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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경연의 결과 (136/155)


134화. 경연의 결과
2023.07.16.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짐작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황후 폐하가 그럴 만한 이유를 생각해 내기가 어려웠다.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알아요. 억지스러운 가설인 것. 하지만 류엘 그자는 분명, 자신이 이 상황의 관전자가 아니라 이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인 것처럼 행동했어요. 저는 그 점이 몹시 거슬립니다.”

나는 밤하늘로 한숨을 쉬어 보았다. 찬 공기에는 사람의 정신을 깨우고 환기하는 힘이 있었다.

류엘과 카이델 공자의 말을 머릿속으로 종합하며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류엘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 볼까 합니다. 그러면 이 일의 실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니까요.”

“…….”

카이델 공자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위험을 직감했다. 그는 지금 엄청난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류엘이 원하는 걸, 빼앗아요?”

“밀리오라 전하의 삶의 즐거움도 되찾아 드리고요.”

15. 경연의 결과

나는 카이델 공자를 두고 곧잘 미친놈이라고 부르던 그레이언 전하의 견해가 뛰어난 것이었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레이언 전하가 카이델 공자에게 상당히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과 별개로, 그레이언 전하도 카이델 공자 같은 사람을 버텨 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가 일으킨 이 사건을 보라.

황녀 전하의 가출 사건은 결국 신문에 실리고 말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의 도피 행각’은.

밀리오라 타가르 황녀는 수도 외곽 숲속 오두막에서 발각되었다. 그의 연인인 호위 기사와 함께, 옷을 좀 적게 입은 채로…….

그들을 추적한 황실 경비대는 그녀를 입히고 단장해서 데리고 나올 시녀를 기다리느라 오두막을 포위한 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신문 기사는 그녀의 옷가지 수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타르간지는 이 사건을 호위 기사와 사랑에 빠진 황녀의 비극적인 선택으로 한껏 포장했다. 얼마 전 카이델가의 추문에 떠들썩했던 제국은 이 극적인 사랑의 도피극에 열광했다.

신분의 한계에 부딪힌 연인들의 도망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인기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신문사에는 론드 아모에 경과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결혼을 기원하는 편지들이 자루로 쌓이고 있다고 했다.

이후 황녀 전하는 황궁으로 끌려와 자신의 방에 유폐되고, 론드 경은 지하 감옥에 있었다.

황후 폐하가 황녀 전하를 가만히 두실지, 또 론드 경의 목은 무사할 수 있을지, 나는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카이델 공자가 이 일을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실은 나도 주범에 가까운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앞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저 남자는, 이 일의 주범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자님은 걱정도 안 되세요!”

“사랑에는 시련이 따르는 법입니다. 우리를 봐요.”

사랑이라니, 우리 사이에 무슨 사랑이 있었냐고. 음모와 계략이라면 몰라도.

“하……. 저도 공자님처럼 신경 줄이 굵었으면 좋겠네요.”

“걱정 말아요. 당신 신경 줄은 내가 아는 여성 중 가장 굵고 튼튼해요.”

나는 확실히 그와 대화하면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화가 나면 불안이 잊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여상한 대답에 화를 꾹 누른 채 말했다.

“저는 황녀궁에 출입 금지당했어요. 에리아를 몰래 만나서 들었는데, 칼린이 기고만장해서 황녀궁이 제 것인 줄 안데요.”

“저런.”

저런? 겨우 ‘저런’?

“으으.”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는 그를 보니 내가 화를 내는 게 아무 의미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사실 지금 황녀 전하는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할지도 몰랐다. 론드 경과의 ‘사랑’을 확인했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을 위해서 제국 최고의 인재가 은밀히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카이델 공자의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류엘 님은요?”

“외부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자신이 데려가야 할 신부가 외간 남자와 달아났으니 당혹할 수밖에요.”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그레이언 전하에게 유리하게 풀릴 수 있는지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 류엘은 저에게 뭐든 내놓게 될 거예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때부터 카이델 공자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고, 그 결과 귀족원이 비공개로 소집되었다.

귀족원은 황녀 전하의 신병 처리 방향을 황제 폐하에게 공식적으로 질의했다. 국혼을 앞두고 있던 황가의 파란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였다.

그 일은 나와 카이델 공자가 귀족원에 상정되었을 때와 달리 우리 쪽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우리 두 사자님들은 물론이고, 황후파도 타가르를 끌어내리는 일에 참여하기를 꺼려 했다. 이 건은 황후 폐하가 황녀 전하를 얼마나 멸시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일로 손해를 입은 귀족이 없을뿐더러, 승전 이후 나날이 번영해 가는 제국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기대하던 대로 났다. 밀리오라 타가르가 밀리오라 아모에가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동화처럼 평화롭게 펼쳐지지는 못했다.

밀리오라 전하는 황적에서 제명당하고 남부 아모에 백작가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을 뿐, 황녀에게 있어야 할 성대한 결혼식도, 가두 행렬도 없었다.

두 사람은 새벽에 황궁을 나와 남부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배웅은 우리 둘뿐이었다.

이런 쓸쓸한 광경은 아마 그녀가 평생 꿈꿔 온 결혼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쯤 어때서. 그녀를 증오하는 모후나 벌레 취급하는 오라버니가 없는 곳에서, 오직 산처럼 든든한 남자의 사랑만 받으며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며 에리아를 붙잡고 훌쩍거렸다.

“에리아, 황녀 전하를 잘 모셔야 해? 남부에 도착하자마자 편지 보내고,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하고. 알았지?”

“그럼요, 카이델 부인. 꼭 연락드릴게요!”

“흐흑, 밀리오라 전하……!”

하지만 나는 울먹이며 마차 안을 보았다가 콧물을 씁 들이마시고 울음을 그쳤다.

황녀 전하는 론드 경의 겨드랑이 아래 양팔을 두른 채 그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행복한 새끼 고양이 같은 꼴이었다.

론드 경은 차마 쳐다보기도 싫었다.

마차를 꽉 채울 것 같은 덩치의 남자가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는, 제 품의 황녀 전하가 터질까 봐 손도 못 대겠다는 듯 팔을 어정쩡하게 든 채 웃고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내 눈을 닦아 냈다.

내 배신감에 찬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는지, 론드 경은 황녀 전하를 몹시 조심스럽게 떼어 놓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카이델 부인. 감사드리오.”

“벼, 별말씀을요…….”

아무튼 나는 이제 론드 경 걱정은 안 하기로 했다. 밀리오라 전하도.

론드 경은 카이델 공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델 공자도 기꺼이 그와 악수했다. 참 뒤늦은 화해였다.

“제가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자님.”

“잊었습니다. 론드 경.”

그 둘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론드 경, 뭐해, 나 허전해!”

황녀 전하가 투정을 부리자 론드 경은 후다닥 마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녀 전하가 마차 창으로 몸을 내밀었다.

“로리샤, 로카르드 공자. 나한테 해 준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함께 남부로 놀러 와. 꼭이야, 알았지?”

“흑……. 전하!”

나는 다시 울컥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나를 흘겨보며 몸을 마차 안으로 가져갔다.

“어머, 얘. 난 이제 아모에 부인이야!”

그녀가 까르르 웃는 소리는 막 출발하는 마차 바퀴 소리에 묻혀 멀어졌다.

“…….”

“…….”

갑작스럽게 찾아온 허탈함과 정적 속에,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공자님?”

“로리샤.”

“고마워요.”

카이델 공자는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감싸 황궁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잠자코 그를 따르다 문득 섭섭해져 물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배웅 나와 주실 줄 알았어요.”

“……아마 질투가 나셨나 봐요.”

묵묵히 걷다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예전이라면 그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레이언 전하도 황궁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모든 걸 뒤로하고 떠나는 밀리오라 전하를 부러워한 것은 아닌가 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장성한 형을 두고 대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의 처지도 겉모습만 다를 뿐 밀리오라 전하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째서 황궁에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나는 문득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밀리오라 전하의 행복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위에 붙은 매미 같기도 하고 엄마 닭의 품에 든 병아리 같기도 하던 황녀 전하의 모습이.

그녀는 처음으로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에 퐁당 빠져 있었다.

‘사랑은 그런 건가 봐…….’

“우리도 집으로 돌아갈까요?”

나는 카이델 공자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공자님. 내내 속을 졸였더니 피곤해요. 공자님도 힘드셨을 텐데 우리 좀 쉬어요.”

하지만 우리는 얼마 더 가지 못했다.

황궁 출구 복도에서 스마일란 사신의 통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황궁 안의 으슥한 모퉁이로 갔다. 그곳에서는 류엘이 우리를 웃으며 반겼다.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류엘 님?”

“황녀 전하는 잘 떠나셨소?”

그는 이제 연극을 끝내기로 한 모양인지 태연하게 제국어로 말했다.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러 왔소. 카이델 부인, 내 제안을 마지막으로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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