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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황녀의 진심 (134/155)


132화. 황녀의 진심
2023.07.14.


나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돌아가서 함구해. 에리아는 가서 론드 경을 모셔와. 다들, 오늘은 평소와 똑같은 거야. 알았어?”

하녀들은 겁먹은 얼굴로 끄덕이고 흩어졌다. 에리아는 론드 경을 데리러 달려갔다.

쿵쿵쿵, 잠시 후 론드 경이 달려오는 소리는 내 귀에 그렇게 들렸다.

“카이델 부인!”

“경!”

내가 문을 가리키자, 그는 바로 문으로 직행해 발길질을 날렸다. 쾅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악!”

나는 에리아의 비명 속에 침대로 달려갔다. 우리는 침대 속 황녀 전하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든 것이 아니었다.

“에리아! 가서 의사를 데려와, 어서!”

“네!”

에리아가 달려 나가고, 나는 황녀 전하를 살폈다. 호흡은 붙어 있었지만 희미하고, 피부는 이미 서늘했다.

“흡…….”

내가 울음을 참으려 이를 악물자 론드 경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속에서 황녀 전하를 흔들었다.

“밀리오라 전하! 정신 차리세요! 제발요, 전하!”

의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왔다. 그들은 타가르를 위한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고, 늦기 전에 그것을 황녀 전하에게 먹였다.

의사들이 주변을 물리고 황녀 전하를 치료하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침실 앞 복도에서 기다렸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올걸, 카이델 공자님이야 알아서 잘할 텐데, 곧장 이리로 달려올걸!’

‘어제 나를 붙잡으실 때 그냥 얌전히 예, 하고 말동무나 해 드렸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밀리오라 전하가 독약을 먹고 생명을 잃어 가는 동안 나는 카이델 공자와 행복하게 식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그리고 막막했다. 황녀 전하의 절망을 어쩌면 그 정도까지 몰랐을까.

무딘 내가 미웠고, 내 곁에서 숨을 몰아쉬며 평정을 잃은 론드 경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

“황녀 전하를 지켰어야 하는데. 모두 내 탓이요!”

론드 경의 중얼거림은 죽음만큼 음산했다. 황녀 전하가 저지른 일은 그녀 자신뿐 아니라 론드 경도 파괴하고 있었다.

에리아가 울며 말했다.

“흐흑, 더 견디지 못하셨던 거예요.”

나와 론드 경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늦게 황후궁에 다녀오셨거든요. 그때 머리가 다 헝클어지셔선……. 황후 폐하께서는 나는 반드시 스마일란에 갈 거라고 소리치시고……. 워낙 조용한 밤중이라 얼핏 들렸거든요.”

론드 경과 나는 동시에 각자의 욕을 뱉었다. 그러자 에리아가 눈을 어디 둘지 몰라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상황을 이해했다.

황녀 전하는 이 결혼을 거절하려 황후 폐하를 찾아갔다가 또 폭언을 들은 것이다.

사람이 살아갈 희망을 빼앗는 건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엄마이면서 어떻게!’

나는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겨우 중얼거렸다.

“에리아, 이 일이 스마일란 사신에게 새어 나가면 안 돼. 밀리오라 전하는 심한 감기에 걸리신 거야.”

“네. 네. 그럼요. 심한 감기요!”

그때 의사들이 나왔다. 그들은 나를 흘끔 보고는 에리아에게 물었다. 내게 시종의 메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시녀님은 어디 계시오?”

“여기 카이델 부인이 계시잖아요!”

에리아가 돌연 신경질을 내자 의사가 감히, 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론드 경이 의식적으로 가슴을 펴며 의사를 노려보았다.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그 느긋한 론드 경에게 저런 괴물 같은 표정이 있었나 놀라 멍해질 정도였다.

의사는 겁을 먹고 론드 경의 눈치를 보며 내게 말했다.

“안에 둔 약을 네 시간마다 드시게 하십시오. 만약 열이 오르면 즉시 의료원에 사람을 보내시고요.”

“황녀 전하는…….”

“사흘 정도만 약을 규칙적으로 드시며 요양하면 운신이 가능하실 겁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발견하여 회복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돼요.”

“걱정 마십시오. 황후궁에서 벌써 단단히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바로 황녀 전하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밀리오라 전하는 아까보다는 혈색이 돌아 덜 무서워 보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그녀가 겨우 눈꺼풀을 열었다.

“론드 경…….”

그녀가 가장 처음 부른 사람은 론드 경이었다. 론드 경은 눈물을 참느라 그러는지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나는 순간 자제력을 잃고 소리쳤다.

“론드 경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세요? 저는 기절할 뻔했다고요! 에리아는 어떻고요! 저희가 전하 때문에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에리아는 내가 하는 짓을 보고 하얗게 질려 눈만 굴렸다. 심지어 론드 경도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밀리오라 전하는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로리샤. 놀라게 해서.”

“……!”

꼭 이럴 때 순순히 사과하냐고!

이번에는 내가 울음을 터트렸다. 말을 하는데 울음이 섞여 소리가 꺽꺽거리며 났다.

“됐어요. 아시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전하, 배 안 고프세요? 배고프실 텐데, 마실 것 좀 드려요?”

그러자 황녀 전하가 아주 약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소리친 게 민망해서 뭐라도 해야 했다.

“에리아, 전하가 좋아하시는 진한 양송이수프를 들여 줄래?”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하.”

에리아는 달려 나갔고, 론드 경은 황녀 전하의 시선 속에 얼굴을 굳혔다.

그는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생각이 안 나. 미안해요, 경.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니까 경의 얼굴이 떠올라서……. 경을 너무 부르고 싶었는데, 소리가 안 나와서……. 미안.”

나는 쌍욕을 중얼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밀리오라 전하와 론드 경을 둘이 있게 해 주어야 했다.

호위 기사와 황녀를 침실에 단둘이 있게 하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삶이 끝나는 순간에 보고 싶었던 사람이 그였다는데 왜 그러면 안 되느냔 말이다.

그리고 나도 욕을 좀 마음껏 하고 싶어서 그 방에서 나와야 했다.

나는 하녀들이 모두 돌아간 응접실로 가서 마음껏 욕지거리를 했다.

이건 그냥 세상이 틀린 거였다. 엄마는 딸을 저렇게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거란 말이다.

그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카이델 공자가 들어왔다.

“……흑!”

나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 그를 안았다. 그는 그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미 이유를 아는 것이었다.

그는 내 울음이 조금 잦아들자 물었다.

“밀리오라 전하는 어떠십니까?”

“깨어나셨어요. 사흘 정도만 쉬면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실 거래요. ……소문이 다 난 거죠?”

“황후 폐하께서 입단속을 엄히 시키셨어요. 하지만 의료원이 움직이면 소문이 날 수밖에 없어요. 다들 모르는 척하는 것뿐.”

나는 뒤늦게 밀려오는 분노에 발을 쾅쾅 구르며 소리쳤다.

“어떻게 그래요, 사람이! 저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고요. 공자님.”

카이델 공자는 내 양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말해 봐요.”

나는 혹시라도 말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 그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밀리오라 전하가 어젯밤 황후 폐하를 찾아가셨대요. 스마일란으로 시집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나는 반드시 스마일란에 가겠다’고 하셨대요. ‘너를 반드시 스마일란에 시집보내겠다’가 아니라…….”

“…….”

카이델 공자도 나와 같은 의구심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 황녀 전하는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그게……. 론드 경과…….”

“로리샤?”

“전하께서 아마도 론드 경을……. 하아.”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카이델 공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나는 항의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론드 경이었대요. 론드 경이 구해 주기를 바랐대요. 사람 마음은 솔직한 거라고요!”

내 말뜻을 알아들은 카이델 공자는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이번에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류엘 님과의 대화는 무사히 끝내셨어요?”

그는 ‘잘’이 아니라 ‘무사히’라고 말하는 것이 거슬리는 얼굴이었고, 나는 괜히 찔려서 더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보아하니 당분간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긴 힘들겠군요, 그렇죠?”

“네.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론드 경 외에는 저와 에리아뿐이니까, 우리 둘이서 교대하며 전하를 돌봐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황녀 전하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당신의 건강을 해쳐서도 안 돼요. 로리샤.”

이런 상황에서 내 건강이 무슨 쓸모가 있겠냐만, 카이델 공자가 그렇게 말하자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짐짓 정색하고 대답했다. 심각한 얼굴을 하니까 간지러운 소리도 그럭저럭 잘할 수 있었다.

“네. 공자님도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 마시고요. 건강 해치잖아요.”

그는 설핏 웃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공자님.”

나는 카이델 공자를 돌려보내고 밀리오라 전하의 침실로 돌아갔다.

내가 들어가자 론드 경은 얼굴을 숨기고 나가 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그가 울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반면에 황녀 전하는 짙은 병색 가운데도 너무나 편안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심지어 아주 조금 즐거워 보이기도 해서, 나는 내 눈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하, 론드 경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응. 별일 아니었어.”

나는 조금 마음을 놓으며 물었다.

가벼운 잡담을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에이, 별일 뭔데요? 왜 알아서 달려오지 않았어, 하고 론드 경을 야단치신 건 아니고요?”

“아니. 스마일란까지 날 따라와 줄 건지 물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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