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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사라진 로카르드 (139/155)


137화. 사라진 로카르드
2023.07.19.


“무슨 짓이오?”

“저를 그 친우에게 데려다주셔야겠습니다.”

“그대의 황후는, 저기 그냥 내버려 두겠다는 거요?”

로카르드는 옆구리를 붙잡고 훌쩍거리고 있는 미리암을 흘끔 보고 말했다.

“시녀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녀도 시녀라면 주인을 책임질 줄 알겠지요.”

류엘은 배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스마일란어로 말했다.

[과연, 제국의 새끼 사자는 제정신이 아니지 않는가!]

* * *

로카르드는 두 번째 사자 드레이크 오말란 후작에 대해 막연히만 알고 있었다. 오말란 후작의 활동기는 꽤 오래전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이크는 마치 예인과 같은 여성적인 미남에 문무에 모두 탁월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음악과 시를 즐겨 예술의 신이 현신했다는 찬사마저 따를 정도였다.

궁 안팎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했다.

로카르드는 언젠가 부친이 오말란 후작이야말로 세 사자 중 가장 뛰어난 자였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칭찬에 인색한 부친임을 고려하면 극찬이었다.

그러던 드레이크는 제국 남부를 방문하던 도중 도적 떼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다. 황제는 그를 기려 자신의 치세 동안 두 번째 사자의 자리를 비워 두기로 했다.

로카르드가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지금까지 버젓이 살아 있었고, 심지어 비밀리에 스마일란 왕가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죽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스마일란으로 향하는 범선의 객실 안에서, 류엘은 마치 로카르드에게 복수하듯 술을 권했다. 잔뜩 취한 그들은 각기 제가 편한 말로 지껄였다.

류엘은 흔들리는 촛불에 ‘붉은 눈물’을 비춰 보며 신기해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던 흠집이군.]

“흠집이요?”

[그가 예전에 남부에 간 건 해적들과의 밀거래를 위해서였소. 이 목걸이를 황후의 생일 선물로 바치려 했다지.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황제 폐하가 보낸 자객의 칼을 맞았소. 나였다면 내 아내에게 손을 댄 자를 그리 간단히 죽이지 않았을 텐데.]

객실 안은 ‘붉은 눈물’이 산란하는 붉은빛으로 어지러웠다.

로카르드는 라일리 경매에 나온 이 보석을 무시했던 때를 떠올리며 실소를 지었다.

[그때 품 안의 보석에 맞은 칼이 부러졌다지. 그가 죽을 뻔한 것도 황후 때문, 목숨을 건진 것도 그녀에게 바친 자신의 심장 덕분이었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붉은 눈물’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하! 그렇다니까. 황후에게 다시 바칠 날을 기다리며 평생을 품에 품고 살았던 거요.]

“그런데 어떻게 경매에…….”

로카르드는 질문을 마치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신호로 ‘붉은 눈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죽기 전에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황후의 불륜이라니, 로카르드는 머리가 다 아팠다.

하지만 류엘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제국 사내에게는 순정이 없다고 누가 그랬단 말인가! 드레이크 오말란을 보란 말이오.]

술이 들어가자 류엘의 목소리가 더 커져 귀청이 다 울렸다. 그는 그 큰 목소리로 웃으며 로카르드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나 로카르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불륜입니다. 페일란 왕자님.”

[그에게는, 내 친우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이었소.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로카르드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내 친우께서는 제국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항구로 도망쳐 마침 우리 범선으로 몸을 던졌소. 제국의 손실이자 스마일란의 이득이었지.]

“지난 이십여 년간 스마일란의 무역이 크게 번성했지요.”

[그의 공이 컸소. 하지만 그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강경파가 득세했소. 아가엘과의 무역을 그르친 것도 그들 짓이오. 빌어먹을!]

“그렇군요.”

[그것을 그대의 아내가 제국의 이득으로 바꿔 버렸소! 대단한 장사꾼 기질 아니오?]

로카르드는 술맛이 다 달아나는 얼굴로 찌푸렸다.

“그녀는 그만 욕심내시죠.”

[그나저나, 나의 신부였던 이는 잘살고 있소?]

로카르드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로리샤 이야기를 꺼내니 밀리오라 이야기로 맞받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밀리오라 전하는 행복을 되찾으셨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말만 번지르르하긴.]

류엘은 잔뜩 못마땅하게 뱉고는 로카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카르드는 지금부터 그가 중요한 말을 할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를 황자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었소.]

“황후 폐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두 번 용서하는 분이 아닙니다.”

“…….”

오를 황자의 가장 큰 자원은 황후의 무조건적인 후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황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황제가 이 일을 안다면 용서하겠는가.

류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로카르드는 지금이 그가 기다렸던 순간임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스마일란은 입장을 바꾸시겠습니까? 그리하면 그레이언 전하는 스마일란을 영원한 친구로 여길 것입니다.”

[신부를 빼앗아 내게 망신을 준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페일란 왕자께서 그런 데 꿈쩍하지 않는 분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카르드의 스마일란어 대답에, 류엘은 다시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술에 취하면 웃음이 많아지는 사내였다.

* * *

오를은 병상에서 열이 오른 채로 로카르드의 실종 소식을 들었다. 아카데미에도 황궁에도 들지 않고, 벌써 수일 째 그의 행적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그 사생아 시녀가 2황자궁에 대신 드나드는 걸 보면 카이델가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를에게 진짜 문제는 황후도 함께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모후가 밀리오라의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나 문을 닫아건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황후가 어디에 가고 어디에 갔다고, 아랫것들이 자꾸만 핑계를 대기만 할 뿐 황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후는 그의 병증이 이렇게 심하게 도졌는데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를은 자신이 황후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열로 이따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황후를 걱정하고 있을 때 시종 르네 자작이 들었다.

“전하, 잠시 운신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작, 지금 내 꼴이 안 보이오?”

“그것이……. 송구하오나 칼린 앙카르트가 뵙기를 청합니다.”

“그 계집이 뭣 하러?”

“황후 폐하의 행방에 관한 일이라 합니다. 전하께만 말씀드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빌어먹을. 들라 해.”

칼린은 우아한 몸짓으로 오를에게 예를 올렸다.

오를과 르네는 칼린으로부터 황후의 남부행과 거기 나타난 로카르드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황후의 부탁으로 자신이 집안 소속 상단 호위를 붙여 그녀의 남부행을 주선했다고 말이다.

“모후께서 왜? 로카르드 그 새끼가 왜!”

“전하, 고정하십시오! 몸이 상하십니다.”

르네 자작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직접 수건에 찬물을 적셔 오를의 이마에 얹은 수건과 바꾸어 주었다.

칼린은 침착하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다시 저희 앙카르트 상단 호위의 보호 속에 안전하게 환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전하.”

“네년이, 네가 무엇이 중요한지 어찌 안다고! 네년이 내 모후를 꾀어 그런 사지로 몬 것이 아니냐!”

오를의 눈빛에 광기가 서리자 르네가 나섰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이 미천한 아이가 황후 폐하의 청을 어찌 거절했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저희조차 모르게 출궁하셨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셨던 겁니다.”

칼린은 자신에 대한 무시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카이델 공자는 스마일란 사신을 따라 배에 올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1황자 전하, 그에게 간첩 혐의로 반역죄를 씌우십시오.”

로카르드 카이델을 잡을 수 있다니, 오를은 갑자기 맑아진 눈으로 르네를 바라보았다. 르네는 활짝 웃었다.

* * *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로카르드는 스마일란 왕궁에서 드레이크 오말란을 만났다.

병석에 누운 남자는 ‘예술의 신’의 현신이었다는 한때의 찬사가 무색하게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시력마저 온전하지 않아 자신에게 온 손님이 레오라 황후인 줄 알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눈에서 빛이 빠져나갔다.

“제국인, 그대는 누구인가?”

“로카르드, 로카르드 카이델이라 합니다.”

“아아……. 테란의 꼬마가?”

로카르드는 제 부친을 이름으로 부르는 자를 오랜만에 만나 묘한 기분을 느꼈다.

“네. 오말란 후작님.”

“자네가 여기 있다는 건……. 황후께서는?”

“제국에 계십니다.”

하아, 병자의 생명이 빠져나가는 듯한 긴 날숨에, 로카르드는 저절로 자기 숨을 참았다.

드레이크는 아주 천천히 기운을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오를 전하에게는 별일이 없는가?”

“무슨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겨우 그렇게 뱉고서, 그는 다시 힘을 그러모았다. 그의 생명은 다 닳아 그 끝에 있었다.

그 남자의 눈에 한 점 남은 빛은 그의 마지막 생명력이 아니라 한 여자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로카르드는 ‘사랑’이라던 류엘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후 폐하를 지켜보기를 멈출 수가 없었네. 그리고 오를 전하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로카르드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직 사랑을 몰랐다. 로리샤에게 가진 자신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그런 것은 책에도 없었고 남이 가르쳐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드레이크와 황후의 이 관계가 사랑이라기엔 지나치게 파괴적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그와 로리샤는 그저 남이었다.

그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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