게는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

“같은 이유로 남의 수군거림을 신경 써 본 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감히 제게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저 밑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동요로 옅게 떨렸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걸 로리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겁니까? 왜 저는 그 방법을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겁니까? 타가르 제국 황태자 탄생의 가장 큰 공신인 제가 말입니다!”

로카르드는 자신이 밀리오라 앞에서 언성을 높여 버린 것을 깨닫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묵례했다.

“잠시 산책하고 오겠습니다. 후작 부인.”

“그래요. 로카르드 공자.”

* * *

“후작 부인! 이 꽃다발 향기를 좀 맡아 보셔야 해요!”

나는 꽃다발을 들고 반쯤 뛰듯 응접실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마주친 카이델 공자가 나를 쌩하니 지나쳐 나갔다.

“…….”

내 발은 멈추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날 뒤따르던 에리아는 당황하여 카이델 공자가 나간 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못, 못 보신 모양이에요, 카이델 부인! 부인이 너무 빨리 뛰시더라니까요?”

“으응……. 그렇지?”

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고 뚜벅뚜벅 걸어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후작 부인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후작 부인, 어때요? 이 정원 누가 가꾼 건가요? 꽃들이 하나같이 크고 탐스러워요. 향기도 좋고요.”

“어머, 그래. 이거야. 향기 너무 좋다! 누가 가꾸긴 누가 가꿔? 론드 경이 직접 했지. 내가 좋아하는 꽃과 채소만 골라 심어서 얼마나 정성을 쏟아 주는데.”

“와. 너무 자랑하신다.”

“너도 자랑했잖아. 네 남편 잘생긴 것.”

“저는 그게 아니라…….”

이 부분은 의미 없는 대화로 흘러갈 게 뻔해서 관두기로 했다.

에리아가 꽃다발을 꽃병에 꽂아 두고 나가자,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카이델 공자님은 어디 가셨어요?”

“바람 쐬러.”

“……네.”

“로리샤?”

“네. 후작 부인.”

“넌 아기 언제 가질 거야? 나와 론드 경의 아이가 외롭게 자라게 할 거야?”

“에이,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요?”

“못돼 먹은 계집애.”

“후, 후작 부인?”

나는 난데없는 비난에 놀라서 후작 부인을 보았고, 그녀는 나를 새침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세상에 남자가 없어서, 로카르드 공자를 먹고 튈 생각을 해?”

“네에?”

“제국 일등 신랑감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를 유부남으로 만들어 놓고, 또 이혼남으로 만들겠다고? 너는 양심을 어디다 팔아먹은 거니?”

“헉…….”

“하긴, 그 정도가 네 한계인지도 모르지. 너는 사생아잖아. 네 절반의 피가 네가 온전한 사자의 딸이 되는 걸 막고 있나 보지. 진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진짜 마음에 감사할 줄도 모르게.”

“전하……!”

“그만 방에 가 있을래? 나, 너 좀 짜증 나. 에리아! 카이델 부인을 방으로 모셔다드려.”

“네, 마님!”

사정을 모르는 에리아는 즐거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방으로 가야 했다.

이 층 복도 끝방은 몹시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침대에는 얇은 커튼이 드리워 너울거리고, 팔각형의 반을 자른 모양으로 외부로 돌출된 창가는 널따란 평상처럼 꾸며져 있었다.

나는 거기 털썩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꽃을 꺾은 마당이 곧장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기분이 얼얼했다. 후작 부인의 폭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황궁에 있던 시절에는 그녀의 못된 말이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약속대로 하려는 것뿐인데, 우린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을…….’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져 오며 점점 숨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백작님의 얼굴이 떠오르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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