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작고 태풍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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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작고 태풍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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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작고 태풍 같은 여자
2023.07.03.
내게는 그 두 하녀를 보호해 줄 이유가 없었으니, 그들을 감싸 주기보다는 조용히 내보내 이 집안의 기강을 유지하는 편이 내게도 더 나아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올가 부인.”
올가 부인은 돌아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기했다.
카이델가 권속들의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은 하늘을 뚫고 나갈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카이델 공자는 지독히 오만하고 안하무인으로 자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사람으로 자랐을까.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신기한 남자를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여기 머무를 수 있을까.
* * *
“연무장에서 기사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렸다. 로카르드.”
카이델 공작은 새벽부터 가신들을 가혹하게 훈련한 로카르드에게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로카르드는 태연했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아버님.”
“그 아담한 아이 하나가 지나가는데 태풍이 지나는 듯 소란하구나.”
“태풍 같은 여자니까요.”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대답에 카이델 공작의 눈썹은 더 일그러졌다.
“그 아이가 욕설과 폭언으로 내 가신들을 능멸하는 동안, 너는 뭘 했느냐?”
“음…….”
로카르드는 천장을 바라보느라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고 말했다.
“뒤에 서서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카이델 공작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레이언 전하가 너를 곧잘 미친 새끼라 부르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애칭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스럽다, 로카르드.”
로카르드는 그제야 웃음을 지우고 부친을 바라보았다.
“제가 부추겼어요.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함께 그레이언 전하를 도와야 한다고요. 그녀는 제 뜻을 바로 이해하고 기꺼이 행동했습니다.”
“선택할 행동이 그뿐이었다더냐.”
“아버님, 저는 그레이언 전하 때문에 툰바르 산맥 절벽을 기어올랐습니다. 아마타족 족장의 집을 털러요. 알고 보니 저는 도둑질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더군요.”
로카르드는 로리샤 이야기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진심으로 괴로운 기색으로 말했다.
“앙카르트 저의 벽을 타고 기어올라 ‘붉은 눈물’은 훔친 것도 저입니다. 그레이언 전하는 저에게 도둑질을 시키며 쾌감을 느끼시죠.”
카이델 공작은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감쌌다.
“명예로운 카이델가의 후계자인 제가 그토록 추잡한 짓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저를 욕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소문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가진 명예가 더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로리샤는 그렇지 못하죠. 사생아라는 이유로 그녀의 모든 행동은 비판의 도마에서 절대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동안 제가 해 온 짓에 비하면 로리샤의 욕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카이델 공작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창밖을 향해 섰다. 그의 숨결에는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너를 일찍이 약혼시키지 않은 건, 네 반려를 네 손으로 선택해야 네가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듯이.”
“저는 아버님이 옳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아르 백작님도 옳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공작은 답이 없었다. 로카르드는 불길함을 느끼며 부친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공작이 물었다.
“앞으로 로리샤 로아르를 어찌할 생각이냐?”
로카르드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로리샤 카이델입니다. 아버님.”
카이델 공작은 긴 생각에 잠겼고, 로카르드는 그 자리에서 침묵했다.
마침내 공작이 명령했다.
“로리샤를 불러라.”
* * *
내가 몸단장을 마쳤을 때, 올가 부인이 나를 부르러 왔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작은 마님. 공자님도 함께 들어 계세요.”
“고마워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어제 일이 그대로 묻힐 수 있을 리 없었다. 카이델 공작님은 당연히 기사들 편이실 텐데.
‘결혼 일주일 만에 소박맞으면 제국 최단 혼인 기록일까?’
나는 헛헛한 마음으로 공작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걸음걸음, 백작저에서 사고를 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수치심이 나를 휩쌌다.
공작님이 백작님을 얼마 한심하게 여길까.
하지만 나는 최대한 꿋꿋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카이델 공작님 앞에서 뻔뻔하게 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안에 함께 있을 카이델 공자가 보기 민망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는 게 나라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지금 카이델 공작님은 명목상 내 가족이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애라고, 사실 그대로 보여 주는 것도 그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공작님이 나를 더 빨리 내보내고 싶어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처분에 따를 생각이었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로리샤입니다. 공작님.”
안으로 들었을 때 공작님은 책상 뒤 창가에 서 있었다.
“공작님.”
“앉아라, 로리샤.”
내가 들어가자 카이델 공자가 일어나 내게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긴장하여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가 내 기사들에게 욕을 퍼부었다지?”
“딸꾹!”
맹세코 그런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나는 공작님의 직설적인 질문에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잘못했습니다. 공작님! 끕!”
“쯧.”
공작님은 혀를 찼고, 나는 필사적인 힘을 쏟아 딸꾹질을 멈추었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귓가에다 조그맣게 경고했다.
“카이델은 함부로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로리샤.”
‘하지만!’
나는 온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지만 카이델 공자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여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저는 제 행동이 자랑스럽지 않은걸요!”
그러자 카이델 공작님이 나를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자랑스럽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자인하는 것이냐?”
나는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네. 공작님. 제 행동은 부적절했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변명이라도 하는 것이 나에 대한 예의일 텐데.”
나는 뜨끔하여 등을 바로 세우고 말했다.
“데릭슨 경은 정당한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당한 싸움?”
“그는 보는 눈이 없는 데서 자신의 덩치로 제게 겁주려 했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머릿수를 늘려 저와 공자님까지 압박하려 했습니다. 그런 비겁한 자에게는 때로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응이…….”
나는 아차 싶어 공작님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공자님의 가신을 모욕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음을…….”
하지만 공작님은 손을 가볍게 저었다.
“계속해.”
“나도 너만큼 더럽게 싸울 줄 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기선 제압이 중요한 싸움에서는요.”
“어떤 가문의 영애도 그런 품위 없는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았을 거다.”
“바로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제가 스스로를 고매한 카이델 부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에게 이르겠어요!’ 소리치는 정도였을 텐데…….”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더는 공자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바쁜 공자님의 등 뒤에 매번 숨을 수는 없으니까요.”
“…….”
“그 자리에서 악당은 저 같은 아내를 가문에 들인 공자님이 아니라 저여야 했어요. 저로 인해 공자님이 그들과 싸우시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말하다 보니 괜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반쯤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내 피의 반은 내게 지나치게 고귀한 게 아닌가 싶었다.
욱할 때는 거침없이 욕설이든 막말이든 쏟아 놓지만, 끝까지 뻔뻔하게 굴지도 못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공작님은 한참 말이 없었다. 카이델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슬슬 이 방의 공기에 숨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 공작님이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를 눈짓하며 말했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로리샤.”
“……네?”
“공작 부인이 부재하니 카이델가의 살림은 네 몫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올가 부인에게 묻거라.”
“…….”
나는 귓구멍을 막 긁고 싶은 걸 참느라 의자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지금 공작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시는 거야!’
사색이 되어 돌아보니 카이델 공자가 빙긋, 그 특유의 음모가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말이 뭐가 있는가. 당장 쫓겨나서 로아르 백작님의 명예에 치명타를 날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나는 바로 일어나 서류를 싹 긁어 안고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길로 내 방으로 달리다시피 돌아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으아아!”
내 기세가 너무 거셌는지, 서류철이 테이블 위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몇 권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나는 얼른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서류철을 집어 살펴보았다.
“난 몰라!”
그것은 카이델 저택 관리 장부였다.
“보통 이런 걸 가짜 며느리에게 맡기나? 카이델가 보안 문제도 있는데?”
내가 어이없이 중얼거릴 때 카이델 공자가 들어왔다.
“뭐라고요?”
“아니, 아니에요!”
그는 내가 보던 서류철을 잠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건 나도 잘 모르니까 올가 부인에게 물어봐요.”
나는 다른 서류철을 집어 열었다가 달달 떨었다.
“기사단 운영도 제가 해요?”
내 목소리는 의도치 않게 찍 갈라졌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기사단을 먹이고 입히는 건 원래 안주인 몫이긴 한데……. 아버님이 그것까지 맡기셨어요? 저런.”
그의 ‘저런’은 내가 살면서 들은 중 가장 가식적이고 건성인 ‘저런’이었다.
“저런? 지금 ‘저런’이라고 하셨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 카이델 공자 앞으로 갔다. 내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