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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손님의 진짜 관심사(2) (129/155)


127화. 손님의 진짜 관심사(2)
2023.07.09.


[그건 당사자인 황녀 전하께 물어보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왕자님과 전하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결혼을 하시게 하려면요. 그 충격과 혼란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에 따라 결혼 생활이 달라지게 될 테니까요.]

[흠…….]

그때 다시 황녀 전하의 웃음이 들려왔다. 그는 론드 경의 망토 끝자락을 붙잡은 채 그의 뒤를 따라 한 걸음씩 징검다리를 건너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다섯 살 아이처럼 한 칸을 넘어설 때마다 웃었다. 마치 어미 닭 뒤를 따르는, 잘 웃는 병아리 같았다.

황녀궁 밖으로 나온 게 저렇게 좋으신지.

류엘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저 모습만은 전해 드려야겠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류엘 님도 황녀 전하의 저런 모습에 반하셨으면 좋겠어요.]

징검다리를 다 건넌 황녀 전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빠르게 다가왔다.

“로리샤! 봤어? 나 징검다리를 건넜어!”

“봤어요. 무서우셨을 텐데!”

“응. 무서웠어. 물에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류엘 님, 스마일란인들은 그 넓은 바다는 어떻게 건너는지 모르겠어요. 소견이 좁은 저는 그것이 놀라울 뿐이에요.”

통역사가 재빠르게 말을 옮기자 류엘은 가슴에 손을 붙여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류엘은 황녀 전하께서 스마일란인을 이해하기 시작하셨음을 기쁘게 여깁니다.]

황녀 전하는 그 말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녀는 답으로 정중하게 묵례하더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류엘은 우리에 앞서 숙소로 돌아가며, 가기 전에 내게 말했다.

[다음에는 카이델 부인께 물어보겠소. 당신이 남편과 함께 만들어 내려 한다는 최선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가 멀어지자 론드 경이 다가와 물었다.

“저자가 방금 뭐라고 한 겁니까?”

“다음에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요.”

내 대답에 론드 경과 황녀 전하, 두 사람이 석연찮은 시선을 교환했지만, 나는 얼른 쾌활하게 물었다.

“황녀 전하는 어떠셨어요? 오늘은 질문도 많이 하셨잖아요. 그 왕자님은 어떤 것 같으세요?”

밀리오라 전하는 론드 경의 눈치를 흘끔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내가 그 왕자에 대해 궁금해서 물어본 줄 아니?”

“네?”

“예의상 관심 있는 척하는 거야. 정략결혼은 나라끼리 하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왕자가 뭘 좋아하는지 전혀 의미가 없다고.”

“…….”

“뭐 해? 가자, 로리샤. 오늘 오랜만에 즐거웠어.”

* * *

나는 카이델 공자와 함께 카이델 저로 돌아왔다. 황녀 전하는 오늘도 머무르라고 했지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차 안에서, 나는 내가 그와 밀폐된 좁은 공간에 있을 때 여전히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불필요하게 잘생긴 얼굴은 내가 생각에 집중하는 것을 자꾸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보자 그가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왜 웃는데?’

내가 속으로 그렇게 대꾸하자 그가 다시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차 창밖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류엘의 질문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카이델 공자를 퍽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자백한 것이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류엘이 하지 않은 질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뭘 해 주고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해 준 건, 그가 도와달라고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르다가 그를 싫어하려고 트집이나 잡는 것이 다였다.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어야지. 고작해야 공작님이 주신 장부를 관리하고, 공자님을 돕고…….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를 떠나야 하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가 지금 내게 기울이는 노력을, 그에게 보답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진 여자에게 쏟아부어 준다면 얼마나 더 나은 결과가 날까.

그가 불쑥 말했다.

“왜 말이 없어요?”

나는 움찔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 황녀 전하와 류엘 님과 소풍을 갔어요.”

“그런데?”

“제가 그에게 황녀 전하의 웃음이 예쁘다고 자랑하자마자 전하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시지 뭐예요.”

카이델 공자는 마치 눈앞에서 그 광경을 그리듯 웃었다.

남자가 뭐 이렇게 예쁘게 웃나 싶었다. 종일 거친 남자 류엘을 보다가 그를 보니 눈이 맑은 냇물에 씻겨 나가는 듯했다.

‘이혼해도 이 얼굴은 그리울지도 모르겠구나. ……로리샤, 이 미친년아.’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가 퍽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그토록 힘겨웠다.

“왜요? ‘꺅’ 정도로 문제 될 것 없잖아요. 남자들은 의외로 그런 것을 싫어하지 않아요.”

“그때 황녀 전하가 론드 경에게 안겨서 버둥거리고 계셨던 게 문제지요.”

카이델 공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런.”

“네. ‘저런’이에요.”

카이델 공자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예전 황가 소풍 때 황녀 전하의 마차가 넘어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인과 기사들은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황녀 전하와 눈이 마주쳤으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를 전하가 두려워서요. 그 사고를 일으킨 것이 그분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이야기는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욕을 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다친 론드 경이 나선 거죠. 자기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아마 지금까지 그분을 위해 그렇게 나서 준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그것이 그의 기사도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도요.”

“…….”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당신에게 너무 의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돼요. 스마일란까지 따라가자고 하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전하가 가끔 떼쟁이처럼 보여도 그분은 타가르예요. 황녀 전하는 자신이 언젠가 이런 결혼을 하게 될 걸 알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었다.

“그 사신, 제국의 사정 중 모르는 게 없어요.”

“그렇겠죠. 제국의 주변국들은 제국의 상황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저더러…….”

“당신더러?”

카이델 공자는 대답을 기다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보니, 이상하게 하려던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이 분명해요.”

“그렇겠죠.”

“심각하다니까요?”

“사신은 공인받은 첩자예요, 로리샤. 그는 제국 땅을 밟는 동안 가능한 무엇이든 얻어 가려고 할 거예요.”

“원래 그런 거였다니.”

내가 뚱하게 중얼거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내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려 하자 그는 내 관자놀이를 꾹 눌러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더 반항하는 대신 민망함을 떨치려고 조그맣게 물었다.

“오늘 아카데미는 어땠어요?”

그러자 그가 어깨를 움찔할 정도로 놀랐다.

“내게 관심을 가져 주다니.”

“왜요, 제가 그러면 안 돼요? 아이, 참!”

내가 항의하기 위해 머리를 들려 하자 그가 또 꾹 눌렀다.

“목 아파요.”

그러자 그가 내 머리를 획 들어 바로 세워 주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나는 민망해 마차 창밖을 보았고, 그는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아카데미는 평범했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 생도들과 방학 중 있었던 일을 나누고, 수업을 듣고. 미샤 양은 훨씬 좋아 보이더군요. 얼굴에 그늘이 사라졌어요.”

그는 조금 머뭇대다가 말했다.

“그녀는 나와 친척이 된 것이 즐거운 모양이에요.”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앙카르트 양은 등교했나요?”

“결석했어요.”

“시녀장님에게 끌려갔다더니.”

“계속 이런 식이면 앙카르트 양은 조기 졸업은커녕 성적 유지도 힘들 겁니다.”

그냥 황녀 전하의 말을 좀 더 존중해 주고, 자기 욕심 조금만 덜 부리면 어떻게든 될 텐데. 나는 칼린 앙카르트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녀도 참 딱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참 신기해요.”

내게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니 류엘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 말대로면 천생연분이 만난 것뿐 아니오.]

‘흥. 배 타고 바다를 건너며 멀미를 하도 해서 정신이 나갔나 봐.’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저, 내일 또 입궁할 거예요. 류엘 님과 티 파티가 있거든요.”

“마음에 안 들어.”

“네?”

내가 돌아보자 그는 퍽 진지하게 말했다.

“결혼해서 처음 맡겨진 일이 외간 남자와 놀러 다니는 일이라니.”

나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택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각자의 용무를 위해 흩어졌다.

카이델 공자는 공작님께 여러 가지를 보고드린 다음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약제실로 가서 장부를 살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 내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시간도 잊고 공부하는 탓이었다.

내가 언제 침대 곁이 빈 걸 신경 썼더라.

* * *

류엘과의 티 파티는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와 황녀 전하는 스마일란 왕가 사람들과 생활 풍습에 대한 자잘한 질문과 답변을 교환했다.

나는 황녀 전하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식적인 웃음도 짓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류엘이 유쾌한 말을 하면 그때만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이었다.

티 파티가 끝나자 류엘이 내게 황궁 안내를 요구했다.

황녀 전하가 눈에 띄게 피로해 보였기에 그것은 퍽 자연스러운 요청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손님 신분이라서 황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류엘은 그 말을 농담인 양 웃어넘겼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굽힘이 없었다.

“류엘 님이 황족의 곁을 종일 지키면서 황궁 안은 못 돌아다닌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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