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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황녀의 선물 (118/155)


116화. 황녀의 선물
2023.06.28.


나는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초대로 입궁하기 전에 공작님에게 외출 인사를 하러 갔다. 카이델 공자는 황궁에서 만나기로 했다.

결혼한 지 며칠째, 우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사라지고, 밤에 돌아와 나를 놀려 먹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니 얼마나 바쁜지, 도와줄 진짜 아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공작님께 외출 허락을 받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나와 마주 오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봤겠지만 누군지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 나는 간단히 말을 걸어야 하나, 그쪽에서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모른 척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격렬히 고민했다.

그런데 내게로 가까워진 그는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얼굴에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교차할 때, 그는 어깨로 내 어깨를 일부러 툭 치고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낮은 음성이 귓구멍을 칼처럼 베고 들어왔다.

“공작가의 명예를 시궁창에 처박고도 제집인 양 잘도 돌아다니는군.”

아마 어제라면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카이델가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미울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도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싫든 좋든, 카이델 공자의 위신을 함께 책임져야 했다.

나는 배에 힘을 꽉 주고 돌아섰다.

“이 빌어먹을,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뚫린 입이라고 다…….”

그 남자는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하지만 덩치 차이가 오죽한가. 나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승부를 끝내야만 했다.

나는 오랜만에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욕설의 폭풍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는 공해에서 만났던 그 선원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벽을 짚고 헐떡이는 그 남자를 내버려 두고 복도를 유유히 떠났다.

* * *

나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일에 보았던 카이델가의 검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불 뿜는 독수리 문장이 달린 새카맣고 윤이 나는 마차 안에서 수도 거리를 내다보니 세상의 빛깔마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유부녀의 기분인 거지?’

황궁에 도착하니 마주치는 하인들이 나를 알아보고 묵례했다. 어쩐지 그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나도 미소로 답했다.

하지만 황녀궁 응접실 앞에서 잔뜩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를 본 에리아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그녀를 덥석 안았다.

“시녀님! 아니, 카이델 부인. 결혼을 축하드려요.”

“에리아!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저야 잘 지내죠. 어머……. 카이델 부인,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난 몰라…….”

‘음……. 구체적으로 뭘 모르는데?’

나는 에리아가 저 혼자 얼굴이 발개져서 몸을 꼬는 걸 보며 몹시 찜찜해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하던 상황에서 뭐라고 하기가 그래서 가져간 다과 상자를 내밀었다.

“맛있더라. 두고 먹어.”

“어머, 감사해요, 시녀님!”

“에이, 뭘. 이걸 가지고.”

“고할까요?”

“응.”

나는 긴장한 채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 안에 밀리오라 전하가 계셔.’

내가 갑자기 사임해야 한다고 했을 때, 황녀 전하는 흥분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때 에리아가 말리지 않았다면 난 고급 레이스 베일 대신 두건을 쓰고 결혼식을 올려야 했을 거다. 남은 머리털이 없었을 테니까.

나는 황녀 전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씩씩하게 들어가서 최대한 환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

“로리샤 로아르가 타가르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잘 계셨어요?”

밀리오라 전하는 평소와 똑같은 비스듬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예를 올렸음에도 새초롬한 눈매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못마땅하게 말했다.

“누구라고? 넌 내 시녀 출신이라는 애가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해?”

이번에는 내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내 목구멍에 행주를 쑤셔 넣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자 황녀 전하가 스윽, 뱀처럼 머리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명 내 당황을 즐기고 있었다.

말을 하는데 입술이 달달 떨렸다.

“로리샤 카, 이델이 황녀 전하를……. 전하아!”

“호호호! 알았어. 알았어. 얼른 앉아, 로리샤!”

황녀 전하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자기 옆으로 끌어앉혔다. 그리고 또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거 전에 입었던 옷 아니니? 이걸 또 입었어?”

“아직 새것이라…….”

“얘. 넌 이제 카이델 부인이야. 남편 체면도 생각해야지.”

나는 카이델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심장이 털컥거렸다.

나는 황녀 전하가 오늘 나를 단단히 놀려 먹기로 마음먹은 걸 깨닫고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전하도 미혼이시면서 그런 걸 어떻게 아시고…….”

“이게, 이제 내 시녀 아니라고 기어오르네?”

“어머, 설마요, 전하! 제가 전하에게 어떻게 그래요.”

내가 헤실거리며 웃자 황녀 전하가 핏 하고 웃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은근히 물었다.

“첫날밤은 어땠니……? 결혼하니까 좋아?”

술. 음해. 술. 각방.

내가 내 결혼식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어느 하나 남 앞에서 말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몹시 소심하게 말했다.

“기억이 안 나요, 전하.”

그러자 밀리오라 전하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헉……. 그 정도…… 야?”

“네.”

취해서 완전히 뻗어 버렸거든요.

“어머!”

황녀 전하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손부채를 쳤다.

나는 어쩐지 우리 대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웃으며 다른 걸 물었다.

“론드 경은 잘 계세요?”

“응. 요즘 몸 상태가 퍽 좋대. 내가 기분이 안 좋다고 하니까 그가 황궁 밖으로 외출이라도 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 나는 그동안 외출하고 싶어도 그의 상태가 악화될까 봐 말도 못 하고 꾹 참았는데, 아무튼 잘됐지 뭐야.”

그녀가 상대를 고려해 무엇을 참았다니 대견한 일이었다.

“그새 론드 경과 부쩍 친해지셨나 봐요. 전하.”

“어머, 얘는! 친해지긴 뭘…….”

나는 반가워서 한 말인데, 황녀 전하는 어쩐지 발끈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대화도 길게 이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제가 마음이 좀 놓여요. 제가 별로 한 일은 없지만, 그래도 갑자기 떠나서 많이 죄송했거든요. 전하.”

“죄송하긴……. 네가 뭘.”

나는 황녀 전하가 다시 발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한껏 꺾어 나를 외면하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는 눈치도 없이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황녀 전하가 버럭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한테 도둑 누명 씌운 것도 그렇고 또……. 아무튼 그래서 미안하다고! 됐어? 들으니까 속이 시원해?”

이번에는 내가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미샤와도 사이가 좋아졌는데 황녀 전하까지 옛날 일을 사과하다니. 내가 죽을 때가 되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조금도 싫지 않았다. 간질거리고 불편하지만, 황녀 전하와 미샤가 전보다 더 행복해 보여서 나도 행복했다.

내가 배시시 웃자 황녀 전하가 흘끔 내 눈치를 보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살짝 정신을 놓았던 게 틀림없다.

나는 내 눈치를 보는 밀리오라 전하가 순간 안쓰럽고 귀엽기도 해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황족의 몸에는 허락 없이 손댈 수 없는데 말이다.

“저는 다 잊은 걸요, 전하! 전하도 제가 곁에 없어도 행복해지셔야 해요. 아셨죠?”

놀라서 굳었던 황녀 전하의 몸이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내 포옹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금 기분을 내가 다 알 수 있을 리 없지만,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일은 사과하는 사람에게도 퍽 근사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사과하기 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 말이다.

나도 카이델 공자에게 편지 일을 사과한 후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 황녀 전하가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얘. 갑갑해.”

나는 그제야 황녀 전하를 놓고 씨익 웃었다. 황녀 전하도 웃으며 내 눈을 피했다.

“그런데 네 남편은 안 오니?”

“네? 누구 말씀……. 아……. 곧 오기로 했어요.”

내가 뒤늦게 카이델 공자의 존재를 떠올리고 버벅거리자 황녀 전하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카이델 공작님 앞에서 그러지 말아. 그분이 겉으로는 유해 보여도 되게 엄하셔.”

“주, 주의할게요. 아무튼, 카이델 공자님은 바로 온다고 했는데 늦는 모양이네요.”

“‘제 남편은’이라고 해야지. 호호호!”

“전하아.”

그때 에리아가 카이델 공자의 도착을 알렸다.

그는 황녀 전하 앞에서 멋있는 모습으로 예를 올렸다.

“어머, 로카르드 공자! 얼굴 훤해진 것 좀 봐!”

나는 황녀 전하가 나보다 그를 훨씬 더 요란하게 반기는 걸 보며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나를 향해 뻐기듯 웃었다.

“내 얼굴이 더 훤해졌대요.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 충실한 남자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로리샤.”

“어머, 로카르드 공자가 사랑꾼이 다 되었네? 호호호!”

나는 오늘 황녀 전하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참 많이 듣고 있었다.

황녀 전하는 내 꼴을 구경하는 게 재미나 그런다지만, 한술 더 뜨는 로카르드 카이델 저 인간은 뭐냐고.

두 사람은 심드렁한 나를 가운데 내버려 두고 즐겁게 대화를 시작했다. 흡사 예전 티 파티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나도 그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면서 싫지 않았다.

황녀 전하는 테이블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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