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먼 바다의 손님(1) (125/155)


123화. 먼 바다의 손님(1)
2023.07.05.


아가엘은 당장 힘으로 정복할 수 없는 제국과 화친하고, 그 사이 힘을 길러 바닷길을 통해 스마일란을 위협하여 이득을 취하는 계획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 계책이 성공한다면 그다음에는 제국을 노려볼 만했다.

아가엘이 제국에 철광석 거래를 제안한 것도 그 전쟁 준비를 위한 시간을 버는 일에 가까웠다.

스마일란 왕도 그러한 동향을 곧 눈치챘다. 그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고 강경파를 질책한 후, 류엘에게 비밀 임무를 들려 제국으로 보냈다.

“제국이 아가엘에서 더 얻을 것이 있겠습니까? 스마일란의 풍부한 자원과 해산물은 제국의 풍요에 기름을 부어줄 것입니다. 평화야말로 부입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류엘이 특유의 크고 거친 목소리로 말하는 스마일란의 언어는 그림자처럼 따르는 통역사의 입을 통해 제국어로 전달되었다.

황제는 스마일란이 아가엘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둘 수 없었다. 아가엘과 제국 사이에는 툰바르 산맥이라는 관문이 있었으나, 스마일란과 제국 사이 탁 트인 바닷길은 그보다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 문제를 미리 해결해 장래 불화의 씨앗을 제거해야 했다.

그는 류엘에게 표정 없이 물었다.

“그 평화를 어찌 이루려 하느냐?”

“양국 간에 피를 합치는 것만 한 신뢰가 있겠습니까?”

류엘이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대답하자 정무홀에 울림이 생겼다.

“저의 왕께 장성한 아들이 있습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짝이 되기에 부족함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 과격한 제안에 황제가 몸을 굳혔을 때, 황후가 그의 손등을 손으로 덮어 눌렀다. 황후는 유리알처럼 차갑고 단단한 눈동자로 그를 직시했다.

그녀가 천천히 끄덕였을 때,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류엘이 말했다.

“이 류엘이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뵙고 스마일란 왕자 페일란의 훌륭한 면면을 설명해 드리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저 또한 제 주인께 황녀 전하의 미모와 덕행을 기쁘게 전하겠습니다.”

황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여 사신을 향해 답했다.

“허한다.”

* * *

나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그사이 두 하녀는 건강한 몸으로 쫓겨났고, 다른 하인들의 태도는 두드러지게 달라졌다.

나는 내 개인용 약제실에서 장부 공부를 하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장부를 통해 본 카이델가의 규모는 내 상상을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다. 거의 작은 나라나 다름없었다.

장부란 거기 관련된 일 전부를 요약한 서류였고, 그걸 이해하게 되는 건 곧 카이델가가 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장부를 며칠 만에 금방 파악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약제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두 통의 서신이 동시에 급신이라며 전달되었다. 하나는 카이델 공자, 하나는 밀리오라 전하로부터 온 것이었다.

황가의 문장이 찍힌 봉투에 밀리오라 전하의 글씨로 ‘긴급!!!’이라고 적혀 있어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카이델 공자의 편지를 먼저 열었다. 그는 일을 과장하는 법이 없는데, 그가 급신이라고 하면 급신이 분명했다.

「스마일란 왕이 사신을 보내 자국 왕자와 황녀 전하의 국혼을 제안했습니다.」

“헉……. 그게 이렇게 된다고?”

나는 그동안 아가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곱씹어 보니 스마일란이 아가엘의 행보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마일란으로서는 저들을 식민지로 삼으려 하는 아가엘보다는, 조공만 바치면 크게 간섭하지 않는 제국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 당연했다.

제국의 입장에서도 아가엘에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었으니, 이 국혼은 성사될 가능성이 컸다.

황녀 전하의 편지는 뜯지 않아도 내용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입궁 준비를 마치고 마차 안에서 그녀의 편지를 열었다.

「로리샤, 큰일 났어. 당장 오란 말이야!」

봉투에 쓰인 ‘긴급’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이럴 거면 봉투만 보내시지.”

구시렁거리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밀리오라 전하가 바다 건너로 시집간다니……. 나는 제국 안에서 결혼해도 이렇게 외롭고 힘든데.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늘 외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꼭 결혼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삶이 그런 거지.

사실 최근에는 전보다 살기 수월해진 것 같기도 했다. 두 하녀가 쫓겨난 뒤로는 하인들도 깍듯하게 굴고, 카이델 공자와 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놀라 소스라치는 일도 줄었다.

사실 몇 번인가 그가 자다가 내 몸에 팔을 두른 무게에 살짝 깬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잘생기면 어지간한 건 용서가 되는 편인 것 같다.

아니, 내 말은,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가 삶의 질에 퍽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그런데 바다 건너 나라의 왕자님이 밀리오라 전하에게 어떤 남편이 되어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빨리 입궁해야 했다.

* * *

“제국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전하의 미모를 찬탄하며, 스마일란 사신 류엘이 예를 올립니다.”

밀리오라는 자기 앞에 허리를 숙이는 짙은 피부의 남자와 그의 옆에 선 통역사의 낮고 빠른 목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어 있었다.

황후 앞이 아니라면 밀리오라 타가르가 그토록 얼어 붙는 경우는 없었다. 밀리오라는 이 상황이 그만큼이나 무서웠다.

‘로리샤는?’

밀리오라는 로리샤를 당장 앞에 갖다 놓으라 고함을 치는 듯한 눈빛으로 에리아를 보았다. 하지만 에리아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카이델 저로 편지를 보낸 것이 조금 전이니 로리샤가 벌써 도착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칼린이 바쁜 걸음으로 들어오더니 류엘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시종의 메달이 빛나고 있었다.

[저는 칼린 앙카르트,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시녀입니다. 앞으로 두 분의 대화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밀리오라는 칼린의 유창한 스마일란어를 들으며 분에 차 입술을 앙다물었다.

류엘은 밀리오라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방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과연, 통역사가 양측에 배석하는 것이 예법에 맞을 것이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엘 님.]

칼린은 그제야 밀리오라에게 말했다.

“류엘 님께 제 소개를 하였습니다. 황녀 전하.”

밀리오라는 거의 복화술에 가깝게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칼린은 밀리오라 곁에 앉으며, 역시 시선을 피한 채 속삭였다.

“외국 사신을 수행도 없이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황녀 전하. 근신을 어긴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

밀리오라는 그러잖아도 궁지에 몰린 상황을 이용해 칼린까지 기어오르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마음이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다니는 듯 느껴지던 불안이 가라앉으면서 인내심도 조금 생겼다.

밀리오라가 칼린을 당장 쫓아내지 않은 것은 그 적은 인내심을 쥐어짜 낸 결과였다.

외국 사신 앞에서, 그것도 혼담을 전하러 온 자 앞에서 첫 대면에 험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류엘은 셔츠를 걷어 굳센 근육이 드러난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겪은 일, 황궁 만찬에서 먹은 음식에 대한 감상, 그리고 밀리오라의 미모에 대한 찬양.

류엘은 유쾌했고, 대화를 능수능란하게 주도했다. 상대가 도저히 유쾌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 문제였을 뿐이다.

밀리오라는 스마일란어를 인사말 몇 마디밖에 몰랐다. 그러나 칼린은 류엘의 말을 혼자 알아듣고 그녀보다 먼저 가식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통역은 류엘의 통역사가 다 하도록 놓아 둔 주제에, 그녀는 마치 언니의 신랑감을 빼앗으려는 여동생처럼 류엘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밀리오라는 그 모습을 보며 칼린의 목을 조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차가 들어왔을 때 칼린이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평소 즐겨 드시는 차이니 즐겨 주세요.]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류엘은 과장되게 대답하며 밀리오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밀리오라는 눈이 가늘어질 정도로 가식적인 웃음을 띤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직 뜨거워 김이 오르고 있었다.

“칼린, 통역해. 이 차를 스마일란 사신께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고.”

“그건 제가 이미 말씀드, 으읏!”

“어머, 이를 어째!”

밀리오라는 칼린에게 통역을 명하려 몸을 돌렸다가 팔꿈치가 걸려 칼린의 가슴에 찻잔을 쏟고 말았다. 뜨거운 차가 스며들자 칼린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고통을 참았다.

류엘은 스마일란어로 괜찮은가 물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또한 가식적인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칼린, 어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렴. 혹시 데었을지 모르니 의료원에 가 보고.”

“……!”

칼린은 화끈거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으나, 얼핏 분해서 그러는 듯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잠시 비우겠습니다.]

칼린이 나가자 밀리오라는 짐짓 얼굴을 붉혔다.

“제가 이렇게 덜렁거린다는 걸 귀국의 왕자께서 모르셨으면 좋겠네요. 참으로 부끄러워요.”

통역사는 류엘과 짧은 대화 끝에 말했다.

“페일란 왕자께서는 지극히 너그러워 황녀 전하께 찻잔이든 시녀든, 얼마든지 새것으로 구해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밀리오라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참 듣기 감사한 말이네요.”

“류엘 님은 페일란 왕자께서는 황녀 전하의 감사를 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밀리오라는 류엘의 유창하고도 달콤한 말이 듣기 싫지 않았으나 새침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사신께서 그걸 어찌 확신하시고요?”

“류엘 님께서는 스마일란의 왕족부터 상인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믿음을 사고 계십니다. 류엘 님은 황녀 전하께서 자신을 좀 더 믿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물론이죠. 타가르는 스마일란을 존중하고 신뢰하니까요.”

밀리오라는 그렇게 대답하며 초조한 시선을 문으로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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