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먼 바다의 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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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먼 바다의 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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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먼 바다의 손님(2)
2023.07.06.
황녀궁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반쯤 뛰어오느라 헐떡거리고 있었다. 밀리오라 전하가 봉투에 느낌표를 하나만 찍었어도 좀 빠르게 걸어왔을 텐데, 세 개라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에리아를 눈으로 찾으며 말했다.
“에리아, 나 왔어. 나 정말 달려왔어. 황녀 전하는?”
“카이델 부인! 왜 이제 오셨어요?”
나를 반갑게 맞이했던 에리아가 무언가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에리아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니 그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칼린 앙카르트.
그녀는 나를 보고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곧바로 나를 뜯어먹고 싶다는 눈빛을 했다.
그러면 그렇지. 문턱 하나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데가 황궁인데.
하지만 나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칼린 앙카르트 양.”
그런데 그녀는 나를 쌩하니 못 본 척하며 에리아에게 명령했다.
“고하도록 해. 내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고.”
그러자 에리아는 잠깐 망설이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는 지금 카이델 부인을 기다리고 계세요.”
“네가, 감히! 황궁 법도를 몰라서 그래?”
보아하니 자기는 시녀고 얘는 티 파티 손님 나부랭이다, 그런 말인 모양이었다.
나는 말했다.
“지금 근신 중이 아니신가요, 앙카르트 양? 명을 어기면 처벌이 상당할 텐데, 그사이에 황궁의 법도가 바뀌었나?”
칼린이 멈칫하는 표정을 보니 그녀도 시녀장 할머니와 즐거운 만남을 가진 경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바로 에리아에게 말했다.
“고해 줘, 에리아.”
에리아는 즉시 문으로 가 고했다.
“황녀 전하, 카이델 부인 들었습니다.”
“들라 해.”
황녀 전하의 대답에 내가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에리아가 뒤에서 문을 확 닫아 바람이 다 느껴졌다. 칼린이 나를 따라 들어올까 봐 그러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웃겨서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예를 올리려 했다. 방 안에는 이미 스마일란 사신이 분명한 남자 둘이 앉아 있었다.
밀리오라 전하는 나를 보고 반색하며 말했다.
“로리샤, 어서 앉아. 통역사, 지금부터 내 곁을 지킬 카이델 부인이라고 말해 주게.”
나는 밀리오라 전하 곁으로 가서 스마일란어로 말했다.
[당신의 뱃전에 세 바다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제국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저는 로리샤 카, 이델이라 합니다.]
세상에, 나의 새 성은 외국어로 말할 때도 혀에서 턱턱 걸렸다.
그러자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사신이 말했다.
[그 사자 카이델?]
[네. 첫 번째 사자님의 며느리입니다. 결혼한 지 불과 며칠이라 가풍에 미숙하니, 부디 제 흠을 제 가문의 흠으로 여기지 말아 주세요.]
[제국에 와서 스마일란어를 하는 자는 많이 만났으나, 우리의 인사를 해 주는 자는 부인이 처음이오. 나는 류엘이라 하오.]
[그로 인해 즐거우셨다면 저 또한 기쁩니다. 류엘 님.]
마지막으로 스마일란어를 연습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몇 군데 문법이 틀렸지만, 내가 전문 통역사도 아니고 뜻이 통하면 그만 아닌가.
나는 황녀 전하에게 간략하게 말했다.
“인사를 나눴습니다. 사신께서도 카이델가를 아시네요.”
“응. 그래그래. 네가 유부녀라는 건 항상 말하고 다니도록 해.”
황녀 전하는 살짝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요.
이 류엘이라는 남자는 인상이 퍽 강한 편이었다. 눈빛이 펄펄 살아 있는 데다 건장한 몸과 짙은 피부가 상대에게 상당한 압도감을 느끼게 했다.
황녀 전하가 이런 남자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시집간다고 생각하니 내 심장이 괜히 뛰었다.
황녀 전하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린 것을 보니 내 긴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인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황녀 전하부터 구해 내고 봐야할 상황이었다.
나는 시녀나 통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스마일란어를 할 줄 알더라도 사신의 통역사를 통해 대화하는 편이 옳았다. 내 역할은 통역사가 황녀 전하에게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정정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통역사에게 말했다.
“제국에서는 남녀가 처음 만나면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헤어진답니다. 첫날에는 서로의 얼굴만 익힌 뒤, 다음에 야외에서 식사나 소풍을 즐기며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알아가요. 사신께서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시다면 그렇게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통역사가 말을 옮기자 류엘은 호쾌하게 받아들였다.
“류엘 님이 기꺼이 제국의 풍습을 따르겠다고 하십니다. 다만 황녀 전하께서 스마일란에 오시면 가장 아름다운 해변의 산책에도 따라오셔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밀리오라 전하를 바라보자 그녀는 입가를 바르르 떨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내일 점심때 황궁 숲에서 뵈어요.”
통역사가 말을 전하자, 류엘은 벌떡 일어나더니 웃으며 예를 갖추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황녀 전하는 누가 소파에 내던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전하?”
“봤지? 방금 봤지, 로리샤? 저 사람 얼마나 무서운지……. 사신이 저 정도면…….”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누가 ‘너는 카이델 공자와 결혼해야 한다.’하고 미리 말해 줬다면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했을 거다. 워낙 폭풍같이 닥쳐서 멍하니 당한 거지.
“그게……. 전하……. 그는 대리인일 뿐이잖아요. 아마 왕자님은 훨씬 더 멋있는…….”
하지만 나는 혀가 꼬이는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황녀 전하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말로 위로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뻘소리를 하고 말았다.
“따, 따지고 보면 론드 경이 훨씬 더 목도 굵고 팔도 굵고, 아무튼 피부만 하얗지, 생긴 건 훨씬 더 무서운걸요? 하지만 전하는 론드 경은 아무렇지도 않으시잖아요. 그러니까…….”
“흑, 너 눈이 삐었어? 론드 경은 귀엽잖아! 저자와 론드 경이 어디가 비슷한데? 흐흐흑. 로리샤, 너도 똑같아!”
밀리오라 전하는 테이블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론드 경이 어디가 귀엽……?’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녀가 내 손길을 아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었었다.
과연 그녀는 조금씩 진정해 갔다.
“전하.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스마일란이라니, 말이 돼? 황후 폐하 짓이야.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건너로 보내 버리시려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전하, 저도 결혼하란 말을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상상했던 것만큼 끔찍하지는 않았어요. 저 사신과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면서 왕자님에 대해서 알아보세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그게 카이델 공자와 결혼한 애가 할 소리야? 이 미친년아.”
“헉.”
밀리오라 전하가 욕까지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지금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내 입장을 빗댄 위로는 황녀 전하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제국의 아무에게도 통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아…….”
밀리오라 전하는 눈물을 닦더니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뚱하게 물었다.
“아까 밖에 전하의 시녀가 있었어요.”
“어머, 잊고 있었어. 그것이 사신이 왔다니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나서는 둘이 얼마나 재미있게 떠들던지. 아주 제 손님인 줄 알더라니까?”
“그랬어요?”
“제 아버지 사업에 연줄을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아아.”
칼린 앙카르트는 정말 지치지 않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근신 명령까지 어기고 나와서는, 황녀 전하의 면전에서 자기 집안의 이익을 추구하다니.
황녀 전하의 기분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밀리오라 전하를 다독이듯 말했다.
“전하, 내일 점심 소풍 준비하셔야죠. 론드 경에게 일러 놓을게요.”
“그래, 그럴래?”
나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 외국 사신과의 접견인데 시녀를 대동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로리샤! 그 앤 1황자궁의 첩자야.”
“저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셨잖아요.”
“넌 아니었고, 칼린은 진짜야. 너 바보니?”
“어…….”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밀리오라 전하가 먼저 말했다.
“칼린 앙카르트가 황궁에 어떻게 들어왔을 것 같아?”
“어떻게 들어왔는데요?”
“걔는 원래 그레이언 오라버니한테 들이대고 있었다고. 파티에서 못 봤니?”
“그야 그녀가 아카데미 우수 생도니까 그레이언 전하도 예의상…….”
“내가 칼린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레이언 오라버니 눈빛이 사나워졌어. 그리고 그것이 르네 자작과 몰래 만나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
“오를 오라버니가 좀 그래. 상대방 목을 죄고 안달 나서 몸부림치게 만들어. 칼린 저 계집애는 지금 나를 팔아서 오라버니에게 잘 보일 궁리를 하느라 잠도 못 잘 거야. 그런데 그런 걸 데리고 다니라고? 너, 정말 내가 어떻게 되어도 좋아?”
나는 항의했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누가 있어? 그럼 론드 경한테 내 옆에 앉아 있으라고 시킬까?”
“로, 론드 경이 참 불편해하시겠네요.”
“너 론드 경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론드 경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매일 입궁해. 아니다, 네 방을 비워 놨으니까 자고 가. 응?”
“헉, 저 유부녀예요, 전하!”
그렇게 말해 놓고 나도 놀랐다. 내가 결혼 카드를 이럴 때 써먹을 줄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황녀 전하의 눈이 금방 그렁그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