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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태어나 처음 낸 용기 (133/155)


131화. 태어나 처음 낸 용기
2023.07.13.


류엘의 침묵 속에, 로카르드는 말했다.

[오를 전하는 제국 주변 왕국들에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겁니다. 대화하기 전에 먼저 힘을 과시하실 겁니다. 스마일란의 무역도 필시 악영향을 받을 겁니다.]

[…….]

[스마일란 왕께서는 정녕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럼에도 당신은 나를 돕기는커녕 도발하고 있군요.]

그에 대꾸하는 류엘의 목소리는 낮을 대로 낮아져 더 거칠게 들렸다.

[오를 황제 치하에서 공자가 해야 할 걱정은 겨우 이혼 정도가 아닐 겁니다. 카이델 부인까지 그 틈바구니에 말려들 필요가 없지 않소. 그녀를 내게 보내요. 새 이름과 새 신분으로, 그레이언 황자보다는 내가 훨씬 귀하게 쓸 터이니.]

로카르드는 입꼬리를 삐뚤게 끌어올렸다.

[닥치시죠.]

류엘은 뜻밖의 대꾸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로카르드는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통보였다.

[저와 제 아내는 함께 그레이언 전하를 황제로 만들 겁니다. 나중에 바다 건너에서 안타까워하는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워하겠습니다. 류엘 님.]

* * *

깊은 밤. 밀리오라는 뒤척이며 로리샤를 원망했다.

‘하룻밤 더 자고 가면 어때서!’

그리고 류엘의 걸걸한 목소리를 떠올리다가, 자꾸만 양장점 사건으로 생각이 넘어갔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자기 시녀가 모욕을 당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을 터였다. 싸움을 엿듣기만 하다가, 혹시라도 제 시녀가 망신을 당하고 오면 나를 망신시켰다고 더 가혹한 벌을 내렸을 것이다.

이겼어도 분란을 일으켰다고 벌을 내렸을 것이고.

하지만 그날 칼린이 로리샤를 대하는 꼴을 보자 전과 달리 화가 났다. 그녀에 대한 모욕에 대해 화가 난 것은 당연하고, 로리샤가 당하는 취급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법 말고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칼린은 이미 황실 시녀를 모욕함으로서 황족을 우습게 보고 있었으니 일개 황녀의 권위 같은 것은 가볍게 짓뭉갤 듯했다.

그래서 밀리오라는 생각나는 대로 움직였다. 시녀장이 그 드센 유력가 영애들을 다루는 방법을 평생 보고 자란 탓이었다.

뺨을 때린 손바닥은 홧홧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황녀궁에서는 하녀들을 처벌하고 나면 그 순간에는 시원해도 며칠간 기분이 점점 더 나빠지곤 했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달랐다.

‘아까 절 감싸 주셔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전하는 원래부터 용감한 분이신걸요.’

밀리오라는 그녀의 하찮은 로리샤가 그녀를 몰래 자랑스럽게 바라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깨달았다. 남을 위해 무엇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용기를 내는 그 순간에는 아플지 몰라도 그 기억으로 오랫동안 기분이 좋다는 것도.

애정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아주는 누군가의 시선은 그녀에게 그토록 소중했다. 그런데 스마일란으로 가면 로리샤도, 론드도 영영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딸로서 자신이 정략결혼을 할 것을 평생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을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알게 된 다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언어조차 다른 먼 땅에서, 다시 오롯이 혼자.

생각만 해도 이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미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밀리오라는 뒤척이고 또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해 보았다.

“밀리오라, 지금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너의 용기는 다시는 꺼내 쓸 일이 없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에리아만 동반하여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황후는 책을 보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그녀가 밀리오라의 방문을 허락한 것은 어이가 없어서였다.

미운 짓도 정도가 있지 이 야심한 밤에 찾아오다니, 저것이 정신을 놓기라도 했나 확인하려 허락했다.

밀리오라는 황후의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맨바닥에 엎드렸다.

“황후 폐하!”

“…….”

“저는 스마일란 사신과 왕자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황후는 제가 할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밀리오라를 다시 한번 한심하게 여겼다. 그나마 이제 황녀가 처음으로 쓸모를 갖게 생겼으니 화는 내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라. 나는 자야겠구나.”

“싫어요!”

황후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기가 차서, 저것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고 했다.

“스마일란 왕자는 사냥을 즐기고 술을 즐기며, 아내가 자신을 잘 모시고 자녀를 많이 낳으면 평생 아끼고 예뻐할 거라고 합니다.”

밀리오라의 목소리는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저는 남자가 짐승 가죽을 벗기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하게 여겨져 잠이 안 오고, 목소리가 큰 남자가 술에 취해 더 크게 말할 것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아득해져요.”

“……하.”

“아이를 많이 낳아 주면 예뻐해 준다고 하지만, 저는 제 남편이 아이를 낳아 주고 남편을 잘 모셔서가 아니라, 제가 예뻐서 예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실은 아이를 낳는 것도 무서워요!”

“이만 물러가라.”

“저는 말로만 들어도 그가 무섭고 싫어요. 제 고향인 제국이 바다 건너에 있어 걸어서 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플 거예요. 황후 폐하, 꼭 제가 결혼하여 동맹을 맺지 않아도 제국은 스마일란 정도는…….”

“닥치렴.”

황후는 더 참지 못했다.

그녀 목소리의 그 단호함은 초를 하나 켠 방 안을 꽉 채우고, 밀리오라의 심장을 짓이길 만큼 딱딱했다.

밀리오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헐떡거렸다. 엎드린 팔에 자꾸만 힘이 빠지려 해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

“금방 좋은 책을 보아 편안해진 내 심기를 흐려 놓지 말고 돌아가라. 너 때문에 악몽을 꿀 것 같구나.”

“황후 폐하!”

태어나 처음 하는 반항이었다. 밀리오라는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저는 스마일란으로 시집가지 않을래요! 폐하께도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어요.”

황후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밀리오라는 엎드린 채 모후의 맨발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밀리오라 앞에 무릎을 꿇더니, 밀리오라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반질거리는 바닥에 짓눌렀다.

“끄흑!”

“내가 이 손을 마구 휘저으면 어찌 되겠니, 밀리오라?”

황후의 팔에는 점차 더 힘이 들어갔다. 밀리오라는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어 버텼다. 황후의 팔도 덜덜 떨렸다.

황후가 그대로 머리채를 휘젓는다면 밀리오라의 이마에는 커다란 흉이 질 것이 분명했다.

“황후 폐하, 제발……!”

“네게 써먹을 것이 그 얼굴 말고 무어가 있어? 그런데 그 얼굴마저 망가지면, 쓸모없는 너를 어디로 치워 놓을까 그도 걱정이구나. 너는 그저 내 근심 덩어리야.”

“아파, 아파요!”

“너는 스마일란으로 가야 해. 내가 직접 그곳까지 너를 바래다주마. 다시 말하겠다. 나는 반드시 스마일란에 갈 거야, 밀리오라. 네가 딴소리를 하겠다면 지금 네 얼굴을 망가뜨려 주마. 스마일란 아니라 어디로도 못 가게! 알겠니?”

“흐윽!”

밀리오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흘러내려 이마의 마찰을 조금 줄여 주었다.

“알아들었니?”

“네! 네, 황후 폐하!”

황후는 밀리오라의 머리를 거칠게 놓고 말했다.

“가 버려.”

밀리오라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가 나가기도 전에 황후의 방 안 촛불이 꺼져, 그녀는 어둠 속에서 복도로 나왔다. 눈물 섞인 거친 숨소리가 빈 복도에 흘렀다.

밀리오라는 자신의 침소로 돌아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황가에서 떠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자식을 낳으러 팔려 가는 화물이 아니라, 지금보다는 타가르의 은발을 귀하게 여겨 주는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말이다.

하지만 오늘 밤 밀리오라는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확인했다.

황후가 저 정도로 완강하면 황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타가르의 누구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결혼이었다.

밀리오라는 약을 마셨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황족은 모두 자신만의 장소에 극약을 숨겨 두고 있었다. 만약의 상황에서 타가르로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함이었다.

* * *

나는 몇 번이나 2황자궁 쪽을 흘끔거리며 걸었다. 카이델 공자가 류엘에게 막말이라도 하지 않을지 불안한 나머지 누가 내 뒤통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생판 처음 만난 외국인의 말에 휘둘려 밤새 괴로워하며 고민에 빠졌던 나 자신이 어찌나 한심한지.

그리고 시원하기도 했다.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우리, 도망치지 말아요. 로리샤.’

나는 어째서 그 말이 그토록 좋았을까.

곁에 용감한 사람이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로카르드 카이델이 새끼 사자라 불리는 것은 그가 자기 몫의 시련에서 도망친 적이 없기 때문 아닐까.

내가 용기 있다고 지금보다 뭐가 더 생길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나를 대견하게 느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마음의 빚 없이 가뿐한, 용기 있는 로리샤.

‘듣기도 나쁘지 않잖아.’

나는 오랜만에 씩씩해진 상태로 황녀 전하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실에 아무도 없었다.

순간 정수리부터 끼쳐 오르는 소름.

나는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진정하려 했지만 내 심장은 멋대로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밀리오라 전하의 침실로 달려가니 문 앞에 에리아와 하녀들이 모여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에리아?”

“카이델 부인! 이상해요. 황녀 전하가 일어나지 않으세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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