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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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그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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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그의 진심
2023.07.18.
나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씩씩하게 잘 먹고 잘사는 독신 여성이라는 내 꿈을 이뤄주려 한 것이다. 그가 내게 선사하려던 것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종류의 날개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나에게 갖은 욕과 비난을 들어 가면서. 아니, 그 자신이 그런 추문을 감당하면서.
고마워하고 감동해야 하는데, 감정이 고장 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멍청한 방법을 선택할 수가 있지?’
‘그는 왜 나에게 그 정도까지 해 주는 거지?’
이어지는 생각은 나를 불행하게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의 발목을 잡은 건가?’
언젠가 그는 내게 말했다. 선의는 선의로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화가 났다.
“정말 이상한 분이네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런 약속을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울컥 언성을 높이자, 그레이언 전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여자라 차마 로카르드와 같은 욕은 못 하겠구나. 끼리끼리 논다더니.”
그레이언 전하는 방금 내게 완곡하게 미친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가 진짜 귀족가의 딸로 자랐다면 지금 분해서 눈시울이 더 뜨거워졌을 텐데.
내 머릿속은 그저 카이델 공자로 꽉 차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는 감사할 줄 모르는구나. 로리샤 카이델.”
“……!”
나는 입을 앙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야말로 로카르드 카이델 같은 남자의 보호를 받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끝까지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나는 꺼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지는 몰라도 은혜는 절대 잊지 않습니다. 전하.”
그는 내 도발적인 대답에 불쾌한 듯했다.
그런데 그때 하인이 들어와 나를 흘끔 눈짓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나를 물려 달라는 몸짓이었다.
“괜찮아. 말해.”
하인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고 물러가자 그가 말했다.
“오를 형님의 병증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 늘 왔다 갔다 하는 증상이지만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경연이 다시 시작될 걱정은 좀 더 미뤄도 되겠군.”
그레이언 전하는 이렇게 말하면서 삐뚤게 웃었다.
“하지만 절대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니 내게는 희망이 없어.”
* * *
제국 남부의 큰 항구 에론.
류엘은 자신을 기다리는 배를 무겁게 올려다보았다. 배 앞 덱에는 배에서 대기하던 호위들이 모두 나와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이번 제국행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로카르드 카이델.
류엘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실소를 띠었다.
이번에는 그가 다소 위험한 수를 던진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타가르 황궁에 들어가 황족과 그 주변의 면면을 확인한 것은 소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승리의 전제는 적을 아는 것이 아닌가.
통역사를 가장했던 그의 호위가 말했다.
[왕자님. 배에 오르시지요.]
[드레이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왕자님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다. 빨리 제국 영토를 벗어나야 합니다.]
류엘의 호위는 항구를 지나던 용병 무리가 이쪽으로 방향을 돌려 오는 것을 보고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류엘은 무리 중간, 어느 클록 아래로 드러난 치맛단을 보고 그를 제지했다.
무리 앞으로 나아와 후드를 벗은 여자는 황후의 시녀 미리암이었다.
“제 주인께서 류엘 사신과의 동행을 청합니다.”
류엘은 그녀의 뒤에 서 있다가 후드를 살짝 내린 또 다른 여자를 확인하고 얼굴을 밝혔다.
그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예를 올렸다.
“배에 오르시지요, 황후 폐하.”
류엘의 호위들이 길을 텄을 때, 덱 통로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카르드는 상인 복장을 한 채 두 무리 사이에 멈추어 있었다. 류엘의 호위들이 일제하 경계 자세를 취했다.
황후는 자기 호위 뒤로 몸을 숨기려 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로카르드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후 폐하, 제가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타가르의 황후 레오라는 류엘을 향해 소리쳤다.
“무엇해요, 저자를 베시오!”
이것은 로카르드가 마지막까지 피하고 싶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호위들이 달려들었을 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로카르드는 그들을 차례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류엘은 로카르드의 몸놀림에 감탄하며 자신의 부하들을 제지했다.
“타가르인들의 싸움이다. 우리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그사이 시체 몇이 항구의 덱 너머로 바닷물에 가라앉았다. 황후가 데려온 상단 호위 용병들은 로카르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둘은 황후와 시녀를 남겨 두고 달아나 버렸다.
미리암은 로카르드가 검날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다가오자 겁을 먹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지나쳐 황후 앞에 멈추었다.
“따르시지요.”
“카이델.”
황후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제 목에 들이대더니 류엘의 배로 한 발짝씩 옮겼다.
“내 걸음을 막는다면 공자는 폐하 앞에 내 시신을 가져가야 할 것이야.”
로카르드는 그녀를 천천히 따르며 말했다.
“타가르의 황후께서, 어째서 목숨을 걸고 스마일란으로 밀입국하시려는 겁니까?”
“그것은 공자가 알 바 아니야. 이것은 나의 일,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타가르 황제를 모시는 자로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더 움직이시면 반역 행위로 간주하여 수도로 호송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로카르드의 표정을 보고 그것이 허풍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류엘을 향해 고함쳤다.
“뭣 하는 거요! 그는 오를의 가장 큰 적이니 어서 목을 베고 나를 스마일란으로 데려가요!”
류엘은 이마를 짜증스럽게 긁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제국어로 소리쳤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내 친우의 부탁과 스마일란의 이익이 합치했기 때문. 타가르의 내분에 끼어들 생각은 없소. 내 배에 누가 탈지는 알아서 결정하시오.”
“뭐라고!”
황후는 치를 떨며 류엘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류엘은 얼굴에 옅은 혐오감을 띤 채 그 시선을 맞받을 뿐이었다.
로카르드가 황후에게 조금 더 다가가자 미리암이 단검을 빼 들고 덤벼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시녀는 자상을 입은 채 바다에 빠졌다.
황후는 눈앞의 로카르드와 등 뒤의 류엘을 보며 마침내 절망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그사이 미리암은 허우적거리다 덱으로 기어 올라와 울기 시작했다.
로카르드는 황후에게서 단검을 빼앗은 다음 나직이 말했다.
“이제 따르시지요. 황후 폐하.”
류엘은 혀를 차며 뱃전에 걸쳐진 계단에 발을 올렸다.
황후는 그를 향해 절규했다.
“잠깐, 멈춰!”
그녀는 무력하기 짝이 없이 로카르드에게 부탁했다.
“저 자와 잠시만 이야기하게 해 줘.”
“저를 속이실 수 없을 겁니다.”
“내가 지금 무슨 수로. 저 스마일란인과 잠시만 대화하게 해 줘. 내가 살아서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로카르드는 자신이 추적하는 것이 제발 황후의 반역은 아니기를 바랐다.
황후는 며칠에 걸쳐 앙카르트 자작의 상단 소속 호위 용병들의 보호 속에 상인들의 지름길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래서 로카르드는 추적에 지독히 애를 먹었다.
황후와 앙카르트가, 스마일란 왕자가 엮인 음모. 로카르드는 남항으로 향하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더구나 인제 보니 이 음모는 국익이 걸린 음모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로카르드는 그 나머지 경우의 수를 알기 싫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류엘을 향해 소리쳤다.
“그분께서 당신과 대화를 청하십니다. 응하시겠습니까?”
“기꺼이.”
로카르드는 결국 황후를 이끌고 류엘 앞으로 나아갔다.
류엘은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황후를 맞았다. 그러나 황후는 황궁에서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무례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클록을 열었다.
로카르드와 류엘은 그녀가 목에서 풀어 건네는 새빨간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이걸 그에게 전해 줘요.”
류엘은 ‘붉은 눈물’을 흥미로운 듯 들여다보다 품에 넣었다.
“그러지요.”
“그는, 그는 어찌 지내죠?”
“그는 화장을 원합니다.”
류엘의 화법은 가차 없었다. 황후가 스마일란에서 만나려는 이가 곧 죽을 것이라고, 화장하여 그가 한때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지울 것이라고 말했다.
로카르드는 문득 황후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이를 잊었다 불리던 미모의, 그 도도한 황후가 이렇듯 초라하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무력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돌아와 주었으면, 그랬으면 내가 어떻게든 보호했을 것인데…….”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당신이 전해 준 편지에서 그는 내게 꼭 전할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줘요. 어서!”
“저는 모릅니다. 드레이크는 제게 국혼을 핑계로 황후 폐하를 모셔 오라 했을 뿐.”
로카르드는 그제야 스마일란 사신단이 그렇게 쉽게 황궁에 들어와 결혼 교섭을 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처음부터 황후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더 큰 충격을 준 것은 한 이름이었다.
드레이크, 드레이크 오말란.
오래전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제국의 두 번째 사자.
그가 지금 스마일란에서 죽어 가며 황후를 만나기 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후는 어째서 저 ‘붉은 눈물’을 류엘에게 넘겼단 말인가.
“정말, 그대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아무것도……?”
황후의 질문이 너무나 간절하여, 류엘은 그녀를 혐오하기도 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먼바다와 덱의 해수면을 보고는 몸을 돌렸다.
“물때가 지나기 전에 배를 띄워야 합니다.”
황후는 이만 로카르드에게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완전한 체념이었다.
하지만 로카르드는 황후를 지나쳐 류엘의 뒤를 따랐다. 류엘의 뒤를 지키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류엘은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짓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