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황후가 숨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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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황후가 숨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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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황후가 숨긴 진실
2023.07.22.
로카르드는 어둠 속에서도 급격히 늙어 버린 황후의 변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하지만 그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황후 폐하 또한 제게 주실 것이 있을 것입니다.”
“기어이 대가를 받아야 하겠다는 건가? 그것은 내 것이야. 그대 손으로 바다를 건넜을 뿐, 내 사랑이 내게 남긴 유산이야.”
“이제는 제 것입니다, 황후 폐하. 당신의 안위와 오를 전하의 생명도 지금은 제 것입니다.”
“원하는 걸 말해!”
황후는 비명을 지르듯 말했으나 흘러나오는 음성은 초라했다.
“오를 전하가 폐하 앞에 나아가 경연을 포기하고 황태자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씀하게 하십시오.”
“……그것 말고는 없을까? 공자에게 다 줄게. 첫 번째 사자의 자리, 철광석 채굴권, 뭐든.”
“오를 전하를 설득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폐하께 직고하겠습니다. 그분의 분노가 어디까지 미칠지, 저는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녀는 꽉 다문 입으로 신음하듯 울음을 흘렸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느라 고통스러워 그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제 손으로 아들을 병들게 한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 것 같아? 아들을 구하려 그런 극단적인 수단마저 동원했는데, 그사이 해독제가 다 썩어 버린 걸 발견한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아?”
로카르드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오를 전하의 발병이, 전쟁을……. 아마타전 참전을 피하기 위한 인위적인 것이었단 말입니까?”
“드레이크가 그건 말하지 않은 건가……?”
황후는 희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제 연인이 자신을 수호천사처럼 지켜보아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으리라고.
그래서 그를 만나고 온 로카르드도 다 알고 있다고 믿어 버린 탓에 나온 실언이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지만, 지금 그녀는 어제까지의 레오라 황후가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잃은 그녀는 쉽게 자포자기했다.
“그래. 나는 나의 소중한 아들이 툰바르 산맥에서 얼어붙은 시신으로 돌아오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어. 오를은 고귀하게 보호받으며 황제가 되어야 할 아이야. 그것이 그의 운명이야!”
“……지금, 황후 폐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각하고 계십니까?”
“어미가 자식을 사랑한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지?”
로카르드는 다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황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제 옛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내게는 해독제가 있었어. 오를의 참전을 막고 한두 해만 앓게 한 다음 깨끗이 낫게 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 약초의 보관 조건을 맞추지 못해 썩어 버리고 만 거야.”
로카르드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와 그의 부하들이 아마타전에서 견뎌야 했던 고난과 죽음은 여전히 그의 내부에 펄펄 살아 있었다.
그런데 황후는 그 수많은 희생을 단지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 능욕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괴로웠어. 나는 속에서부터 죽어 가고 있었어. 그런데 드레이크가 그걸 알고 날 위해 연락해 온 거야. 이토록 긴 시간 나를 지켜보다가, 정말 필요한 때에. 로카르드 공자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바칠 수 있어?”
로카르드는 이를 갈 듯 반문했다.
“그렇다면 그레이언 전하는 어째서 오를 전하의 대용품이어야 했던 겁니까? 밀리오라 전하는 어째서 당신의 딸인 적이 없었던 겁니까?”
“아…….”
황후는 마치 낯선 이름을 떠올리는 얼굴로 로카르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광기에 차 고함쳤다.
“황제 폐하는 나를 모욕했어! 나를 짓밟았어!”
“…….”
“나는 황제 폐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어. 내 손에 피를 묻혔다고! 하지만 내가 그 보답으로 뭘 받았게? 그는 내 부푼 배를 보며 드레이크의 씨앗이 태어나는 대로 내 앞에서 태워 죽이겠다고 했어!”
그녀는 광기에 차 웃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황제 폐하는 나를 창녀 중의 창녀라 불렀어. 밀리오라가 타가르의 은발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첫울음을 울기도 전에 불태워졌을 거야.”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폐하가 내게 한 그 모든 모욕과 멸시……. 내가 처음부터 드레이크와 달아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 때문이었는데, 폐하는 그런 대신 나를 배신하고 짓밟았어. 타가르 핏줄에 저주가 있으라!”
황후는 광인의 웃음으로 어깨를 들썩이다 문득 말했다.
“밀리오라? 나는 그 계집애를 볼 때마다 나를 쓰레기처럼 경멸하던 폐하의 눈길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이 제국의 황후인데!”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오를로 족해. 그 아이만은 누구도 핏줄을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적자이며 장자야. 폐하가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숭배하던 때에 맺은 결실이야.”
로카르드는 천천히 걸어 문을 열고 침소를 나왔다.
황후의 방에서 든 적 없는 손님이 나오자 하녀들이 놀랐으나, 카이델 공자를 돌려세워 연유를 물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짙은 피로 속에서 복도를 걸으며 가벼운 구역감을 느꼈다.
황후가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고, 학대한 이유가 자신의 불륜을 들킨 분노에 대한 화풀이였다니.
타가르의 두 황자녀가 일생 동안 겪은 고난이 고작 제 불륜과 남편에 대한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니.
지나치게 하찮아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드레이크 그자는 무엇인가. 불륜한 상대를 평생 바라보며 지키다, 그녀를 위해 바다에 닿은 세상을 다 뒤져 희귀한 약을 준비하는 것으로 생을 마친 남자.
그토록 처절하고 초라한 삶이 또 있을 수 있는가.
‘느리고 긴 집착이었겠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놀랍지도 않은.’
로카르드는 드레이크의 마지막 순간의 기억과 황후의 모습을 겹쳐 떠올렸다.
그들을 평생 연결한 그 강력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역겨워 더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광기가 똑같은 모양과 강도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황후궁 밖으로 나가자 햇살이 쏟아져 그의 시야를 흐렸다.
‘빌어먹을. 사랑이라니.’
그는 황후궁의 탁한 공기에서 벗어나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새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돌아가면 그에게 쌍욕을 뱉을 여자. 울면서 그를 발길질하고도 남을 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끔찍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면, 로리샤와는 그냥 평생 투덕거리며 말싸움이나 하고 살아도 좋았다.
갑자기 그녀가 그리워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뭘 꾸물거려? 사람들이 쳐다봐서 기분 나쁘니까 나를 빨리 어디든 데려가란 말이야.]
황후궁 앞에서 기다리던 자가 클록의 후드를 내리자 짙은 피부의 스마일란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곱슬머리에 붉은 눈동자가 강인해 보이는 여자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로카르드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2황자궁으로 앞장서자 그녀는 얼른 후드를 올려 쓰고 뒤따랐다.
* * *
그레이언 전하로부터 입궁하라는 연락을 했을 땐, 말 그대로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그사이 변고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즉시 마차에 올랐다. 공작님도 나를 막지 않았다.
겉으로 보는 2황자궁의 분위기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하인은 고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 주었다.
긴장 속에 안으로 들어가자 어깨와 팔을 다 드러낸 셔츠와 바지 차림의 여자가 다리를 떨며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부색을 보아 스마일란 여자가 분명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빽 소리쳤다.
[로카르드! 누가 왔어!]
그러자 카이델 공자와 그레이언 전하가 동시에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
나는 목구멍이 꺽 하고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서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로리샤!”
카이델 공자가 내 앞에 달려와 섰지만, 며칠 전 그레이언 전하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때렸다.
‘로카르드는 알아서 돌아올 테니 걱정 마. 정히 걱정하고 싶으면 스마일란 여자나 달고 오지 않을지 걱정해.’
그레이언 전하는 빙글빙글 웃으며 내 눈치를 보더니 스마일란어로 그녀에게 말했다.
[샨라, 이 사람이 로카르드의 아내야.]
[아아, 한주먹도 안 되겠는데?]
그레이언 전하는 나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카이델 부인, 그녀는 샨라. 로카르드를 스마일란에서 탈출시켜 준 대가로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하는군.”
“……스마일란 여자를, 달고 오셨네요, 공자님?”
“로…… 리샤?”
카이델 공자는 그레이언 전하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꼭 크게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 같았다.
“로리샤, 걱정했을 것 알아요.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고생이 많았을 텐데…….”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꽉 쥔 주먹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드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혼할 것, 여자가 지금 생긴다고 내가 뭐라고 할 것 있나? 없다!
외국인 며느리가 좋은지 싫은지는 카이델 공작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다. 조금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배신감은 뭐지? 왜 나는 이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지?
“아아…….”
나는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똑바로 걸어 나가자 로리샤. 마지막 모습은 깔끔하게 가자.’
“로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