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황자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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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황자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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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황자의 요구
2023.06.29.
“결혼 선물이야, 로리샤.”
“오, 이렇게 감사할 데가!”
나는 카이델 공자의 대답이 너무 재빨랐다고 생각했지만, 황녀 전하가 이렇게 불러서 선물을 챙겨 주는 걸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 맞았다.
그런데 밀리오라 전하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을 하더니 상자를 정확히 우리 둘의 가운데 놓았다.
나는 카이델 공자가 상자를 열기를 기다렸고, 카이델 공자는 지그시 웃으며 내가 그걸 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밀리오라 전하는 우리의 그런 눈빛 교환을 음미하고 있었다.
‘진짜 변태는 여기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카이델 공자가 말했다.
“부인이 열어 보도록 해요. 밀리오라 전하께서 특별히 챙겨 주신 것이니까.”
와…….
나는 의도치 않게 욱할 뻔했다.
부인이라니! 결혼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게다가 그게 그렇게까지 느끼하게 발음할 단어냐고!
황녀 전하는 까르르 웃으며 넘어갔다.
“뭐 해, 로리샤. ‘부인’이 열어 보라잖아.”
“……!”
나는 두 사람이 다 못마땅하여 뚱한 얼굴로 상자를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상자를 연 후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 세트의 외출용 아기 옷이었다. 앙증맞고 보드라운 옷의 가슴에는 사자 모양이 수놓여 있었다.
“전하……?”
“아끼는 귀족이 임신하면 황가에서 아기 옷을 내리기도 했대. 사자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고 큰 아기는 반드시 무병장수한다고 했어.”
“전하아!”
내 커다란 부름은 듣기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애매한 톤이었다.
너무 감동하여 ‘전하!’ 하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걸 저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전하!’ 하는 것 같기도 한. 사실 내 마음이 그렇게 두 동강 나 있었다.
그때 불쑥, 카이델 공자가 내 어깨를 감싸 자기에게 당기며 말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 배려 깊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로카르드 공자.”
황녀 전하는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내가 트집 잡을 부분은 전혀 없다. 그녀의 순수한 호의에 순수하게 감사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웃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전하. 정말 영광스러운 선물이에요.”
나는 옷을 다시 가지런하게 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물었다.
“새 시녀는 전하를 잘 모시고 있습니까?”
“하! 공자도 들었어요?”
황녀 전하의 얼굴은 순식간에 썩어 버려서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말했다.
“너도 들었지? 칼린 앙카르트가 내 시녀로 들어왔다고.”
“네. 전하.”
“얼마나 대단한 계집앤지, 황궁에서 턱을 쳐들고 걸어 다니는 그 꼴 하며……. 하지만 이제는 찍소리도 못하니까 걱정 말아. 내가 그런 애들 다루는 법은 제대로 알거든.”
“전하, 양장점에서의 일은 이만 화 푸세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황녀 전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애는 제가 잘못한 걸 지금도 몰라. 그런데 내가 왜 화를 푸니?”
“아…….”
“제 몸단장해 줄 하녀나 찾고, 음식 투정이나 하고. 흥. 그 계집앤 제가 오를 오라버니의 첩자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야. 로카르드 공자, 그 애는 아카데미에서도 그래요?”
나는 황녀 전하의 질문에 상당히 당황했지만, 그는 역시 유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생도의 생활은 잘 모릅니다. 제게는 아내뿐이거든요.”
“어머, 공자도 참! 호호호.”
그녀는 금세 까르르 웃었다.
‘황녀 전하는 그가 말만 하면 웃긴 걸까?’
나는 익숙한 피로 속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밀리오라 전하는 오늘 실컷 웃었다는 듯이 말했다.
“두 사람 다 바쁠 텐데, 오늘은 이만 가 봐. 대신 자주 찾아오고. 로리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꼭 외출하는 엄마를 보는 아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녀와 철석같이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나를 몹시 특별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정 줄 사람이 정말로 없었던 거다. 괜히 가슴이 아팠다.
나는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하가 오지 말라고 하셔도 놀러 올래요. 저는 황궁 식사가 맛있거든요.”
“어머, 너!”
그녀는 카이델 공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넌 카이델 부인이야. 그렇게 체신 없이 말하면 안 돼.”
“죄송합니다. 전하.”
그때 카이델 공자가 끼어들었다.
“로리샤. 밀리오라 전하를 자주 찾아뵙는 게 좋겠어요. 전하께서 당신에게 좋은 충고를 많이 주시는 듯하니까요.”
“로카르드 공자도 참. 어쩜 말을 늘 저렇게 예쁘게 하는지. 너도 남편을 좀 배워, 로리샤.”
아아. 피곤하다.
나는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였지만 얌전히 네 대답하고 일어났다.
카이델 공자는 황녀 전하의 선물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와 있을 때 손에 물건을 든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의 응접실을 나오자 그가 말했다.
“그레이언 전하가 기다리세요.”
“론드 경을 만나러 가려 했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 있을게요.”
“고마워요, 공자님.”
나는 얼른 후원으로 내려갔다.
론드 경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고, 나는 촐랑대며 달려갔다.
“론드 경! 잘 계셨어요? 저 왔어요.”
“카이델 부인.”
“…….”
나는 ‘카이델 부인’ 한 마디에 머리가 싹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 그가 미워하는 옛 지휘관, 로카르드 카이델의 아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늘 앉던 자리에 앉았고, 그도 아차 싶은지 내 눈치를 흘끔 보며 앉았다.
“결혼식은 잘 치르셨습니까?”
“네. 초대 못 해서 죄송해요. 상황이 그래서 양쪽 다 외부 손님 없이 치렀거든요.”
“이해합니다.”
나는 론드 경의 얼굴을 문득 다시 보았다. 그는 전처럼 산 같은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에 없던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문득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한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 안 한 사람은 경이 처음이에요.”
“그랬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카이델 부인.”
“에이. 마음에도 없으시면서.”
내가 웃으며 놀리자 그는 멋쩍게 말했다.
“그 자리가 녹록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
“검 잡는 사내들은 짐승의 무리와도 같소. 더구나 카이델가 권속들은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시녀님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그렇긴 하더라고요.”
피로연에서의 일도 그렇고, 오늘 아침만 해도 가신이 내게 들으란 듯이 막말을 했다. 그들에게 나는 돌연 날아든 이물질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들을 곁에서 보아 온 론드 경은 그걸 알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성급한 축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서 론드 경의 동정 어린 시선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의외로 여러 명의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녀 전하도 그렇고, 론드 경도. 또 이따가 찾아갈 로이만 실장님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멸시해도, 최소한 나를 알아온 이 사람들은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다. 그 사실만으로도 힘이 났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죠. 제가 또 닥치면 해요.”
“압니다. 힘내시오, 시녀님.”
나는 론드 경 같은 좋은 사람이 카이델 공자와 사이가 나빠진 것이 참 속상했다. 하지만 바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세상에 카이델 공자를 무턱대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나도 덜 억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가지고 온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결혼식 때 주문한 다과가 너무 맛있어서 좀 더 주문했어요. 드세요.”
“황녀 전하께서 좋아하실 거요.”
“그러니 같이 드시라고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또 뵈어요, 론드 경!”
나는 론드 경이 거절하기 전에 얼른 2황자궁으로 향했다. 다시 천천히 긴장이 찾아왔다.
* * *
‘기왕에 생긴 남편, 잘 써먹자. 이번엔 쓸데없이 쫄지 말자, 로리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이델 공자가 내 남편이라는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레이언 전하 앞에서 기댈 사람이 그뿐이라는 생각하자 금방 태도를 바꿀 수 있었다.
얄팍한 태세 전환이 실망스러웠지만, 내가 그렇게 생긴 걸 어쩔 수는 없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푹 쉰 다음 2황자궁 하인에게 내가 누군지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하인은 나를 보자마자 문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이델 부인.”
내 앞에서 저절로 열리는 문이라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내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니 예의 발코니에서 그레이언 전하와 카이델 공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어서 와. 카이델 부인.”
“타가르의 작은 태양…….”
“됐어. 앉아. 이제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걸. 안 그런가, 로카르드?”
“로리샤는 제 가족이죠, 전하.”
카이델 공자가 천진한 얼굴로 대답하자 그레이언 전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카이델 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레이언 전하를 저렇게 겁내지 않을 수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로리샤, 그레이언 전하께도 당신의 뜻을 전했어요. 앞으로는 우리 부부가 함께 전하를 모시겠다고.”
“네. 공자님.”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리 부부’라니! 그는 꼭 나와 결혼한 지 십 년쯤 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그의 말을 아예 못 들은 척 내게 말했다.
“밀리오라는 뭐라던가?”
“결혼을 축하해 주시며 종종 입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종종 입궁해. 밀리오라는 몰라도 나는 보고 가야 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