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내 날개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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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내 날개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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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내 날개는 어디에
2023.07.11.
나는 눈만 돌린 채 겨우 말했다.
“부, 불편해요. 공자님. 이상하다고요.”
“나는 네가 이상한데.”
“왜……. 와……. 반말……. 사람 무시하시고.”
“아닌데. 무시.”
그는 아직 습한 내 뺨을 손끝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해 보고 싶었던 것 하는 거야.”
어쩐지 목구멍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겨우 조그맣게 말했다.
“반말해도 되니까 내려와요. 무거워요. 이상하다고요.”
“흠. 좋아서. 못 내려와.”
“…….”
“심장이 빨리 뛰네. 나처럼.”
“미쳤나 봐.”
카이델 공자는 아주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의 검은 앞머리가 흘러내려 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이 지금 저기서 여상한 빛을 뿜고 있을 것을 알았다.
“공자님.”
“로리샤.”
“공자님은 저한테 뭘 원해요?”
“사실대로?”
“네.”
“다.”
“…….”
침묵 속에서, 나는 그가 내 눈물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지금도 내게 친절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버거워?”
“……네.”
“줄 게 없어서?”
“…….”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는 스치듯 중얼거렸다.
“나에게만 어찌나 잔인한지…….”
그는 그대로 내 입술을 짓눌렀다. 아니, 짓누르는 듯하더니 열고, 따뜻하게 들어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가 들어와 나를 두드리게 내버려 두고, 받아들였다. 곧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오래 견딜 필요도 없었다.
까마득하게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때에, 그는 마침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거친 숨결에 실려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럼 이건, 뭐라고 설명할 거지? 이건 너만 줄 수 있는데.”
“……게, 게을러서 그래요, 공자님이. 세상에 널린 게 여잔데.”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화가 나. 네가 싫어할 내가 되고 싶어져.”
이상했다.
그도 이상했지만 나도 이상했다. 여전히 내 몸을 짓누르는 그의 무게감은 그의 키스가 남긴 여운을 타고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누워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나는 내가 모르는 상태로 떠밀려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벽을 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는 힘없이 내 옆자리로 나가떨어졌다.
“제기랄.”
그의 낮은 욕지거리는 나를 한없이 쪼그라들게 했다.
‘사람 미안하게 만들고.’
나는 더 이상 참기를 포기하고 말했다. 자포자기인지 분노인지 나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 그냥 지금 도망가면 안 돼요? 이혼할 때까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사실은 공자님도 힘드시잖아요.”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걱정 마. 내일은 또 멀쩡한 척할 테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예법으로 너를 대할게. 그러니까 오늘 밤은 모르는 척해.”
“왜…….”
“네가 울었잖아. 내 앞에서.”
나는 말하고 싶었다.
‘저, 밀리오라 전하 따라서 스마일란으로 갈까 봐요.’
미친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화를 내는지, 안도하는지.
하지만 내가 울었다고 이렇게 무섭고 이상하게 군다면, 내가 떠난다고 하면…….
그런데 그가 말했다.
“도망가. 괜찮아. 그런데 그랬다간 네가 윽박질렀던 그놈들 손에 붙잡혀 내 앞에 끌려올 텐데, 괜찮겠어, 부인?”
“…….”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바다를 건너면 자기가 어쩔 거…….
“어디 바다를 건너 봐.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었나? 내가 좀 집착이 있다고. 훗. 설마 내가 그 편지 때 정도로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로리샤.”
아닌 척했지만, 나는 그 편지로 추궁당할 때도 충분히 지긋지긋했다.
“……협박하는 거예요?”
“로리샤. 협박은 할 듯 말 듯한 짓으로 겁을 주는 거야. 하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 협박이 아니지. 설명?”
그는 그러고서 해맑게 웃었다. 오늘 밤 그의 해맑음은 어둡고 거칠었다. 억지스러운 연기 같았다.
아마도 나 때문에, 그는 이 밤에도 무언가를 참고 갈등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눈물에 책임감을 느껴 그러는지도 몰랐다.
‘이러면 내가 너무 나쁜 년이 되잖아.’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스마일란 왕을 위해 당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뭐든. 거기서부터 당신의 자유가 시작되는 겁니다.]
나는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 백작님은 나를 황궁에 들여보내면서 꼭 그렇게 말했다.
가서 살아남아 날개를 달라고. 그리고 어디로든 날아가라고.
그런데 나는 내 날개를 다는 대신 카이델 공자 발목의 족쇄가 되었다.
하지만 스마일란에 간다면 아무에게도…….
그러면 이제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을 무턱대고 경계부터 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자유 속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넌다면.
내게 찾아온 마지막인지 모를 새 기회에 장애물은 딱 하나였다.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
내 머리는 말했다. 지금 당장 류엘에게 몸을 의탁하라고. 빌어먹을 사생아 소리는 그만 듣고 살자고. 그쯤 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무거워진 내 몸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어서는 분명 아니었다.
나는 나를 짓누르는 무게의 정체를 천천히 깨달았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
나는 그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내가 이대로 배를 탄다면, 그 배는 내 마음의 빚의 무게 때문에 남해를 건너기 전에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을 것이다.
무사히 스마일란에 도착한다 해도, 이따금 이유 없이 바다를 건너를 바라보게 되겠지. 언제나 조금 체한 것 같은 기분으로 살게 되겠지…….
내가 원하던 자유가 그런 모양이었을까?
‘빌어먹을.’
눈물이 또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유를 찾고 싶었지 도망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비겁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짜증이 나서 죽을 것 같아도 이 상황은 내가 오롯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야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짜내듯 눈을 꽉 감고 말했다.
“류엘은 반드시 오를 황자 전하가 제위에 오를 거래요.”
카이델 공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도 팔로 눈물을 닦고 앉았다.
그는 내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지만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말투는 예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답니까?”
“몰라요. 하지만 그는 제국 사정을 모르는 게 없어요. 그는 스마일란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이 경연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어요.”
“왜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죠?”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는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
“로리샤.”
“말 안 할래요. 공자님이 화낼 것 같아서…….”
“설마, 당신을 유혹했어요? 그레이언 전하가 쫓겨나면 내 입지도 위험해질 테니 당신은 제국에서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
“황녀 전하 수행을 빌미로 스마일란으로 오라고……?”
역시 이 인간한테는 못 당한다. 나는 순간 겁을 먹어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그가 화를 내는 대신 하얗게 웃었다.
“나, 화 안 내요. 로리샤.”
하지만 나는 그의 웃는 입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부부 싸움 차원이 아니었다. 전쟁 문제였다. 사신을 죽이면 전쟁이 촉발되니 말이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그의 양팔을 덥석 붙잡아 흔들었다.
“공자님, 중요한 건 그가 무슨 정보를 알고 있느냐예요!”
그런데 그가 또 웃었다.
“무슨 이유로든 그자는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안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어요?”
나는 이 대답에 내 목숨과 자유 모두가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순간 직감했다. 그를 붙잡은 채 고개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말을, 제가 무슨 말을 해요! 제가 그런 음흉한 인간이 뭐가 좋다고 마주 앉아서 조잘조잘 떠들겠어요.”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자는 밀리오라 전하를 스마일란에 데려갈 사신이잖아요. 그가 스마일란에 전하를 어떻게 소개해 주느냐에 전하의 남은 일생이 걸렸을지도 모르니 제가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고요! 공자님, 좀 진정해 보세요!”
“제가, 지금 평정을 잃은 듯 보여요?”
“지금 웃고 계시잖아요오!”
나는 반쯤 울면서 소리쳤고, 그는 이를 갈며 웃었다.
“걱정 말아요, 로리샤. 내가 사신에게 위해를 가할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내일 그자를 만나 친절하게 제안할 겁니다. 당장 밀리오라 전하를 모시고 배를 타라고요. 아니면 객실 대신 상자에 담겨 화물칸에서 항해하게 될 거라고 ‘설명’해 줄게요.”
나는 이제 ‘설명’이라는 단어를 평생 사용하지 못할 거다.
나는 반쯤 울면서 그의 가슴팍에 몸을 들이밀었다. 심장이 나보다 먼저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안 가요, 안 간다고요!”
문득 그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공자님이 허락해 주시면 몰라도…….”
그러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그는 입속으로 무언가 중얼거렸는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무심결에 새어 나온 것 같았다.
“스마일란 새끼들은 제국에서 씨를 말려…….”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고 하면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기억도 의식도 명확하지 않고, 그냥 내가 그랬다는 것만 발견했다.
“제발 좀 진정하세요!”
나는 그의 목을 감아 안으며 입술을 덮쳤다. 그를 타고 앉으며 침대로 넘어뜨렸다.
키스란 당할 땐 쉬웠는데 할 땐 의외로 어려웠다. 놀란 카이델 공자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더 노력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참 후, 나는 겨우 몸을 떼어 헐떡이며 말했다.
어느 틈에 내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지고, 언제 그랬는지 옷이 흘러내려 어깨가 다 나와 있었다.
“내일, 내일 류엘을 만날 거예요?”
“로리…….”
“절대 안 된다고요, 알았어요?”
“됐고, 다시 이리 와요.”
“안 된다니까?”
“알았어요. 팔에 힘 좀 빼요.”
그는 나를 넘어뜨리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이 평소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가볍게 숨이 차 열린 입, 초점이 흐려진 눈. 지금 그 눈에 흐르는 건 내가 모르는 지극히 위험하고 동물적인 무엇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내 등을 끌어당기는 그의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걸 깨닫고, 놀란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약속하신 거예요! 류엘은 안 만나는 걸로. 그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우리 힘 합치기로 했잖아요. 그럼 됐죠? 저는 공자님 방에서 잘게요!”
“로리샤!”
나는 바람처럼 달려 카이델 공자의 방에 와 있었다.
숨을 고르며 책상으로 다가가니 그가 펼쳐 놓은 책에서 아직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괴로워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의 온기, 체취, 피부, 숨소리…….
“아아아! 아아! 잘 거야! 난 잔다! 로리샤! 자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