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먼 바다의 손님(3) (127/155)


125화. 먼 바다의 손님(3)
2023.07.07.


“저게, 저는 좋은 데 시집갔다고 나를 구박이나 하고……. 흑!”

“자고 갈게요, 전하! 내일 소풍까지 함께 하고 출궁할게요. 네?”

“진짜?”

“네. 전하.”

“역시 로리샤야! 너도 알지? 한번 시녀는 영원히 시녀인 것.”

“음…….”

모르는데요?

하지만 황녀 전하가 금시초문인 소리를 하며 내 손을 붙잡아 당기니 마음이 약해져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내 머릿속에는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뱅뱅 맴돌았다.

외박한다고 하면 싫어할 텐데.

“그럼 저는 준비하러 나가 볼게요. 전하.”

“응응. 얼른 나가.”

나는 바로 후원으로 나갔다.

셔츠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목검을 휘두르는 론드 경은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론드 경!”

“시녀, 아니, 카이델 부인. 어쩐 일이시오.”

“스마일란 사신 때문에요.”

“흠.”

론드 경은 스트레스 가득한 신음을 흘리며 목검을 땅에 푹 꽂아 넣었다. 나는 목검이 땅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다.

그는 무심한 모습으로 땀을 닦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가 오늘따라 무섭게 느껴졌다.

황녀 전하는 저런 남자가 귀엽다니. 차라리 귀엽기로 치면 카이델 공자 쪽이 옳다. 그냥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그렇단 얘기다.

내가 무심코 딴생각에 빠져 있자 론드 경이 한쪽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따라 내 주변 사람들이 다 거친 것 같았다.

나는 내 머릿속을 털어 내듯 물었다.

“경은 아직 그 사신을 못 만나 보셨죠?”

“황녀궁에 들 때 봤소. 딱 스마일란인이더군.”

나는 그의 적대감을 느끼며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론드 경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뱃사람 느낌이 나면서 귀족적이기도 해서 신기했어요.”

“그들은 타고난 장사꾼들이오. 카이델 부인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겁니다.”

“네. 그럴게요.”

나는 대륙의 접점에 있어 복합적인 문화를 가진 스마일란을 흥미롭게 여기고 공부했다. 하지만 황녀 전하도 론드 경도, 태도를 보니 스마일란에는 호감이 없었다.

“내일 사신과 황궁 숲으로 소풍 가기로 했어요. 경도 동행해 주셔야 해요.”

“시녀로 복직하기로 하신 거요?”

“설마요. 그래서 입장이 곤란하지 뭐예요.”

그는 내 말을 자르듯 말했다.

“기왕에 오셨으니 잘해 주시오. 앙카르트 자작 영애가 나를 제 호위 부리듯 하는 꼴을 하루쯤은 안 봐도 좋을 것 같으니.”

“뭐라고요?”

황실 소속인 론드 경에게도 그러다니, 그녀는 정말로 겁대가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놀라자 그가 간단히 덧붙였다.

“물론 내가 거기 응해 줬다는 말은 아니오.”

“물론 론드 경이 그러실 리가 없죠. 그럼 내일 뵈어요.”

* * *

나는 시녀가 아니므로 직접 소풍 준비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리아를 통해서 말을 전한 다음 예전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내가 시녀 시절 쓰던 방은 내 물건이 없는 것 말고는 내가 쓸 때와 똑같았다. 마치 시간이 되돌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황녀 전하가 무슨 기분으로 내 방을 보존해 두었을까 싶으니 속이 상했다. 엄마가 낳지도 않았는데 나를 의지하는 여동생이 생겨 버린 기분이었다.

먹먹함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을 보았을 땐 피식 웃고 말았다. 카이델 공자가 벽을 기어올라 저 창으로 들어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서였다.

꼭 저렇게 말이다……?

“어…….”

카이델 공자는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닫더니 씩씩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꼭 이런 식으로 오게 해야 합니까?”

나는 얼떨떨한 채로 웅얼거렸다.

“그냥 문으로 오시지……. 이제 아내를 만나러 오시는 거니 눈치 볼 것 없으신데…….”

그의 눈동자가 ‘아차’ 하듯 동요하는 걸 보고, 나는 웃을 뻔한 것을 참았다. 그도 나와의 결혼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민망해서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느라 몸을 반쯤 돌린 채 물었다.

“류엘이란 자는 어땠습니까?”

“음. 매력적이에요.”

“뭐요?”

나는 류엘에 대해 떠올리느라 카이델 공자의 목소리가 삐죽 올라간 걸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호방하고 시원한 스마일란 남자요? 단호하면서도 영리해서 협상가로든 중매쟁이로든 유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내 몸이 획 돌아갔다. 그는 자기 쪽으로 내 몸을 돌려놓고서 엄하게 말했다.

“로리샤.”

“네……?”

“매력적? 남편에게도 쓰지 않은 어휘를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까?”

무슨 소리래.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부적절할 건 뭐예요? 제가 그 사신한테 시집갈 것도 아닌데.”

“……그렇습니까?”

“저는 이미 공자님께 시집갔잖아요. 지금 문제는 밀리오라 전하죠.”

내 대답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카이델 공자는 무언가 복잡하고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로 갔다. 그래서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밀리오라 전하는 어떠십니까?”

“패닉에 빠지셨어요.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죠. 저나, 공자님이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아니, 저는 이해 못 해요.”

“네?”

“아무리 황녀 전하의 명이라도, 외박은 남편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에리아에게 전해 달라고……. 그래서 공자님이 이렇게 벽을 타고 오셨고…….”

“하!”

카이델 공자는 이번에도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나는 이번에는 그도 달래 줘야 하나 생각했다가, 아무래도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아무튼 그가 이 상황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사과하기로 했다.

“앞으로 외박할 때는 꼭 먼저…….”

“외박을 하면 안 되죠!”

내 말을 싹둑 자르고서, 카이델 공자는 신경질적으로 재킷을 벗어 던지더니 침대로 들어갔다.

“공자님……?”

“그레이언 전하가 내일 새벽에 보자고 하셨어요. 아카데미 수업 전에 말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자고 가겠습니다.”

“여기는 황녀궁…….”

“내 아내 방에서 내가 자는 게 문제입니까?”

그는 별로 설득력도 없는 짜증을 내고는 내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웠다.

나는 침대의 나머지 반으로 기어들어 가며 머릿속으로 주절거렸다.

‘그나마 내 자리를 남겨 두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결혼 생활은 복잡했다.

* * *

아침 식사 후, 나는 황녀 전하에게 가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오늘도 칼린이 먼저 나와 자기가 수행하겠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에리아였다.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앙카르트 양은?”

내가 속삭여 묻자, 에리아도 속삭였다.

“해 뜨자마자 시녀장님에게 불려 갔어요. 근신을 깬 처벌을 받으러요.”

“그랬구나.”

나는 시녀장을 다시 보는 상상만으로도 싫어서 머리를 으으 저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 없이 칼린 앙카르트의 과욕이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황녀 전하는 간소한 야외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말아 꾸미고, 볼에 분도 얹은 모습이 들뜬 소녀 같았다.

‘밤사이 마음이 바뀌셨나?’

“전하, 오늘 아름다우세요.”

“어머, 너는 내가 오늘만 예쁘니?”

“음, 오늘은 소풍에 딱 어울리게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다행이다. 가자, 로리샤.”

나는 갸우뚱하며 밀리오라 전하의 뒤를 따랐다.

“나오셨습니까. 전하.”

“응. 나왔어.”

오랜만에 성장을 한 론드 경이 무뚝뚝한 인사를 건네며 시선을 피하자, 황녀 전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이가 좋아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가 속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니 속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황궁 숲 입구에 다다르자 스마일란 사신 류엘이 통역사와 함께 나타났다.

류엘은 가운을 닮은 스마일란식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가운 아래 허리에 뱃사람들이 쓰는 길쭉한 단검을 찬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호위를 동반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론드 경을 소개했다.

“여기는 황녀 전하의 호위를 맡은 론드 경이세요.”

론드 경과 류엘은 간단한 스마일란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즉시 서로를 외면했다.

나는 냉담한 태도의 두 남자를 애써 못 본 체하며 이끌었다.

“그럼 갈까요?”

우리는 황궁 숲의 냇가로 갔다.

무릎 깊이의 넓은 내에는 커다란 돌 징검다리가 있어 정취를 자아냈다. 주변에는 나무 그늘이 넓게 드리웠고, 해가 올라갈수록 냇물이 반짝거리고 졸졸 소리도 경쾌해서 소풍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우리는 거기서 차와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론드 경은 황녀 전하에게서 조금 떨어진 데 동상처럼 서서 주변을 살폈다.

오늘도 대화를 주도한 것은 류엘이었는데, 황녀 전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따금 질문을 하기도 했다.

스마일란 왕자가 좋아하는 음식, 사냥을 잘하는지, 술을 즐기는지 따위의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러면 류엘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페일란 왕자는 곰 사냥을 좋아하며, 그 곰을 잡아 고기를 곁들인 주연을 베풀기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가 생선 요리는 좋아하시지 않느냐 물었을 때, 류엘은 스마일란에는 바닷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웃었다.

제국에서 그렇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웃는 남자를 처음 보아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정도의 호탕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류엘을 흥미롭게 구경하는 것도 잠깐, 나는 밀리오라 전하의 눈빛이 점점 침울하게 가라앉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잠깐 다리를 펴고 싶군요. 산책을 하고 돌아올 테니, 스마일란 이야기는 그때 더 들려주세요.”

내가 무심결에 함께 일어나자 밀리오라 전하가 살짝 당황했다.

론드 경은 당연히 그녀를 따라야 하는데, 나까지 가 버리면 손님만 덩그러니 남겨 놓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사신에게 결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러면 류엘 님은 제가 모시고 있겠습니다. 전하.”

“부탁해. 로리샤. 가자, 론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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