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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왜 나를 택했어요? (132/155)


130화. 왜 나를 택했어요?
2023.07.12.


나는 거의 밤새워 설치다가 날이 밝자마자 일어났다.

내가 잔 카이델 공자의 소파를 멍하니 정리하는데 올가 부인이 ‘역시’ 하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녀는 잔뜩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우리 부부의 합방인 건지.

“작은 마님,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네? 네?”

‘있었죠. 제국이 또 전쟁을 일으킬 뻔했으니 일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어요. 올가 부인.’

하지만 나는 카이델 공자가 그러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올가 부인.”

그러자 올가 부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역시 그녀도 이런 종류의 웃음에 대해 아는 거다.

“작은 마님…….”

“제가 잠버릇이 고약해서, 아무튼 하루만 공자님이 편한 데서 주무시라고 여기서 잤어요. 오늘은 안 그럴 테니 걱정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자마자 울고 싶었다.

‘과연 오늘 밤은 안전할까?’

나는 어젯밤 그의 날것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도 내심에서는 그런 걸 원하는 것이다.

나는 두렵게 물었다.

“공자님은요?”

“어젯밤 연무장에 나가셔서 새벽까지 검을 휘두르시다가 날이 밝기도 전에 입궁하셨어요.”

“아……. 네.”

‘미안해요, 공자님!’

나는 정말 울고 싶은 심경이었지만 올가 부인 앞에서는 참아야 했다.

“저도 곧 입궁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올가 부인.”

* * *

“드디어 새벽에 일어났습니까?”

2황자궁의 별실에서, 카이델 공자가 내게 한 첫마디였다.

나는 입궁하자마자 그를 찾아갔는데,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상쾌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 무서운 웃음 말고, 그를 잘생겨 보이게 하는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그의 약속대로 오늘은 멀쩡한 로카르드 카이델인 거다.

나는 긴장이 탁 풀려 말했다.

“네. 쉽던데요? 안 자면 되더라고요.”

“저런. 숙면은 중요해요. 어떤 경우에도 필요한 만큼 자야만 싸울 체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싸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하는 소리니 닥치고 들어야 했다. 그러는 공자님은 왜 어제 밤을 새우셨나요, 따위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얌전히 대답했다.

“네. 공자님. 주의할게요.”

그때 문이 열리며 하인이 식사 트레이를 가져왔다. 나는 우리 앞에 차려지는 조찬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부가 아침을 함께 들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러네요…….”

공복으로 긴장하여 여기까지 온 탓에,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눈치를 보며 식사를 시작했고, 내 앞에 앉은 남자의 연기는 완벽했다.

지금 이 남자가 로카르드 카이델일까, 아니면 어젯밤 내가 덮쳤던 그 남자가 로카르드 카이델일까?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젯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침울해져서 고개를 떨군 채 식사를 계속했다.

카이델 공자가 물었다.

“오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 황녀 전하의 일정은 비어 있어요. 어제 저를 붙잡으셨는데 제가 억지로 출궁해서, 좀 달래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흠.”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일정에 없이 스마일란 사신이 방문하면 시녀에게 접대하게 하시라고 황녀 전하께…….”

“그러지 말아요.”

나이프질을 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퍽 고요한 눈빛이었다.

“로리샤.”

“네?”

“왜 나를 택했어요?”

“…….”

“류엘 대신.”

류엘 대신이라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심 소스라쳤다. 하지만 ‘그게 그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다음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공자님이 협박하셨잖아요.”

“로리샤.”

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나도 그래야만 했다.

“공자님께 빚을 너무 많이 졌어요.”

“…….”

나는 고개를 저은 다음 다시 고쳐 말했다.

“비겁한 사람이 되기 싫었어요. ……공자님이 저를 미워하는 것도 싫었고요. 그러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아서요.”

그는 우아하게 놀리던 커트러리를 내려놓은 다음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빛이 나는 얼굴이었다.

“우리, 도망치지 말아요. 로리샤.”

도망. 나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문득 그에게 이 상황은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삶에서 우선시하는 가치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가끔 삶이 단순해지는 듯 느껴졌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끄덕였다.

“네. 공자님.”

식사를 마쳐 갈 때쯤, 나는 낯설 정도로 마음 편하게 식사했음을 깨달았다.

낯선 장소와 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런 것들이 내게 처음 경험하는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왜요?”

내 시선에 그가 미소로 물었다. 그래서 나도 미소 지었다.

“그냥요.”

나는 마지막 포크를 입에 떠 넣은 다음 물었다.

“저한테 화가 나셨죠?”

“…….”

“제가 낯선 사람의 말에 바보같이 휘둘렸어요. 죄송해요. 공자님.”

“사과 받아들이죠.”

“와, 주스가 맛있어요.”

“나도 좋아해요.”

“황녀 전하의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부터는 최선을 다해서 공자님을 도울게요. 저, 장부 파악도 다 했어요.”

그는 이번에는 웃기만 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나를 황녀궁으로 배웅해 주었다. 꼭 다정한 남편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공자님.”

“좀 참아 봐요. 그레이언 전하 염장 좀 지르게.”

“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어느새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나는 그가 보는 방향을 돌아보았다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류엘이 통역사와 함께 이리 오고 있었다. 류엘은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류엘 님께서 카이델 부인께 반가움을 표시하셨습니다.”

통역사의 말을 듣자 속이 화르르 끓어올랐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한 연극을 하는지!

나도 ‘카이델 부인도 류엘 님께 가식적인 반가움을 표하십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일부러 가식적으로 웃었다.

“제 남편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십니다. 공자님, 스마일란 사신 류엘 님이세요. 스마일란 왕자님과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결혼을 교섭 중이세요.”

카이델 공자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그에게 스마일란식 인사를 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류엘 님.”

류엘은 통역을 기다렸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류엘 님 또한 제국의 새끼 사자의 명성을 바다 건너에서도 들으셨다고 합니다. 두 분을 아침 산책 중에 우연히 만나 기쁘다고 하십니다.”

“이토록 반가운 우연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카이델 공자는 몹시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뼈를 아는 나는 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산책 중이라 하시니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 아내는 황녀 전하를 뵈러 가던 중이었답니다.”

나는 카이델 공자를 말리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부디 내 남편이 아무 사고도 치지 않기를!’

카이델 공자가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 그럼 있다가 다시 만나요.”

“네. 공자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달콤한 말투로 ‘그럼 있다가 다시 만나요, 공자님.’ 같은 말은 못 할 거다.

나는 그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황녀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통역이 굳이 필요하십니까?]

로카르드는 멀어지는 로리샤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채 냉랭하게 말했다.

류엘은 특유의 낮고 거친 목소리로 웃으며 통역사를 뒤로 물렸다. 그는 멀찍이서 두 사람을 뒤따랐다.

두 사람은 인적 없는 정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얼핏 보면 산책하는 두 친구 같은 모습이었다.

“부인이 아직 말씀하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듣는 귀를 하나라도 줄이려면 스마일란어로 대화하시죠.”

류엘의 유창한 제국어에 로카르드는 코웃음을 쳤다.

[어젯밤 로리샤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은 건 저입니다. 제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그녀는 류엘 님의 제국어 실력에 대해서도 말했을 겁니다.]

[신혼이라. 부럽군요.]

류엘은 정원 한쪽에 핀 커다란 장미 꽃봉오리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해 봐요. 제국의 새끼 사자의 위협이란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고 싶으니. 나는 그녀가 내 제안에 대해 당신에게 고백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류엘은 로카르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본 다음 말했다.

[나는 사내 얼굴에 빠지는 여자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만.]

로카르드는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제 매력이 얼굴만이 아니라서요.]

이번에는 류엘이 코웃음을 쳤다.

[제 아내를 통해 저에게 오를 전하의 승리 예측을 전했을 때는 의도가 있으셨을 테죠.]

[카이델 공자, 내 의도는 다 전했습니다. 나는 스마일란으로 두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국의 복잡한 이혼 절차를 생각하면, 당신에게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입니다.]

[제국의 이혼 절차는 잘 아시면서, 남의 아내를 두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르십니까?]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서로를 보는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혀 불꽃을 내는 듯했다.

류엘은 입꼬리를 삐뚤게 끌어올려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공자의 책임이요. 공해의 해적 말입니다.]

그러자 로카르드의 눈매가 가늘게 내려앉았다.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게는 배를 타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자와 남의 아내를 넘보는 자가 똑같이 해적으로 보입니다만. 그리고 저는 해적을 치는 방법을 잘 압니다.]

류엘은 목구멍에서 긁듯이 짜증에 찬 소리를 냈다.

[여자 이야기에서 좀 벗어날 수 없소? 지금 공자가 어떤 처지인지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그래서 결혼 동맹을 추진하시는 겁니까? 오를 전하가 제위에 오르신 후 정세 변화에 대한 보험으로 말입니다.]

[밀리오라 황녀가 그리 믿을 만한 보험이 아님은 피차 아는 바가 아닙니까.]

로카르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류엘을 바라보았다.

오를은 밀리오라를 제 피붙이로 여기지도 않을 만큼 지극히 멸시한다. 결혼 동맹의 상대로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류엘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류엘 님은 무슨 근거로 오를 전하의 승리를 자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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