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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사랑 혹은 느리고 긴 집착 (140/155)


138화. 사랑 혹은 느리고 긴 집착
2023.07.20.


“황후 폐하를 사랑하신 겁니까, 지금까지……?”

드레이크는 느린 숨을 한번 쉬어 힘을 그러모았다.

“느리고 긴 집착이었겠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놀랍지도 않은.”

드레이크는 손을 뻗어 로카르드의 손을 꽉 쥐었다. 죽어 가는 자의 손아귀 힘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해서, 로카르드는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드레이크는 제 머리맡에 있는 상자를 눈짓하며 말했다.

“약을 구해 두었어. 오를 전하께 가져다드리게. 더 방치하다간 정말로 생명이 위험하니.”

“오를 전하의 병증은 체질에 의한 것이라 약이 없다고…….”

“아니…….”

“……후작님?”

드레이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젓던 채로 숨졌다.

로카르드 뒤에서 지켜보던 류엘이 목을 긁는 듯한 침음을 흘렸다.

[끝까지 저를 버린 여자만 위하다 가는군. 내 지혜롭고도 어리석은 친우께서는.]

로카르드는 류엘이 밖에 나가 장례 준비를 하라고 고함치는 소리를 들으며 품에 상자를 챙겨 넣었다.

그는 하인들이 달려와 드레이크의 유해를 옮기는 것을 보며 가벼운 오한을 느꼈다.

오를이 승리할 것이라던 류엘의 말이 옳았다.

황후의 강력한 후원을 가진 오를이 계획대로 건강을 되찾았다면, 그레이언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 * *

황후는 황궁을 빠져나갔을 때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환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의 레오라 타가르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빛을 잃었고, 그사이 이십 년은 늙은 듯 보였다.

황후 곁을 하루도 떨어지지 않던 시녀 미리암은 심한 여독에 로카르드에게 입은 부상이 덧나 입궁하지 않았다.

황후궁 하녀들은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멋대로 수군대었으나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황후는 환궁 소식을 들은 오를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르네 자작이 칼린 앙카르트를 데리고 찾아왔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황후 폐하.”

르네 자작은 스마일란 사신의 출궁 시점부터 황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녀가 상세히 말해 주기를 원했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로카르드에게 누명을 씌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작은 열심히 설명했다.

로카르드의 밀항에 스마일란 간첩죄를 걸어 극형에 처해야 한다. 그러면 경연은 더 치를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황후의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오를의 상태는?”

“병증이 중해지고 길어지셨습니다. 황후 폐하의 부재로 걱정이 깊어 그러신 듯합니다.”

르네는 황후의 입을 열게 하려 강조했다.

“오를 전하의 상태가 이렇듯 지속된다면 귀족원에서 오를 전하의 황태자 자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반드시…….”

“이만 돌아가 보게.”

황후는 르네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르네는 평소와 완전히 다른 황후의 모습에 당황하여 눈을 굴렸다.

칼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황후 폐하,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델 공자가 황후 폐하를 스마일란으로 납치하려 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는 필시 남부 에론항으로 돌아올 테니 그곳에 사람을 풀어 체포해 오겠습니다.”

르네는 ‘그런 수가 있었나!’ 하듯 눈을 크게 떴다. 황후도 칼린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옮겨 놓고 있었다.

르네가 칼린에게 물었다.

“납치한 이유는 뭐라고 할 텐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지 않나. 카이델 공자를 얕보지 말아.”

“그는 심문 중에 자결할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유죄의 증거가 또 있을까요?”

로카르드 카이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죽이자는 말이었다.

“호오…….”

르네는 눈을 반짝이며 칼린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런 영재가 또 있나 하는 눈빛이었다.

칼린은 짐짓 눈을 내리깔았다.

황후가 말했다.

“자네는 나가 보아. 칼린, 너는 남으렴.”

“……!”

황후의 말에서 칼린은 전율을 느꼈다. 칼린은 그 순간 황태자 자리를 좌우하는 책사가 되어, 황후와 독대하는 지위로 올라서 있었다.

한편으로는 당연한 포상이었다. 황후는 앙카르트가 용병의 도움으로 남부에 몰래 다녀왔다. 그녀는 황후의 약점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칼린이 환희를 숨기고, 어린 계집에게 제 지위를 빼앗긴 르네가 썩어가는 표정을 숨긴 채 나가자, 황후가 나직이 말했다.

“이리 가까이 와 보렴, 칼린.”

“네. 황후 폐하.”

칼린은 황후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 고개를 숙였다.

“너는 무엇을 사랑하니, 칼린 앙카르트.”

사랑이라니, 칼린은 뜻밖의 질문에 주춤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힌트가 분명했다. 어쩌면 기회였다.

‘오를 전하를 사랑한다고 말할까?’

‘장래에 황후가 되어 당신의 뒤를 잇겠다고, 지금 말할까?’

“윽……! 끄윽!”

눈앞이 까매지는 것과 동시에 칼린의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황후는 칼린의 갈비뼈 아래에 찔러넣은 단검을 한 번 더 힘주어 밀어 넣었다.

칼린의 열린 입으로 피가 흘러내리자, 황후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몸뚱이를 밀쳤다.

칼린의 마른 몸은 바닥에 떨어질 때 풀썩 소리밖에 내지 않았다.

“왜…….”

칼린의 목구멍에서 피와 함께 새어 나온 목소리에, 황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후는 손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너 때문이야. 네가……! 로카르드 공자가 내 아들의 약을 가지고 돌아올 텐데, 네가 그걸 방해하게 놓아 둘 순 없어. 칼린.”

칼린의 이마에는 기괴한 주름이 잡혔다. 지금 자신이 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운 이유를, 자기 옆구리에 꽂힌 단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녀는 영리하여 지금까지 무엇이든 읽고 외우기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약……?”

“그래.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 내 유일한 자식을 위해 약을 구해 둔 것이 분명해. 그는 그런 사람이거든……. 그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아.”

* * *

황후가 칼린과 독대에 들어가고, 방에서 쫓겨난 르네 자작은 뼈가 쓰렸다.

분하지만, 그 겁 없는 계집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건 어쩌면 정해진 일이었다.

황자에게 계집의 몸뚱이를 들이밀면 그가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십수년의 충성이 참으로 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상념은 헐떡이며 달려온 하녀에 의해 깨어졌다.

“자작님, 황후 폐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앞장서게.”

르네 자작은 황후가 자신을 이리 금방 부르자 반색을 했다.

칼린의 계획은 정변이나 다름없었지만, 겉으로 포장만 잘하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르네는 그 공적을 새파란 계집애에게 뺏길 수 없었다. 자신이 주도해야만 했다.

르네가 황후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하녀가 즉시 문을 열었다.

“헉……!”

방 안으로 들어간 르네는 입을 쩍 벌린 채 멈춰서고 말았다.

칼린이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있었다. 그곳은 언젠가 황후가 밀리오라의 이마를 짓눌렀던 자리였다.

황후는 지독히 피로하게 속삭였다.

“르네 자작, 그것을 좀 치워 주게.”

* * *

“카이델 공자님은 배를 타고 스마일란에 가셨대요.”

나는 그레이언 전하에게 보고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움이나 당황보다 배신감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잘해 주다가 이렇게 사라지기가 어디 있어!’

‘남편이라며! 아무리 가짜라도, 가정이 있는 남자가 이러기가 어디 있냐고!’

하지만 화를 내 보아도 금방 진짜 속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혹시 납치된 것은 아닐지, 무사히 돌아올 수는 있을지,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목에서 무엇이 울컥 올라와 좀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데, 나를 쏘아보는 그레이언 전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니야, 로리샤. 공자님이 그레이언 전하를 돌봐 주라고 했어.’

지금 나는 카이델 공자의 대리인, 그레이언 전하를 지켜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상단 쪽에서 퍼진 소문이니 이미 오를 전하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저들은 이걸 공자님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삼을 거예요. 그레이언 전하.”

“제기랄. 반역죄를 씌워도 족한 일이 아닌가!”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내가 르네 자작이라도 그럴 거다. 일단 반역 혐의를 씌워서 체포부터 하고, 사유 같은 건 그 뒤에 적당히 만들면 된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그 인간은 내 남편이라고!’

“전하, 당분간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그레이언 전하가 도끼눈을 떴지만 이제는 하나도 겁이 안 났다.

“스마일란에 가야겠어요.”

“미쳤어? 이 소리를 꼭 내 입으로 말하게 할 거야, 카이델 부인? 너는 날 지켜야지, 어딜 가.”

“저들이 카이델 공자님께 반역 혐의를 씌운다면 그 혐의를 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스마일란의 왕자님뿐이에요. 그를 데리러 가야겠어요.”

“하! 그의 신부를 빼돌린 게 너잖아. 잊었어?”

나는 곤혹스러웠지만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 잘 꼬셔 보면 될 것 같기도 해요.”

“오, 그래?”

그레이언 전하가 빈정거렸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전하. 그분이 저한테 관심이 있었거든요.”

“하…….”

그레이언 전하가 이 사이로 무엇을 중얼거렸는데, 그것은 꼭 이렇게 들렸다.

‘남자도 은근히 꼬이고. 젠장.’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나는 그레이언 전하가 나를 무슨 짐승 보듯 하는 시선에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저……. 그 류엘 님의 이름이 페일란 뭐시기 류 엘드 스마일란이래요. 류 엘이요.”

“그자가 왕자였다고!”

“그리고 저한테 스마일란행을 제의하셨었고요. 스마일란에서는 사생아를 그렇게 멸시하지 않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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