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그의 음모 (135/155)


133화. 그의 음모
2023.07.15.


나는 내 입을 때려 주고 싶었다. 이렇게 심각한 말이 곧장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그, 그러셨어요?”

“당연히 따라올 거래. 내가 죽을 때까지 내 곁을 지켜 주겠대. 내가 꺼지라고 해도 절대 안 갈 거래.”

“…….”

나는 숨이 막혔다. 숨도 막히고 기도 막히고 코도 막히고,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왜…… 요?”

“나는 외국에서 온 왕자비잖아. 그런데 호위 기사랑 바람나면 쪽팔리잖아. 스마일란인들이 론드 경의 손을 뒤로 묶어서 바다에 빠트리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

나는 잠시 황녀 전하의 사치스러운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방에는 절대 죽음이 찾아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지금 그녀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담담함과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대답이 없는 것이 갑갑한지, 황녀 전하가 나를 말갛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가벼운 잡담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말이다.

“노, 농담도…….”

“농담 아니야. 생각해 봤는데, 난 아무래도 론드 경과 바람이 날 것 같아. 나는 론드 경을 유혹하고 말 거야. 그러면 저 갑갑한 사람이 어쩌지도 못하고 넘어가겠지? 그러다 들킬 거고, 론드 경은 스마일란 왕자 손에 죽을 거고, 나는 유폐당하거나……. 그래서 론드 경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

황녀 전하의 남은 일생을 간략하게 요약한 줄거리를 들어 버리고서, 나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타가르가 느끼는 사랑이란 이런 식인 걸까.

“그러니까 론드 경이 뭐라고 해요? 따라오지 말라고 하니까요.”

“몰라. 막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얼굴이 시뻘게졌다가 울 것 같다가, 그러다가 네가 왔잖아.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 들었단 말이야.”

“죄송…….”

“네가 날 발견했다며? 의사가 그러더라. 조금만 더 늦게 발견되었으면 살아나지 못했을 거라고.”

“…….”

“사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했는데……. 일단은 고맙다고 할게. 원망은 남은 일생 동안 할 수 있으니까.”

감사인 듯도 하고 저주인 듯도 한 묘한 말이었다.

내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정작 당사자는 참으로 편안한 얼굴인데 말이다.

“왜 그러셨어요?”

나는 물었다. 너무 단도직입이고 거친 질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금 묻지 않으면 영원히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면 그녀가 또 그런 짓을 하는 걸 막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황녀 전하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내게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때 에리아가 수프를 들여 주었다.

나는 에리아에게 나와 교대할 시간을 알려 주고 돌려보낸 다음, 황녀 전하에게 수프와 약을 먹여 주었다. 입안의 살을 꽉 물고서.

나는 그녀가 잠들고 나서야 훌쩍거릴 수 있었다.

앞으로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니,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들은 중 가장 슬픈 말이었다.

* * *

사흘은 금방 지나갔다. 의사의 말대로 사흘째가 되자 황녀 전하의 뺨에는 혈색이 돌았고 피부는 부드러워졌다. 그 큰 사건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류엘이 사람을 보내 황녀 전하와 만나기 원했을 때, 나는 감기 핑계를 대고 돌려보내게끔 했다.

그녀를 신부로 데려갈 사신이 황궁에 있는 상황에서 자살 소동이 일었으니 모두 쉬쉬했지만, 그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밀리오라 전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활했다. 다만 말수는 확연히 줄었다.

전처럼 버럭 화를 내지도, 못된 말을 하지도 않아서 오히려 하녀들이 불편하게 여길 정도였다.

류엘은 황녀 전하의 ‘감기’ 소식에 과일 바구니를 보냈다. 그녀는 그걸 하녀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집에 가야지? 로카르드 공자가 나를 원망할 거야.”

“설마요, 전하. 공자님도 전하를 몹시 걱정하고 계세요.”

“됐어. 고생했으니까 좀 쉬고 또 날 보러 와줘.”

“……네. 전하.”

나는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집을 계속 비우는 건 공작님에게도 면이 서지 않았다.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황녀궁을 나와 황녀 전하가 내어준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올라 보니 그 안에는 카이델 공자가 먼저 타고 있었다.

“어머, 깜짝이야!”

“그새 남편 얼굴 잊었습니까?”

그는 내가 놀라자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어쩐지 말싸움을 하기 싫어 헤쭉 웃었다.

사실 그를 이렇게 갑작스레 만난 것이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빈 마차인 줄 알아서 놀랐던 것뿐이에요.”

그의 맞은편에 앉아야 할지 옆에 앉아야 할지 순간 눈치를 보는데 그가 나를 째려보았다.

내가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앉자, 그제야 그가 얼굴을 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앉자마자 엉덩이를 들어 마차 좌석 끝까지 비켜 앉았다.

그러더니 내 팔을 쓱 잡아당겨 상체를 넘어뜨려서 내가 자기 허벅지를 베고 눕게 했다.

“병간호가 보통 쉬운 게 아니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쉬어요.”

인간아, 남자 허벅지를 베고 어떻게 편할 수 있냐고!

게다가 그의 허벅지는 베기에 불편할 만큼 단단했다. 참 볼 때와 만질 때가 다른 남자였다.

나는 느낌도 이상하고 상황도 이상해서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렸다.

“공자님…….”

내가 힘들어하는 게 티가 났는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편한 대로 해요.”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다시 배시시 웃었다.

“배려는 감사해요. 남자 허벅지도 다 베 보고,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카이델 공자는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고, 나도 내가 그따위 말을 뱉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피했다.

잠시 후 그는 풉 하고 웃었다.

“하아…….”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의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한숨을 쉬어야 했다.

“밀리오라 전하는 어떠십니까?”

“멀쩡하세요. 겉으로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네. 정말 속상해요.”

허벅지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의 한마디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밀리오라 전하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있는지, 그가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공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처음으로 느꼈다.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내 손을 잡더니 정원으로 이끌었다.

“바람을 좀 쐬고 들어가요.”

“네. 공자님.”

나는 얌전히 대답하면서도 찬바람에 살짝 오싹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는 그걸 언제 봤는지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공자님은 안 추우세요?”

“저는 툰바르에서 모포 하나로 버틴 사람입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가 그냥 다물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부분에서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엄혹한 툰바르 산맥에서 모포 하나로 버텼다는 건, 그가 초인이거나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미남 주제에 초인적이기까지하면 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모른 체하며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나를 정원 테이블로 데려갔다. 하인이 우리가 돌아온 걸 발견하고 달려오자 그는 손을 저어 돌려보냈다.

캄캄한 정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와 차가운 바람이 그동안 쌓인 피로를 씻겨 주는 듯했다.

그는 저택 안으로 돌아가는 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녀 전하가 그런 일을 하신 이유는 들었습니까?”

그 순간, 울 생각도 없었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카이델 공자가 흠칫 놀라기에 나는 일부러 활짝 웃었다.

“방금 그걸 듣고 왔거든요.”

나는 그에게 밀리오라 전하와 론드 경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아마도 삶의 희망을 잃었던 것 같다고도.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공자님, 저는 스마일란에 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황녀 전하를 정말 도와드리고 싶어요.”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는 살짝 협박으로 들릴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무서워서 눈을 내리깔았다.

카이델 공자는 나를 겁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 며칠간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로리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저 카이델 공자를 며칠씩이나 고민하게 할 만한 문제가 세상에 어디 흔하던가.

“저도 황녀 전하를 도와야겠어요.”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요. 이건 국혼이에요.”

“아직 공표 전입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긴장한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중매쟁이가 되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공자님?”

“당신이 병간호에 매진하는 동안 저는 류엘이 한 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류엘 님이 뭐라고 했기에요?”

“그는 오를 황제의 치세에서 황녀 전하를 통한 결혼 동맹이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국혼을 반드시 진행하려 합니다.”

“대놓고 그렇게 말해요? 괘씸한 놈!”

카이델 공자는 내가 류엘을 비난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거기에 황후 폐하의 말을 더하면……. 이 결혼은 황녀 전하를 스마일란 왕자비로 맞기 위함이 아니라 황후 폐하가 스마일란을 방문하게 할 구실을 만드는 게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