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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손님의 진짜 관심사(3) (130/155)


128화. 손님의 진짜 관심사(3)
2023.07.10.


나는 통역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황녀 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못 이기는 척 끄덕였다.

나는 그를 먼저 황녀궁 후원으로 데려갔다. 후원에서 황궁 숲 쪽으로, 황궁을 야외로 크게 도는 동선이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다음에는 카이델 부인께 물어보겠소. 당신이 남편과 함께 만들어 내려 한다는 최선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가 굳이 내게 안내를 청한 이유는 뻔했다. 그 질문의 답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내게 그 답을 준비해 오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나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나가는 황궁의 하인이라도 들을까 스마일란어로 말하기로 했다.

[제게 답을 요구하려 황궁 안내를 부탁하신 건가요?]

[바로 그렇소.]

[당신의 질문을 받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어요. 류엘 님.]

[말씀해 보세요, 카이델 부인.]

[당신이 정말로 궁금해하시는 것은 황녀 전하인가요, 아니면 제국의 후계자인가요?]

그는 걸음을 멈추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삼 그의 몸집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통역사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말했다.

[황녀 전하께 구애를 하러 오셨다면 차라리 페일란 왕자님의 자필 편지를 가져오세요. 그걸 보면 황녀 전하도 마음을 좀 더 쉽게 여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제가 드릴 도움은 없어요.]

[당신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내 목적이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 남편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그런 짐작을 하긴 충분해요. 류엘 님.]

그러자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당신을 오해하게 했나 봅니다. 카이델 부인.]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내가 지난 며칠간 지켜본 건 황녀 전하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

나는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바다에서 미친놈이 뭐래?’

그는 내 앞으로 오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동자가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보아하니 지금 당신 머릿속엔 도망칠 궁리뿐일 것 같은데, 기왕이면 대우가 좋은 곳이 좋지 않겠소?”

이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온몸의 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류엘은 그런 내 반응까지 즐기는 듯한 태도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 곁이면 더 좋고.”

“지, 지금 제국어 하셨어요?”

“밀리오라 왕자비를 모시고 스마일란에 오시오. 스마일란 왕궁에는 당신과 같은 제국인도 많으니 절대 외롭지 않을 겁니다. 그곳에는 사생아라고 내치고 보는 좀팽이는 없으니 안심해요.”

그가 말한 좀팽이가 그레이언 전하를 말하는 것인가 싶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고른 사람이니 더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오.”

그의 유창한 말을 들으며 당신 방금 제국어를 말했느냐고 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제국어는 가끔 문법이 틀리는 내 스마일란어와 비교할 수 없이 완벽했다.

나는 내 혼란을 숨기려 온 힘을 쥐어짜 그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당신이 이런 표정을 지을 걸 알고 있었습니다. 로리샤 로아르 양.]

“호칭 조심하세요. 제가 무슨 궁리를 하는지 어떻게 아시고요. 이럴 거면 통역사는 뭐 하러 데리고 다니시는지!”

[우리 스마일란은 온 세상과 교역하며 살아갑니다. 우린 바다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바다로 온 세상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국처럼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뻐기기에는 우리는 너무 바쁘오.]

그는 목소리를 더 깔고서 말했다.

[당신이 스마일란에서 얻을 자유를,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숨을 골랐다. 그는 내게 자기 목소리를 욱여넣듯이 말했다.

[스마일란뿐 아니라 아가엘, 골드란, 주변국 모두가 이 경연을 관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압니다, 카이델 부인. 눈을 감았을 때라도 당신이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세상에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 거라고, 나는 지금까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내 목소리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약하게 떨렸다.

[네.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눈을 감았을 땐 제 남편이 곁에 있거든요!]

[남편에게 드러내는 존경과 믿음은 퍽 감동적이었습니다. 뜻밖이었다고 인정하죠.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 당신의 처지가 그러했습니까?]

“지금, 무슨……!”

[당신이 낳은 카이델이 당신처럼 사생아 취급을 당하지 않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당신은 그 존경하는 남편의 이름을 말하기도 버거워하잖아요.]

순간 숨이 막혔다. 내가 더듬을 수 있는 감정은 겨우 치욕감 정도였다.

[타가르 제국에서 당신의 미래에 약속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스스로 잘 알 거예요. 그러나 나 류엘은 세 바다가 뒤집혀도 깨지지 않는 약속을 바치겠소.]

“……!”

[그러니 배를 타요. 밀리오라 황녀를 모시고, 혹은 혼자서라도.]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내가 고함지르듯 그렇게 떠올렸을 때, 그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이 속삭였다.

[스마일란 왕을 위해 당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뭐든. 거기서부터 당신의 자유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는 내 귓가에 대고 완벽한 제국어로 속삭였다.

“이 경연은 반드시 오를 전하의 승리로 끝날 겁니다. 장래의 친구에게 특별한 선물로 알려 주는 정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서 물러나 깍듯이 예를 올렸다.

[황궁 구경 감사합니다. 카이델 부인.]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묵는 귀빈 숙소의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 * *

나는 카이델 저로 돌아오자마자 약제실에 처박혔다. 카이델 공자는 황궁에서 늦게 돌아와 이제 공부방이 된 그의 예전 침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누리는 특권은 이 정도였다. 결혼을 핑계로 아카데미 기숙사가 아닌 집에서 등하교하는 것.

우리는 침대만 같이 쓸 뿐, 손도 잡고 자지 않는 가짜 부부인데 말이다.

시간이 일 분, 일 분 흐를수록, 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 깨달으며 더 깊은 괴로움에 빠졌다.

류엘은 내가 모르는 경연에 대한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카이델 공자에게 그의 말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류엘이 내게 한 제안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스마일란이라니.’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이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당신이 낳은 카이델이 당신처럼 사생아 취급을 당하지 않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당신은 그 존경하는 남편의 이름을 말하기도 버거워하잖아요.]

자식 문제는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우리의 공동 목표는 이혼인데 무슨…….

하지만 류엘의 말은 내가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지낸,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도 나와 같은 운명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 나는 절대 남들과 똑같아질 수 없는,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카이델 공자가 나를 아무리 존중하고 아껴 준다고 바뀔 수 없었다.

그레이언 전하가 제위에 올라 우리의 순조로운 이혼을 보장해 주는 것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류엘은 다음 황제가 오를 황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의 몰락은 나로부터 시작될지도 몰랐다.

명문가와의 결혼 동맹으로 얻을 수 있는 아군을 놓치고, 고작 난잡한 사생아 계집에게 넘어갔다는 손가락질 속에 새끼 사자라는 명예도 짓밟히고.

나는 작업대에 엎드린 채 등을 웅크려 보았다.

지금까지 내 출생과 내 괴로움이 나만의 것이었을 땐 나는 주저 없이 싸웠다.

그런데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류엘에 따르면 그것이 온 대륙의 관심사라는 사실에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 처음으로, 철저히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 나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올가 부인이었다.

“작은 마님, 밤이 깊었습니다.”

나는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가 당황하여 얼굴을 닦았다.

“막 방으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올가 부인.”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척, 얼른 약제실을 나왔다. 하지만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빈 복도에 섰다. 마당에는 호위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나는 창에 머리를 툭 박아 보았다. 유리의 차가움이 온몸을 오싹하게 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공자님……!”

“가요.”

그가 내 젖은 얼굴을 보았을까, 아닐까.

올가 부인이 혹시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아닐까.

나는 잡념에 지쳐서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들어가 돌아누웠다.

그는 어쩐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겉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오더니 내 몸을 돌려 이불 위로 엎드려 몸을 겹쳤다. 그런 채로 나를 짓누르듯 내려다보았다. 무거웠다.

“저기, 공자님…….”

“말해. 로리샤.”

나는 겁을 먹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쪼그라져 있는데, 이렇게 잘난 사람이 갑자기 반말을 하니 반박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를 외면하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손으로 내 턱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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