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보란 듯 함께 자요 (122/155)


120화. 보란 듯 함께 자요
2023.07.02.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그가 내 이불을 끝을 잡아 벗기더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불을 독차지할 거예요?”

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그는 내 몸에서 이불을 벗겨 반듯하게 펴서 덮더니 나를 등지고 잠을 청했다.

“하……!”

나는 허탈한 가운데 남은 반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덮고 드러누웠다. 나에게 더 싸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우리가 결혼한 뒤 처음으로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까지 소파에서 자던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침대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면 내가 소파로 가는 수밖에.’

내가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려 몸을 꼼지락대기 시작할 때 그가 말했다.

“그냥 자요. 하녀들 보란 듯이 자요.”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씩씩대면서도 꼼짝 못 하고 그를 등지고 누웠다.

‘……그냥 죽일까?’

* * *

내가 잠에서 깬 건 카이델 공자가 새벽에 연무장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내 입으로 새벽에 일어난다고 말해 놓고!’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새벽에 일어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는 데 절망하며,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꺼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부탁을 해도 절대 나를 깨워 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올가 부인이나 하녀에게 부탁하면 그가 소파에서 자고 나간 흔적을 들킬 수밖에 없으니 그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어제 일 때문에 심란해서인지 오늘은 그의 인기척에 깼는데, 하필 고약한 타이밍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그의 상체를 고스란히 보고 만 것이다.

‘저렇게, 저럴 필요까지 있나? 얼굴만 잘생기지 저 몸은 어떨 건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겨우 물었다.

“연무장에 다녀오셨어요?”

“깨워서 미안해요. 더 자요.”

“경들의 분위기는 어때요?”

“좋아요. 몹시.”

아직 어슴푸레한 시각에, 그는 한낮의 태양처럼 웃었다.

나는 그 모습에 불길해져서 물었다.

“막……. 그러셨어요?”

“네. 어제 그놈들은 따로 모아 죽도록 굴려 줬습니다. 당분간 그러려고요. 당신 덕에 아주 고분고분해졌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해적을 소탕할 때 당신의 멀미약을 먹었던 기사들이 돌아와 당신을 기억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어떤 안주인도 함께 작전에 나간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의외의 상황에 깜짝 놀랐지만 그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설마 그가 공해에 함께 나갔던 기사들을 카이델저로 불러들인 걸까.

“로리샤. 잘될 거예요. 씻고 올 테니 더 자요.”

“…….”

카이델 공자가 나간 후, 나는 그대로 이불을 쓰고 누워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 민망해서 일어나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을 감아도 잠이 드는 대신 정신이 자꾸만 맑아지며 어제저녁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이불 속에서 수치심에 몸부림쳤다. 로카르드 공자는 어제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방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키스한 걸 보면 싫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남자들이 원래 그런가……?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매 순간 혼란스러운데, 그는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심술이 났다.

그때 내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누군가 방 안을 살피는 작은 정적, 그리고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발소리.

‘쉴 틈을 안 주네.’

나는 눈을 꼭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 몰래 작은 마님의 방에 들어오려는 간 큰 자가 누군지, 얼굴을 보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숨죽인 발소리는 방 안을 곧장 가로질러 장식장으로 향했다.

작은 달그락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다시 뒤돌아 문으로 향할 때,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가에 선 뜻밖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젊은 하녀 세라가 문을 연 채로 붙잡고서 공범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는 내가 일어나자 너무 놀라 겨우 조그맣게 꺅 소리를 냈다.

내가 상한 차를 넣어 둔 상자를 훔쳐 가던 네리사도 그 소리에 놀라 상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나는 세라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문 닫고 들어와.”

“자, 작은 마님,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 늦잠을 안 잔 내가 문제일까, 아니면 내 방에서 도둑질을 한 하녀가 문제일까?”

네리사는 벌컥 소리쳤다.

“오해세요!”

“뭐 해!”

내가 문에다 소리치자 세라가 냉큼 들어와 네리사 곁에 섰다. 둘은 불안한 시선을 맞추다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들을 빤히 보며 물었다.

“그걸 왜 훔치려고 하는 거야?”

네리사는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훔치다니요! 주무시는 동안 청소를 하려던 것이었어요. 카이델 저에서는 이 시각에는 모두 깨어 자기 일을 하니까요.”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내 늦잠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세라도 끼어들었다.

“네, 작은 마님이 아직 주무시는지 몰랐어요!”

나는 그걸 보며 마음이 차가워졌다.

저들은 정말 저런 말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정도로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나는 내 목에 걸고 있던 상자 열쇠를 세라에게 던졌다.

“열어.”

“……?”

“뭐 하니?”

그녀는 네리사의 눈치를 보다가 상자를 열었다.

“어휴!”

며칠 사이 차는 상해서 악취를 냈다. 두 사람은 상자를 열자마자 코를 잡았다.

“그 차를 누가 탔니?”

“…….”

“…….”

“물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입을 꽉 다물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최대한 냉혹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황궁에서 시녀로 일했던 건 알고 있니?”

“…….”

“…….”

“황궁의 매질은 사람에게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단다.”

하지만 네리사는 입을 더 앙다물었다.

별수 없었다. 기왕에 생긴 남편을 써먹는 수밖에.

“공자님께 매를 구해달라고 말씀드려야겠네.”

내가 중얼거리자 세라가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다.

“차는 제가 탔습니다. 하지만 네리사 언니의 명령이었어요!”

“가만히 있어!”

네리사는 세라에게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고, 나는 차분하게 물었다.

“거기 뭘 탔어?”

“상한 케라하 잎을 넣었습니다. 네리사 언니가 넣으라고 했어요. 절대 죽지는 않는다고 했어요!”

“아아. 그랬구나.”

“너, 입 닥치지 못해!”

까딱하면 둘이서 머리를 뜯고 싸울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걸 왜 소중하게 보관했을 것 같아? 바로 너희 두 바보에게 주려고 그런 거야.”

이것은 간단한 덫이었다. 범인을 내가 찾아갈 필요도 없다. 제 발이 저려서 찾아오게 기다리면 그만이다.

범인이 누구든 집안사람인데, 자기 범행의 증거가 저렇게 보란 듯이 전시된 걸 매일 보면서 조바심을 견디기 힘들 테니까.

“선택해. 그걸 둘이 나눠 마시고 이 방에서 나가든지, 아니면 내가 이 일을 공개적으로 처분하기를 기다리든지.”

두 하녀는 울먹거리며 찻잔을 꺼내 들었다.

카이델 공자가 어제 대놓고 내 편을 들지 않았다면, 네리사는 절대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택의 공기는 달랐다.

그들은 울면서 차를 나눠 마시더니, 바로 구역질 소리를 냈다.

“다 마셨니?”

“끄흑, 작은 마님!”

“너희는 못 먹을 걸 왜 내게는 먹이려고 했어?”

네리사는 구역질을 하며 대답했다.

“아무나 카이델가의 마님이 되는 것이 아닌데……. 우욱.”

“너희는 정말 똘똘 뭉쳐서 충성스럽구나. 이만 나가 봐.”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그들이 뛰어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종을 울려 올가 부인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올가 부인, 지금 바로 이걸 준비해 주세요. 약 조제실로 쓸 빈방이 있을까요?”

“네. 빈방과 재료는 오전 중 준비가 가능합니다만, 이것은 무엇에 쓰는 건가요?”

“하녀 둘이 배앓이를 심하게 할 거예요. 약은 제가 만들 테니 의사는 안 불러도 돼요.”

“작은 마님. 무슨 일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올가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도 꼭 알아야겠다는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가 부인은 왜 저를 미워하지 않으세요?”

“작은 마님?”

“카이델가의 기사며 하녀들까지 제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저를 미워하고 음해하는데, 올가 부인은 왜 안 그래요?”

“음해라니요! 제가 이 집안을 돌보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그 하녀가 누구입니까?”

올가 부인은 정말로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렸다.

올가 부인은 결국 대답했다.

“저는 카이델 공자님의 유모였습니다. 작은 마님.”

“몰랐어요.”

“그리고 저는 공자님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 말이 참 낯설게 들렸다.

“공작님이 길지 못한 결혼 생활 동안 큰 마님과 행복하셨듯, 공자님도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공자님께서는 제가 아는 가장 영특한 분이세요. 저는 그분의 선택을 믿습니다.”

그녀가 나의 행복을 바라 준 것도 아닌데, 나는 올가 부인의 말에서 크게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아마 카이델 공자가 이 말을 들었더라도 나처럼 느꼈을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선택이 아닌걸요.”

“…….”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하는 올가 부인을 내버려 두고, 직접 이불을 정리하며 두 하녀가 한 짓에 대해 말했다.

“복통만으로도 벌은 충분할 테니 부인은 모르는 척해 주세요.”

그러나 올가 부인은 뜻밖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불가합니다.”

“…….”

“치료가 끝나는 대로 두 사람은 카이델가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주인의 몸에 손을 대는 하녀라니, 이런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작고한 공작 부인이셨다면 저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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