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두 번째 사자의 유산 (144/155)


142화. 두 번째 사자의 유산
2023.07.24.


로카르드는 품에서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 약병을 꺼내 황제에게 바쳤다. 두 번째 사자 드레이크의 ‘유산’이었다.

오를의 동공은 한껏 열려 로카르드에서 황제의 손으로 약병이 건너가는 광경을 담았다.

황제가 그것을 받아들자 오를은 마른침을 삼켰다. 손이 저절로 갈구하듯 뻗어졌다.

“폐하, 그것이…….”

“스스로 병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냐, 오를?”

“아닙니다, 폐하! 그런 적 없습니다!”

“아마타전 참전을 피하려 스스로 병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냐, 오를?”

“아닙니다! 그것은 그레이언의 음모였습니다! 그레이언이 저에게 사악한 독을 먹여……!”

콰직.

오를이 충격으로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리자, 황제의 구둣발 아래서 약병이 부서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오를은 바닥에 번지는 약물을 갈구하듯 주저앉았다. 바닥에 널린 깨진 유리 조각을 향해 망연히 손을 내밀기만 했다.

황제는 그런 아들을 경멸하며 바라보았다. 그가 돌아서는 몸짓은 절연이었다.

그는 마치 분노한 사람처럼 그레이언을 향해 말했다.

“사냥은 끝났다. 승자는 그레이언이다.”

황제가 거친 폭풍 같은 기운을 끌고 나간 후, 두 형제는 시선을 맞추었다.

그레이언은 오를을 내려다보고, 오를은 그레이언을 향해 턱을 쳐들었다.

오를은 번져 가는 경련으로 얼굴을 움찔거리다가, 짐승과 같은 기괴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로카르드는 밖으로 고함쳤다.

“뭣들 하는가! 오를 전하를 밖으로 모셔라!”

그것은 유폐였다.

16. 남겨진 사람들

레오라 타가르 황후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은 뜻밖에도 로카르드 카이델이었다.

황제는 하녀 하나를 제외한 황후궁 사용인을 모두 내보내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텅 빈 황후궁에 홀로 앉은 황후는 이 정적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로카르드 카이델을 불렀을 뿐이다.

로카르드는 화려한 복도를 홀로 걸으며 이 황후궁이 전보다 넓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의 발걸음은 전보다 크게 울려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로카르드는 황후의 응접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핑크색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짙은 화장을 한 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장 비싼 보석을 꺼내 온몸에 걸쳤으나 목걸이가 걸릴 자리는 비어 있었다.

로카르드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꺼려진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몹시 나직이 물었다.

“어찌 저를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자네가 내 유일한 친구니까.”

“…….”

“드레이크를 아는 자가, 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공자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이리 앉겠어?”

“이 자리도 족합니다.”

로카르드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여인에게는 동정과 온정의 의미가 없는 탓이었다.

“미리암은?”

“르네 자작 부부는 저택 화재로 죽었습니다.”

“……그런가.”

황제는 이번 일을 묻어 두기를 원했다.

1황자가 참전을 회피하려 스스로를 중독시켰다. 그리고 그 일을 황후가 주도했다. 도저히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분노까지 숨겨질 수는 없었다. 1황자의 시종 르네 자작과 황후의 시녀 미리암 자작 부인 부부는 자택에서 불타 죽었다.

“앙카르트가는?”

“거액의 탈세가 발각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습니다. 칼린 앙카르트는 달아나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칼린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은 황후만이 알고 있었다.

“그렇군.”

“오를 전하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십니까?”

“…….”

오를은 1황자궁에 유폐된 채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신적 충격 탓에 증상이 격심해져서였다. 해독제가 없으니 이제 그는 반불구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가 부친의 지극한 분노를 피해 유폐에 그친 것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징벌 속에 있기 때문이었다.

로카르드는 오를이 어머니를 진짜로 필요로 하는 이 순간에 오를의 존재를 지워 버린 듯이 구는 황후에게서 혐오감을 느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지내시지?”

“평소와 다름없으십니다.”

“하! 그렇지……. 그럴 거야. 가서 폐하께 전해 주겠나? 내게 진 빚을 갚으시라고.”

“…….”

로카르드의 침묵에, 황후는 순간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며 눈을 치떴다.

그녀는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때리며 찢어지게 악을 썼다.

“가서 전해, 로카르드! 그 잘난 타가르 황제에게 내게 진 빚을 갚으라고 해!”

그러나 로카르드는 답이 없었다.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황후는 그가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자 헐떡이며 의자로 등을 밀어붙여 자신의 몸이 무너지지 않게 버티려 했다.

“자네는, 자네의 황제가 얼마나 파렴치한지 알아? 그자가 어떤 짐승인지 알고 있느냐고!”

“…….”

“그자는 짐승이야. 제 형제를 몰살하고 제 부모를 잡아먹은 괴물이란 말이야!”

“……!”

로카르드의 시선이 흔들리자 그녀는 광기에 찬 눈을 부릅뜨고 웃었다.

“그는 겁쟁이야! 제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차마 제 부친은 어쩌지 못해 매일 밤 끙끙댔지. 선대 황제께서 형제 상잔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나섰어. 말은 하지 않아도 그가 그걸 원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로카르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 방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퀸나 황후의 하녀를 매수해 황제의 차에 독을 타게 했어. 제 부황이 죽은 날, 그가 침실에서 내게 뭐라고 속삭였는지 알아?”

“…….”

“‘너는 나의 피며 살이야, 레오라. 나는 너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 그러니 갚으라고 해!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해!”

빌어먹을.

타가르의 피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로카르드는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그 성정에 맞지 않게 황후의 불륜을 눈감아 주고 황후파의 성장을 용인한 이유가 그것이었나.

하지만 그가 아는 황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로카르드는 씹듯이 뱉었다.

“폐하께서 제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후는 타가르의 명예를 지키라.’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이 다입니다.”

로카르드는 단호히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레오라 황후의 찢어지는 비명이 그의 등을 할퀴었다.

* * *

황후궁 발코니에 석양빛이 따뜻하게 물들었을 때, 그녀는 정신을 되찾았다.

이제는 하나 남은 하녀도 그녀가 두려워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에게서 소리를 빼앗아갔음을 깨달았다. 복도를 오가는 하녀들의 발걸음, 밖을 돌아다니는 호위 기사와 경비병의 목소리, 자신을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손님들…….

이 정적은 죽음이었다. 그녀의 남편 타가르 황제가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낸 음악이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옆머리를 기댄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옛적에 드레이크가 그녀를 위해 작곡해 준 노래였다.

그녀를 놀리는 가사가 들어 있어 그때는 눈을 흘겼건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찌 그리 다정하게 들리는지…….

레오라는 자신이 타가르의 황후라는 사실을 사랑했다. 그로 인해 황제를 사랑했고, 충성했다. 황제의 적은 그녀의 적이었다.

그 포식자의 삶에 어느 날 드레이크 오말란이 난입했다. 향기를 풍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녀는 그의 미소 속에서 깨달았다. 자신도 한 사람의 여자라고. 감정과 욕구가 넘실대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소녀와 같다고.

그와의 사랑은 자손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의식이 아닌 열정과 행복의 행위였다. 그녀가 모르던 충격적인 세계였다.

“아아……. 드레이크.”

그녀는 태양 빛이 꺼지며 붉게 물든 하늘 빛깔 속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빛깔은 ‘붉은 눈물’ 같았다.

그녀는 작은 병을 열어 약을 들이켰다. 언젠가 밀리오라가 마셨던 극약이었다.

* * *

[그래서, 나는 왜 가면 안 된다는 건데? 네 여동생을 보면 왜 안 되는데? 나도 로리샤와 놀고 싶다고.]

“샨라, 제국어를 쓰지 않는 것은 이해해도 반말은 그만둬.”

[너도 반말하잖아.]

“네가 죄다 반말로 지껄이니……. 나는 황태자고……! 제발, 로카르드. 뭐라고 좀 해 봐!”

그러나 카이델 공자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외면했다.

그레이언 황태자 전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겨우 자신을 억눌렀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밀리오라를 만나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로리샤와 놀고 싶은 거야?”

[그게 달라? 나도 남부에 가고 싶다는 거잖아. 황태자께서는 은근히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나도 예법을 곧잘 무시하고 욕지거리도 잘하는 못 말리는 애지만, 샨라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정도가 심했다. 출생부터 일국의 공주인데도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카이델 공자가 좀 나서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내 옆구리를 슬쩍 감싸며 물러나라고 신호했다.

“그럼 저희는 다녀오겠습니다.”

카이델 공자가 슬그머니 내 몸을 잡아끌어서, 나는 얼떨결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딸려 나왔다.

나는 카이델 공자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두 분만 놔둬도 괜찮을까요? 위태위태한데.”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일찍이 자신은 솔직한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상형을 만난 거예요. ……좀 과도하게 솔직하시긴 하지만.”

음. 그는 자기가 데려온 신부감이라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살짝 찌푸렸다가 그레이언 전하와 샨라 공주에 대해서는 잊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벽이 없었고, 나는 남녀 간의 문제에 끼어드는 것처럼 쓸데없는 짓은 없다고 믿었다.

우리는 황궁 출구로 나갔으나 아직 마차가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가서 확인하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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