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닥치면 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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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닥치면 하는 여자
2023.07.04.
“지금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장부 관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당신, 닥치면 하잖아요.”
“하!”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얼어 버렸다.
인제 보니 카이델 공자의 광기에 가까운 무모함은 연원이 따로 있었다. 카이델 공작님 말이다.
“…….”
나는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건드리는 동시에 팔이 내 허리를 감는 감각에 소스라쳤다. 하지만 이미 넋을 놓은 상황이라 한 박자 늦게 놀라고 말았다.
“고, 공자님?”
“로리샤.”
“놓아주실래요?”
“싫은데.”
“으으!”
나는 몸부림을 쳐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쥐가 고양이를 놀리듯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다가 한 번에 툭 힘을 풀었다.
나는 균형을 잡느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내가 분해 씩씩대는 동안, 그는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침대까지 데려다줬을걸.”
“공자님!”
“이제 환상이 깨졌죠?”
“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그가 웃었다.
“제가 왜 제국 최고 인기남인지 알아요? 대부분의 영애는 나와 결혼하면 제국 최고 기사단의 보호와 경애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마음껏 사치를 누리고 살 거라고 생각해요.”
“알고 계셨네요?”
내 대답을 왜 허망히 느낀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잠시 공중을 바라보며 하늘을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겪은 게 진실이에요. 로리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순간 방심하면 그 명예에 찌부러지고 마는 거예요. 사치? 돈이 있어도 쓸 시간이 없죠.”
그에게도 카이델가의 명성이 자신의 것인 줄로 아는 오만한 부하들의 고삐를 틀어쥐는 게 절대 만만한 일은 아닐 터다.
공작 부인은 전쟁터에는 안 나가겠지만,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저택을 돌보고 기사단을 돌보려면…….
“하아.”
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를 흘끔 돌아보며 물었다.
“공자님을 동정해도 돼요?”
“훗. 마음대로 해요. 부인.”
카이델 공자는 웃으며 내 곁에 와서 앉았다. 이제는 부인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자포자기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의 팔이 내 어깨에 닿도록 그가 바싹 다가앉은 게 신경 쓰였다.
“아까 제가 집무실에서 나간 후에 공작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당신을 어렸을 때 만났으면 기사로 길러 봤을 거라고 하셨어요. 제국 최초의 여기사라…….”
그는 짐짓 아머를 입고 검을 찬 내 모습을 상상하는 척을 했다.
“아휴.”
나는 이상한 농담 말라고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인상을 썼다.
“어디 가요?”
“약 만들러요.”
“로리샤?”
“공자님 혼자 노세요.”
뒤통수에서 혼자 남겨진 카이델 공자가 섭섭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미련 없이 방을 나와 올가 부인을 찾았다.
* * *
올가 부인은 나를 복도 끝의 작은 골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내가 주문한 물건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어떠십니까?”
“완벽해요! 고마워요. 네리사와 그 애는 어떤가요?”
“아프다고 울고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괘씸해서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만 보면 올가 부인도 꽤 꼬장꼬장한 상사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얼른 도구를 꺼내 정리하고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시작해도 약초가 다 우러나면 오후 무렵이니 하녀들이 벌 받는 시간은 충분할 터였다.
잘 찧은 약초를 화로에 올려놓고 나서 기지개를 켜니, 병 주고 약 주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 시작은 쉬운 적이 없었다. 툰바르 산에서도 로아르저에서도 그리고 황궁에 들어갔을 때도. 늘 처음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니 이곳 카이델저에서 이 정도로 시작할 수 있는 지금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가 내 뒤를 지켜 주어서…….”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가 뜨끔하여 작업대에서 물러났다.
사실이 그랬다.
결혼 후에 그가 언제나, 그리고 완전히 내 편에 서 주지 않았다면 그 일들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었다.
문득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을 생각하면 그에게 정을 주면 안 되는데 말이다.
‘사람 미치게 하는 남자네.’
내 가슴속도 저 화로 위 냄비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 * *
새벽의 연무장.
로카르드는 검술 교관 하이넬과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세 합째, 로카르드의 검날이 하이넬의 목덜미를 파고들자 하이넬이 외쳤다.
“그만!”
로카르드는 즉시 검을 빼고 물러났다. 하이넬은 상처가 날 뻔한 목덜미를 슬쩍 문지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어찌 그리 급하십니까, 공자님.”
“마음이 급한가 봅니다.”
“어째서요?”
“…….”
로카르드가 무거운 얼굴로 벤치에 앉자 하이넬이 그를 호위하듯 곁에 섰다. 태양은 이제 막 떠올라 지상의 물체들을 빛 아래 드러내고 있었다.
“파견 나간 단원들에게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공자님께서 대단한 아내를 들이셨다고요.”
“그랬습니까.”
로카르드의 대답은 건조했다. 하이넬은 로리샤가 ‘그 선생’을 얼마나 멸시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주절거렸다.
“공작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녀에게 장부를 맡기셨어요.”
그 말을 들은 하이넬은 눈을 크게 떴다.
“호오. 공작님께서 그분의 기개에 반하신 거로군요. 쉽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
쉽지 않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로리샤는 그 사실을 몰랐다.
모르기만 하면 다행이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가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젠가 다가올 이혼을 꿈꾸며 그와 보내는 오늘에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 사실은 로카르드의 가슴속을 퍼석하게 만들었다.
그는 로리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갖고 싶었다.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면 서둘러 품에 넣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녀와 결혼했으니 그보다 더 완벽하게 성공할 수 없는 지금, 오히려 그는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로리샤 로아르는 지금껏 치열하게 싸워 살아남은 여자였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에 지독히 예민했다.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적대감을 숨겼는지.
세상이 그녀를 가혹하게 취급한 만큼, 그녀도 세상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제 우리 안으로 유인하여 가두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에 떠밀린 결혼이 그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
갑자기 그와 함께 단단한 우리 안에 던져진 로리샤는 겁에 질려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를 물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을 그의 인생에서 제거되어야 할 이물질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로카르드는 그녀에게는 인생에 나타난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백작 부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 온 취급을 생각하면, 로리샤가 자신을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로카르드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런 자들과 한 무리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그는 그녀가 잠든 얼굴에서만 드러내는 그녀의 본성, 그 말캉하고 천진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최소한 그래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그녀가 들을 것인가, 어디.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생부인 로아르 백작조차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부친으로부터 장부를 받아 온 그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는 모르는 척했지만, 그는 듣고 말았다.
‘보통 이런 걸 가짜 며느리에게 맡기나? 카이델가 보안 문제도 있는데?’
가짜 며느리라니. 세상에서 로리샤 로아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가장 확신하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세상 밖에 새로운 무엇이 더 존재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영리하고 단호한 그녀는 그렇게 자기 세계를 선 그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이 그와 함께 존재할 수 없다고 믿고서 그 부조리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이혼이라고 확신했다.
만나는 모두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희생해 주는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만은 그토록 냉정했다.
“아니…….”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쓰게 웃었다.
‘너는 어디서든 씩씩하게 잘만 살아갈 테니까, 잘난 나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 거야?’
‘남편’씩이나 된 그가 지금까지 이룬 성취는, 고작 그녀의 침대에 기어올라 잠든 그녀의 얼굴을 얼마든지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그 예쁜 고집쟁이를 어디부터 무너뜨려야 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아, 지금 로카르드는 애꿎은 하이넬을 괴롭히고 있었다.
“공자님?”
“……?”
로카르드는 하이넬의 표정으로 자신이 딴 정신을 파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놓친 말을 되물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죠.”
로카르드는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
14. 먼바다의 손님
아카데미 방학 마지막 날, 제국 남부 바다에서 스마일란 무역선이 난파되었다.
스마일란에서는 조난된 선원과 잃어버린 상품을 회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제국에 전해 왔다. 사신은 스마일란 재상의 아들이었다.
황제가 그 소규모의 사신단의 월경을 수락했을 때, 사신단은 남부 해안 영지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로 왔다.
스마일란 사신 류엘은 젊은 미남이었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호방한 골격, 짙은 구릿빛 피부는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자신감 있는 태도에 음성은 낮고 거칠어 저절로 뱃사람을 떠올리게 했지만, 몸짓은 왕족처럼 우아했다.
그는 타가르 황제를 만나 무역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양국의 관계가 좋으면 그런 일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류엘은 대신 제국의 평화를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 또한 그레이언 황자의 해적 소탕이 불러들인 사신이었다.
스마일란은 바닷길로 제국과 그리 멀지 않은 왕국이었다. 입지 조건을 살린 해상 무역이 흥해서 제국과도 상당한 규모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언과 로카르드로 인해 공해의 해적이 사라지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가엘이 스마일란에 철광석 수출에 대해 교섭을 청해 왔을 때, 스마일란 왕은 강경파의 말을 들었다. 궁지에 몰린 아가엘에게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가엘은 바가지에 더해 난파의 위험이 있는 스마일란과의 거래 대신 제국과의 협상을 택했다.
그래도 스마일란에는 큰 손해가 아니었다. 해적이 없는 공해를 통해 자유로운 해상 무역이 일어나 그들의 부는 더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가엘은 해적이라는 장막이 거둬진 공해를 통해 스마일란과의 전쟁을 가늠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