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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과부가 된다면 (141/155)


139화. 과부가 된다면
2023.07.21.


그레이언 전하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자기 머리를 감쌌다.

“그러니 저의 스마일란행을 허락해 주세요, 전하. 허가 없이 갔다가 저까지 반역자로 몰리면 안 되잖아요?”

“너는, 겁도 없어?”

“일단 배에 타면 겁이 날 것 같아요. 아주 죽을 만큼요…….”

나는 공중 어디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죽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겁이 날 거라는 말은 진심에 또 진심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떨다가 당하느니, 그를 구하다가 죽는 편이 백배 나았다.

“꿈도 꾸지 마.”

“……전하?”

“놈이 선택한 일이야. 가다 죽으면 죽는 게지.”

나는 화가 나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하이자 친구가 위험에 처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지!

“너는? 과부가 되면 어떻게 할 거지?”

“네?”

“로카르드조차 없으면 카이델가에서 누가 너를 보호해 주겠어.”

빌어먹을, 지금 그게 걱정이냐고!

“이제 네가 기댈 건 나뿐이야. 카이델 부인. 내 너 하나쯤은 보호해 줄 수 있어. 지금이라도 내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은 어때?”

마치 카이델 공자의 죽음을 가정하는 듯한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태 내가 느끼는지도 몰랐던 공포가 엄습했다.

로카르드 카이델이 없는 세상 같은 게 있을 수 있었다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카이델 공자님이 불쌍하니까요.”

그레이언 전하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묘한 미소를 띠다가 갑자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너, 아내 주제에 로카르드를 아직 모르는구나!”

“네?”

나는 방금 그레이언 전하가 나를 갖고 놀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조바심을 이용해서 속을 떠본 것이다.

빌어먹을 황족 놈!

“그는 세상 끝에 던져 놓아도 돌아올 놈이야. 괜히 가서 그가 너까지 찾아오느라 진을 빼게 만들지 마. 그건 다 내 손해니까.”

“전하!”

“너는 이제 돌봐야 할 밀리오라도 없잖아. 네 남편이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행동했으니, 네가 날 책임져야지. 꼼짝 말고 카이델저로 돌아가. 명령이다.”

저렇게 애처럼 앙탈을 부리면서 카이델저로 돌아가라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삐딱하게 쳐다보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만일 르네 자작이 움직인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나라면 너를 먼저 붙잡아 로카르드를 꼼짝 못 하게 할 거다. 그러니 안전한 카이델저로 가 있어.”

“전하!”

괜히 전쟁 지휘관이 아니었구나. 인정은 하겠지만, 나를 이런 식으로 따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에게 반박하려 할 때, 그가 먼저 말했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로카르드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놈은 제 것에 꽤 민감하게 굴거든. 그러면 나도 곤란해져.”

‘제 것’. 그 말이 내 귀에 콱 들어와 박혔다.

“팔콘 경, 밖에 있나?”

그레이언 전하는 호위 기사 팔콘 경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를 직접 카이델저까지 끌고 가게 했다.

팔이 붙들려 쫓겨나는 나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더 가관이었다.

“로카르드는 알아서 돌아올 테니 걱정 마. 정히 걱정하고 싶으면 스마일란 여자나 달고 오지 않을지 걱정해.”

* * *

나는 카이델저에 도착하자마자 공작님의 방으로 찾아갔다.

“무슨 소식이 있나요?”

“움직임이 전혀 없다. 네 말대로 에론 항구에 사람을 풀었으나 저쪽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아.”

말이 되지 않았다. 저쪽에서 카이델 공자를 꺾을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내가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긴 동안, 공작님이 차를 따라 내 앞에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 차가 넘어가겠는가.

내가 그레이언 전하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내 남편이 그의 시종이지, 나는 그의 시녀가 아니다.

“공작님, 제가 에론으로 가야겠어요. 스마일란에 밀항을…….”

“로리샤.”

“네, 공작님.”

“밀항해서 어쩔 생각이냐?”

나는 뜨끔했다. 대답을 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그때 가서 생각을……. 제가 좀 닥치면 하는 편이라……. 하지만 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공작님.”

“어째서?”

“네?”

“동침도 하지 않는 남편을 구하려 목숨을 건다? 나는 이해 되지 않는다.”

나는 충격으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시아버지라지만 지금 그런 소리나 하다니, 공작님에게 실망했다.

하지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동침 문제는 공자님을 위해서예요. 완벽한 이혼을 위해서요.”

“…….”

“제가 이 가문의 오점인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제가 그레이언 전하를 돕는 것도 그래서예요.”

“이혼 허가를 받기 위해서?”

“네. 공작님.”

그는 나를 등지며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내 아들의 가장 가까이서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로카르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도 삶은 함께하지 못하겠다니…….”

나는 둔기로 뒷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공작님은 왜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공작님, 지금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해야 할 때예요.”

“로리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다. 삶과 죽음 모두.”

나는 공작님의 여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가장 어쩔 줄 몰라 해야 하는 사람은 공작님인데, 그는 사랑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공작님, 뭔가 알고 계시는 거죠? 제발 말씀해 주세요!”

“황후 폐하께서 로카르드와 같은 시기에 사라지셨었던 것 같다.”

“네?”

“내 짐작이 맞다면 로카르드는 생각보다 안전할 거다. 너는 그동안 머리를 좀 식히거라. 소식이 온다면 바로 전해 주마.”

나는 그럴 순 없다고, 울컥해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작님이 나를 경계하게 해서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억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공작님.”

“복도에 호위를 세울 테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거라. 로리샤.”

“……!”

나는 기사의 감시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창 아래 정원에도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창 너머 벽을 타고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감금되어 있었다.

‘공작님은 뭔가 아시는 거야.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씀을 안 해 주시지?’

“아아아!”

내가 화가 나 침대를 팡팡 때리자 밖에서 기사가 노크했다.

“작은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이때라고 비명을 질렀다. 한 명 정도면 어떻게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대답이 없자 기사가 내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는 열린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복도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복도에는 기사가 다섯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겨우 나 하나 지키자고…….’

“즉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작은 마님.”

기사 한 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물고서 괴로워했다. 백작님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나는 곧 무력감에 젖어 침대에 대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사랑이라니.”

하기는 카이델 공작님이 치른 전투가 한두 개인가. 이 정도 일로 당황하는 분이라면 첫 번째 사자의 지위를 지켜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 아들 걱정은 않고 사랑 타령이라니.

공작님의 말이 떨쳐지지 않아 괴로웠다.

‘로카르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도 삶은 함께하지 못하겠다니.’

공작님이 내 삶에 대해서 뭘 안다고.

문득, 내가 그와 동침하는 진짜 부부 사이였다면 그가 나를 남부로 가도록 허락해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나는 진이 빠져 그렇게 깜빡 잠이 든 것도 몰랐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잠들기 전에 하던 생각을 바로 연결해서 하고 있었다.

공작님은 내가 그와 동침하지 않아서 못 미더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혼을 언급해서였다.

나는 쓰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도망갈 준비만 하고 있는 병사에게 누가 전투를 맡기겠어.”

* * *

운명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왔다. 그것이 그린 궤적 끝에는 로카르드 카이델이 서 있었다.

깊은 밤. 그가 뺨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황후 침실의 발코니에 내려섰을 때, 의자에 앉아 있던 황후는 하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로카르드는 그녀가 제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카이델 공자, 그는? 나의 그는 어찌 지내고 있어? 만나 보았을 거야. 그렇지?”

로카르드는 황후가 무엇을 제일 먼저 물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역시 그녀의 첫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사자의 안위였다.

지독히 맹렬한 어미인 줄 알았던 그녀는 그렇듯 맹목적인 여인이었다.

로카르드의 낮은 음성은 오늘은 음침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임종했습니다. 지금쯤 스마일란 앞바다에 뿌려졌을 겁니다.”

하아, 그녀의 목구멍에서 한에 서린 한숨이 나왔다. 마치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참 아름다웠어. 그의 목소리에서는 향기가 나고, 그의 손끝에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어. 잔인하고 냉정하기가 칼날 같은 황제 폐하와 달리, 그는 내가 슬플 때 나보다 먼저 울어 주는 남자였어. 아아……. 나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로 인해 깨달았는데.”

그녀는 고통을 참느라 목구멍에서 기이한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황후의 위엄을 쥐어짜 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의 장례를 보지 않고 돌아온 건 급히 가져올 것이 있어 그랬겠지, 카이델 공자? 드레이크가 내게 남긴 유산을 돌려줘. 그대는 카이델이잖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카이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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