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저는 여기서 싸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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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저는 여기서 싸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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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저는 여기서 싸울래요
2023.07.17.
나는 카이델 공자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나워지는 걸 느끼며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뱃멀미가 심해서요.”
“당신은 제국 땅에서는 절대 편안해질 수 없을 겁니다.”
“당신…….”
나는 이를 갈 듯 말하는 카이델 공자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알아요. 제 싸움은 아마 평생 끝이 나지 않겠죠. 류엘 님 말대로 거기서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몰라요.”
카이델 공자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내 일에는 금방 속을 드러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충격, 죄책감, 분노 따위의 감정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싸울래요. 남이 준 자유 말고 제가 만든 자유를 누리고 싶어요.”
이번에는 류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체념한 듯 코웃음을 치고는, 카이델 공자에게 말했다.
“내 신부를 빼앗은 원한은 잊지 않겠소.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
류엘은 마치 농담처럼 유쾌한 말투로 ‘원한’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웃었다.
“로리샤 카이델 부인.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남부의 에론 항구로 와서 아무 스마일란행 배에 오르시오. 스마일란은 언제든 당신을 향해 열려 있으니.”
나는 그 엄청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앞에 한 말 때문이었다.
“……류엘 님의 신부요?”
그는 특유의 낮고 거친 음성으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 이름은 페일란이오. 페일란 류 엘드 스마일란.”
류 엘드. 그가 사용한 류엘이라는 가명은 자신의 중간 이름의 글자들을 따와서 만든 이름이었다.
우리는 멀어지는 두 스마일란인을 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공자님, 제가 방금 뭘 들은 거죠?”
“……제길!”
나는 카이델 공자의 반응이 너무 격해서 깜짝 놀랐다. 그는 내 양팔을 붙잡더니 내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로리샤, 다녀올게요. 그동안 그레이언 전하를 부탁해요. 류엘의 정체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말아요.”
“네?”
그는 대답 대신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황궁 밖으로 달려갔다.
* * *
나는 터덜터덜 걸어 그레이언 전하의 응접실로 향했다. 쭉 빠져나간 기운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벌써 며칠째, 나는 카이델 공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공작님이 카이델가의 사람을 풀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카이델가에 로카르드 놈을 잡아 오라고 엄포를 놓았고, 나는 지금 그에게 소득이 없었다고 보고하러 가는 중이었다.
‘저기요, 전하. 전하도 시종이 가출해서 갑갑하시겠지만, 저도 남편이 가출한 입장이니까 너무 화를 내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진짜로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타가르의 성질머리를 덜 자극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이…….
고민하는 동안 응접실 앞에 도착했고, 나를 알아본 하인이 알아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발코니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예민해진 상태인지는 얼굴이 보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을 내게 맡긴 카이델 공자가 미웠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내가 발코니로 가자 그레이언 전하는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수색은 소득이 없었습니다. 카이델 공자님은 숨기 원한다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는 분이라서……. 제가 한 말이 아니고 다들 그렇다고 했어요.”
의젓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내 목소리는 점점 기가 죽어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그도 나도, 카이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다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검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검을 닦아야 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집중할 다른 일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는? 네 생각에는 로카르드가 어디로 간 것 같아?”
“류엘 님을 죽이러요?”
“쯧!”
그레이언 전하는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더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가 이렇게 예민해져 있을 땐, 다디단 다과라던가 양장점이 즉효 약이었다. 그런데 그레이언 전하에게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같이 술을 마셔 줄 수도 없고, 검술 대련을 해 줄 수도 없고.
카이델 공자는 나에게 그레이언 전하를 부탁했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무리였다.
“다른 명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거기 앉아.”
“네!”
나는 엉덩이에 힘을 딱 주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당황스러우니까 말이 저절로 나왔다.
“카이델 공자님은 오직 전하를 위해서 움직이고 계세요.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시면…….”
“밀리오라는 잘 갔다던가?”
그가 황녀 전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 조금 뜻밖이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 도착하시기 전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착하면 연락이 올 거라는 뜻이군.”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흥. 내게는 인사 한마디 없이 나간 계집애가.”
나는 깜짝 놀랐다.
‘헉. 밀리오라 전하, 왜 그러셨어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더니, 그 예시를 이 정도로 생생하게 볼 줄이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섭섭하셨던 모양입니다. 황자 전하.”
“괘씸하다고 말하는 거야. 너는 지금 내 말을 어디로 듣는 거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타가르가 누구를 싫어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황녀 전하는 정말로 행복해 보이셨어요. 황자 전하.”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음에도, 그의 대답은 신랄했다.
“이젠 아모에 부인이지. 부상에 몸도 못 쓰는 퇴물 기사의 아내.”
나는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나중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셔서 론드 경에게 좋은 작위를 하나 내려 주시면…….”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가 눈을 치떠 나를 쏘아보았다.
“내 주변에는 작위를 달라는 인간이 왜 이리 많은지!”
“…….”
‘네 여동생이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구시렁거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레이언 전하를 황녀 전하처럼 대했다가는 큰일이 날 게 뻔했다.
그리고 황족이 청탁받는 거야 진작 익숙해졌어야지.
“론드 경은 그간 건강이 회복되어 기사단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할 정도였어요. 론드 경의 건강 문제는 안심하셔도 될 듯해요.”
“네가 해 먹인 약으로 회복되었다고?”
그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물어서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가 왜 화를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약의 추출법은 로이만 실장님의 발명이었다.
“저는 배달, 배달만…….”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폐하가 다음 경연 문제를 내시기라도 하면 그때는 네가 책임져, 로아르.”
“카…… 이델.”
“뭐라고?”
“카이델……, 부인입니다. 그레이언 전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고, 그레이언 전하는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로카르드를 차지하니 어떻던가? 왜 너는 밀리오라처럼 정신을 잃을 듯 기뻐하지 않지?”
뭐 이따위 질문이 다 있담.
“로카르드가 나를 어찌 협박했는지 알아?”
“무슨 말씀이신지……. 충성스러운 카이델 공자가 전하께 그런 짓을 했다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너를 유혹하고 다닌 것 말이야. 사실 내 명령이었어.”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놈이 싫다지 뭐야. 명예롭지 못하다던가? 그러면 내가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더니, 조건을 걸더군. 건방진 사자 새끼 놈.”
나는 그레이언 전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카이델 공자를 싫어하는 습관을 멈추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알아 온 그 말고 더 나쁜 로카르드 카이델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언 전하에게도 화가 났다. 카이델 공자는 지금 자기를 위해 어딘가에서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는데, 뒤에서 험담이나 하다니.
“어째서 그런 말씀을 제게 하십니까, 황자 전하.”
그레이언 전하는 내 반문에 놀란 듯 나를 쏘아보다가 다시 검을 닦기 시작했다.
“네가 진실을 알면 어떤 얼굴을 하나 보려고. 그러니 로카르드가 없을 때 말해야 하지 않겠어?”
“…….”
“그놈이 내게 그랬어. 장차 제위에 올라 로리샤 로아르에게 작위를 주라. 그러면 내 한번 바람둥이가 되어 보겠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언 전하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비웃듯이 말했다.
“로카르드는 네가 혼자서도 손가락질당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너와의 결혼은 그에게도 계산 밖의 일이었단 얘기야. 재미있지? 천하의 로카르드도 삐끗한다는 사실이.”
“…….”
“아, 거기에는 네가 나의 황태자궁 시녀가 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으니 그 점을 잊지 말도록. 넌 내 거란 얘기야.”
나는 멍한 채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그런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하지만 굳이 작위를 줘야 할까? 장래 카이델 공작 부인이라면 어중간한 작위와 비교할 바 아닌데. 안 그런가?”
나는 그레이언 전하 앞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카이델 공자가 나를 유혹하는 연극을 하며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자기가 나를 돕고 있다는, 내가 결국 황궁으로 돌아올 거라던 말이.
작위라니.
그건 가정 교사보다 백배 나았다.
작위에 딸린 영지를 잘 경영하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정도고, 수입을 걱정하지 않고 소수 정예로 학생을 가르칠 수도 있었다. 내 신분의 비극이 내 대에서 끝나는 것은 물론이다.
너무 낫고 좋아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그 남자, 미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