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신혼생활 수칙(1) (117/155)


115화. 신혼생활 수칙(1)
2023.06.27.


나는 그가 장난을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하지 않던 장난이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런 어른의 장난을 말이다…….

나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그의 가슴을 확 밀쳐 내고 창가로 갔다. 달아오른 내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불쑥 말했다.

“나빠요!”

“알아요.”

“씨…….”

나는 저도 모르게 거친 소리를 냈지만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입술이 간질간질하고 몸에 열이 오르는지.

나는 문득 떠올라 쭈뼛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 훈련 대장님 어깨를 탈골 시킨 것, 일부러 그러셨어요?”

“네. 아예 뽑아 놓으려다가 참았습니다.”

“헉. 공자님!”

카이델 공자는 소파 등받이에 양팔을 펼쳐 걸친 채 다리를 꼰 거만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인데 눈에는 화르륵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내 가신입니다. 가신 중에서도 서열이 낮아요. 그런 자의 아내에게 당한다? 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래요?”

“하지만…….”

“로리샤 카이델 부인.”

“헉.”

잔뜩 낮게 깐 그의 미성으로 그렇게 불리니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당신이 우리 결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건, 그건 지금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제국인들의 눈에 합법적인 부부인 겁니다. 그러니 그에 걸맞게 행동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제 명예와 권위를 손상하는 결과를 낳게 될 테니까.”

“……!”

“그게 지금까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제게 피해 주는 것.”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내가 공동체라는 개념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고, 나는 그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기세에 완전히 얼어붙어 더듬거렸다.

“그, 그런 생각은 못 했어요. 공자님.”

“잘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면?”

“고쳐야 해요.”

나는 어느 틈에 기합이 빳빳하게 들어 대답하고 있었다.

이것이 카이델식 훈육인가?

그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반드시 고쳐요. 어디 가서 지지도 말고, 숙이지도 말란 말입니다. 지금 당신의 역할은 제국의 첫 번째 사자의 며느리고, 카이델가의 작은 안주인임을 명심해요.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진 그 태도를 유지하도록 해요.”

“네. 이해했어요!”

평생 그러라는 것도 아니고, 됐다고 할 때까지면야…….

“못 이기는 놈 있으면 남편한테 바로 이르고.”

남편, 남편이라니!

나는 사지가 바르르 떨리는 기분을 겨우 삼키고 되물었다.

“일러…… 요?”

그건 좀 내 성질에 안 맞는데…….

“당신 혼자 끙끙대고 있으면 그놈이 날 속으로 비웃으며 우습게 보겠죠? 내가 등 뒤에서 비웃음당하는 것도 모르고 다니게 만들 겁니까?”

“이를게요!”

“내가 자리를 비우고 없으면 올가 부인에게 일러요.”

“아, 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쐐기를 박았다.

“당신도 알고 있겠죠? 나는 지고는 못 삽니다. 당하고는 더더욱.”

“알죠! 제가 그 편지 때문에 공자님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잘 알죠.”

그러자 그의 눈썹이 꿈틀, 한쪽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하던 말을 이었다.

“그 말, 진담이었습니까? 나를 도와 그레이언 전하를 제위에 올리겠다던 말.”

“물론이죠. 그게 우리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그리고 그레이언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는 편이 밀리오라 전하께도 훨씬 나으니까요.”

그런데 그의 목구멍에서 무슨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는 갑자기 손끝으로 내 턱을 붙잡아 쳐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 못 합니다. 로리샤 카이델 부인.”

“예. 예?”

“그러니 당신만 내게 약속해요. 완전한 내 편이 되어서 나를 돕겠다고.”

“읍……!”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는가 싶더니 그가 입술을 덮쳤다.

그는 버둥대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실컷……. 실컷 그랬다.

한참 후, 그는 흐트러진 호흡으로 말했다.

“인장을 찍었으니 계약은 성립한 겁니다. 그럼, 이만 자요.”

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 떠도는 기이한 열기에 홀려 대꾸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내가 새빨갛게 된 얼굴로 멍하니 선 사이, 그는 재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오를 전하가 칼린 앙카르트를 황녀궁 시녀로 삼으셨습니다. 밀리오라 전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따귀 넉 대를 연이어 올려붙이셨다더군요. 그리고 바로 근신에 처하셨답니다.”

“예……?”

“타가르는 악의를 잊지 않아요. 로리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황녀 전하께서 우리에게 초대장을…….”

“물론 가야죠.”

카이델 공자는 방을 나가면서 나를 향해 찡긋 윙크했다.

“잠시 기사단 회의에 다녀올게요. 우리, 이러니 꼭 부부 같군요. 로리샤.”

* * *

허니문 기간에도 카이델 공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 일 없이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모두 우울한 일뿐이었다. 특히 카이델 공자를 생각하며 침울해지기만 했다.

‘이러지 말자, 로리샤.’

나는 내 뺨을 찹찹 때리며 하녀를 불러 차를 달라고 했다.

내 차를 가져온 건 중년의 하녀 네리사였다.

“고마워. 향이……, 읍!”

한 모금 머금은 차는 껍질이 벗겨지나 싶을 정도로 혀를 아리게 했다. 상한 차 가루를 썼든지 이상한 걸 집어넣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네리사는 태연한 얼굴로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직감했다.

어김없이 시작된 것이다. 빌어먹을.

나는 온 힘을 끌어내 웃으며 물었다.

“이 차, 자네가 탔어?”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렇군. 자네, 지금 가서 자물쇠가 달린 상자를 하나 가져와. 크기는 이만하면 돼.”

“뭐 하시려고요?”

그녀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최대한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그걸 자네에게 설명해야 하나?”

“…….”

네리사는 대답도 없이 나가더니 차가 다 식은 후에야 상자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걸 받아 그 안에 내 찻잔을 집어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이제 가 봐.”

“저걸 왜…….”

대답 대신 그녀를 오만하게 쏘아보자, 네리사는 못이기는 척 나가 버렸다.

사람 깔보는 태도라면 내게 시범을 보여 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덫을 친 나는 열쇠를 품에 잘 챙겨 넣었다.

* * *

칼린은 궁인들이 먹는 식사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 뜬 시간을 전부 공부에 쓰고 있었으므로, 늘 입맛이 없었고 체력이 약했다.

그래서 칼린은 앙카르트 저에서 전속 요리사를 두고 있었는데, 황궁 사용인을 위한 음식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황궁의 모든 것이 칼린의 기본적인 의식주의 조건에 턱없이 모자랐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후, 에리아가 그녀에게 찾아와 인상을 썼다.

“시녀님, 말씀드렸지만 방에서 혼자 식사하시면 그릇은 직접 내놓으셔야 해요.”

“당연히 들었지. 널 오게 하려고 안 내놓은 거야.”

칼린은 에리아의 손에 자잘한 보석이 박힌 머리핀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내 편지를 궁밖에 전해 줘. 대가는 이걸로 충분할 거야.”

“…….”

에리아는 칼린이 준 편지와 머리핀을 들고 곧장 밀리오라에게 갔다.

밀리오라는 편지를 뜯어서 읽더니, 머리핀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에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건 값나가는 거니까 너 가져.”

“아닙니다! 황녀 전하. 싫어요.”

에리아가 질색을 하자 밀리오라가 웃었다.

“편지는 원하는 대로 전해 줘.”

“네?”

“어찌 되나 한번 보게.”

“네, 황녀 전하.”

에리아는 머리를 갸웃하며 나갔다.

* * *

다음 날, 밀리오라 황녀 앞으로 앙카르트 자작의 선물이 배달되었다.

얼음처럼 투명한 작은 보석이 잔뜩 박힌 머리띠였다.

그녀는 그걸 이리저리 돌려보며 에리아에게 말했다.

“와. 정말 예쁘다. 그렇지? 진짜 비싸겠어.”

“네. 전하.”

“이거 앙카르트 자작이 바치는 뇌물이야. 제 딸을 잘 봐 달라고.”

에리아도 그 머리띠의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더 놀란 것은 황녀의 다음 말이었다.

황녀는 머리띠를 낀 채로 웃으며 말했다.

“시녀장에게 가서 칼린에게 매를 치라고 해. 근신 중인 시녀가 궁 밖으로 몰래 연락을 해?”

밀리오라는 머리띠를 빼서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 잠시 아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으로 부러뜨렸다. 거기 박힌 보석 몇 개가 바닥에 뿌려졌다.

“이건 걔가 매 다 맞고 오면 돌려줘. 새 시녀가 올 때마다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인지! 우리 로리샤는 이런 건방진 짓 안 했는데.”

에리아는 거의 평생을 황궁에서 지냈음에도 황족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때로는 종이처럼 얄팍하다가도 금세 뱀처럼 잔학해지는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에리아가 부러진 머리띠를 들고 나가자 그녀가 덧붙였다.

“론드 경도 불러 줘.”

“출타하실 준비를 할까요?”

그녀는 울적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로리샤도 없고, 이제는 티 파티도 지루하고……. 말동무나 하려고.”

“네. 전하.”

에리아는 다시 머리를 갸웃했다. 론드 경이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168786561772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