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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그러면 당신은 누구와 결혼했을까 (116/155)


114화. 그러면 당신은 누구와 결혼했을까
2023.06.26.


“이젠 쉬어도 돼요.”

시녀장은 황후궁 하녀 하나에게 칼린을 맡기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 하녀가 칼린을 황녀궁으로 데려갔다.

하녀는 칼린이 앙카르트저에서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사방이 막힌 작은 골방에 데려다 놓고 사라졌다.

‘이게 시녀의 방이라고?’

버리기 아까워 거기 방치한 것 같은 낡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끼이익 소리가 났다.

칼린은 그제야 아프고 분해 헐떡거렸다.

“다 가만 안 두겠어. 용서 못 해!”

* * *

칼린은 그날 저녁 르네 자작을 찾아갔다.

황궁의 길을 알려 준 이는 없었다. 그녀가 제 뛰어난 두뇌로 그동안 방문한 장소를 연결하여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는 하인을 붙잡고 긴급한 일이니 르네 자작을 불러오라 했다.

1황자궁 복도로 나온 르네 자작은 그녀의 뺨을 보고 경악했다.

칼린은 사납게 말했다.

“네. 제가 오늘 황녀궁에서 이 꼴을 당했어요. 자작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는 분명히 오를 전하의 시녀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제가 황녀궁 골방에 처박혀 있는 거죠!”

“이런, 앙카르트 양. 유감이요.”

칼린은 턱을 쳐들고 자작을 쏘아보며, 누가 듣건 말건 말했다.

“자작님이 가져간 오필드의 땅이면 황궁 안에라도 건물 하나를 살 수 있을 가격 아닌가요? 그런데 이러시기예요?”

그때 복도 끝에 하인이 하나 지나가자, 르네 자작은 두툼한 손으로 칼린을 맞은편 벽까지 밀어붙였다.

중년 남성의 위협적인 입김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더 쓰라리게 했다.

“그래서 황궁에 들어왔잖소! 그 짓을 벌여 귀족원까지 들쑤셔 놓고, 오를 전하더러 시녀를 더 들이는 부담을 지라는 거요? 뻔뻔하기는!”

칼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거 놓지 못해요?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요!”

“제철소 투자권은 원하는 대로 가졌잖소. 황족의 시야 안에 머물고 싶다면 주는 대로 받아먹되 불평해서는 안 되지. 어째서 앙카르트는 그걸 모르는가!”

“당신……! 당신과는 더 말하지 않겠어요. 오를 전하를 뵙게 해 줘요!”

“하! 죽고 싶소?”

“……!”

칼린은 분을 이기지 못해 눈시울이 다 붉어졌다. 르네 자작은 그제야 그녀를 놓고서 자기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애초에 당신은 1황자든 2황자든 상관없었던 것 아니요?”

르네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칼린은 흥분한 상태에서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는 자비 없이 말했다.

“당신이 황족의 시녀가 되길 원했으니 황족의 시녀로 만들어 준 거요. 지금 당장은 성에 안 찰지 몰라도, 거기서 오를 전하를 위해 공을 세우시오. 당신은 영특하니 기회를 잡으란 말이오. 그 정도는 사생아도 하잖소!”

“지금……!”

칼린은 자신을 지금 그 사생아 시녀와 비교하는 것이냐고 항의하려 했다.

그러나 르네가 먼저 말했다.

“골방이라고 했소? 내 그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요. 그럼 누가 보기 전에 당장 돌아가시오.”

그 복도를 벗어날 때까지, 칼린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벽을 짚어야 했다.

그날 밤 칼린은 창문이 있는 작은 방에 몸을 뉘었다.

그녀는 거기서 자신이 오를 황자에게 착취당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또한 지금 그에게 항의하거나 복수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 * *

카이델 공자는 저녁에 돌아왔다. 그는 ‘우리 침실’에 들어오면서 심지어 헛기침을 했다. 마치 내가 놀라 펄쩍 뛰어 창밖으로 떨어질까 조심하는 사람 같았다.

‘아. 진짜 그런 적이 있었네.’

내가 성년이 되던 날. 백작 저의 내 방 발코니에 밖에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추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가 받아 주어서 조금도 다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카이델 공자님.”

“로리샤.”

그 말을 끝으로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와 나눌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와 단둘이 한방에 있는 것이 이토록 숨 막히는 일이었다니!

그는 나를 내버려 두고 소파에 앉더니 내가 보던 책을 살폈다.

“전술에도 관심이 있어요?”

“서재에 가 보니 대부분 이런 책들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하긴, 백작님의 서재와는 다르겠군요.”

“서재라니요. 엄연한 도서관인걸요?”

나는 순간 너무 행복한 얼굴로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민망해서 시선을 피했다.

우리 사이에는 사람 하나 앉을 만큼의 거리가 벌려져 있었다.

나는 이토록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데, 그는 제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는 것도 심술이 났다.

그러고 보니 자기 집 안방이 맞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책을 옆으로 치웠다.

“오늘 공작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어요. 공자님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러면 꼭 그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나는 내 입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사실은 사실이라 더 침울해졌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려 앉았다.

“미안해요. 그레이언 전하가 날 밝자마자 입궁하라고 하시는 바람에.”

“결혼 휴가 중인데 너무하시다…….”

“아버님과의 대화는 어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었다.

공작님은 제브론에서 나를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변함없이 품위 있고 친절했다. 나는 오히려 그래서 더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나를 대놓고 미워하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별말씀 안 나눴어요. 잘 잤냐고. 잘 먹었냐고. 그래서 잘 자고 먹었다고……. 서재를 써도 되냐고. 쓰라고……. 공작님은 참 품위 있으세요. ……하아. 한심하네요.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나는 어색하고 기운 없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와 어떻게든 사소한 대화를 이어 가려고 용을 쓰는 내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결혼은 고사하고,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줄 모르는 게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

나는 그가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내 손목을 붙잡아 아래로 당겼다.

내가 표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털썩 앉으며 눈을 부라리자, 카이델 공자는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려 앉더니 소파 등에 팔꿈치를 올려 머리를 괴었다.

저 봐, 저 봐. 또 예쁜 척한다.

“안 한심해요. 계속 말해 봐요.”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풉 하고 웃고 말았다.

“동정이에요?”

“애정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그와 말싸움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의미 없이 주절거렸다.

“제가 이 저택에서 뭘 해야 하느냐고 공작님께 여쭤봤더니, 차차 알게 될 거라고만…….”

“그래서 기죽었어요? 아버님이 안주인 역할을 당장 안 알려 주시고 미루는 게,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요. 오히려 인정해 주시면 더 겁에 질렸을걸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기울었다.

나는 얼른 변명했다.

“그렇잖아요. 카이델 가문은 제국의 수호 가문이에요.”

“잘 알고 있군요. 안주인답게.”

하지만 나는 그의 농담이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카이델가가 전장에 나아가 제국을 지키는 동안 가문을 지키는 건 안주인의 역할이 아닌가요? 그런데 여기 누가 절 믿고 따르겠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카이델 공자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 건조해서 그가 이상한 짓을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다 잘 알면서 왜 제일 중요한 하나는 모를까…….”

“예?”

내 동공은 마구 흔들렸고, 그는 뒤늦게 손을 내리고 빙긋 웃었다. 분명히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깨려 재빨리 말했다.

“아무튼 여기 있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행동할게요. 저도 새벽에 일어나고요. 흐흑. 전 정말 야행성인데…….”

여기 있는 동안.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었다.

나는 이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 같은 방을 써야 하는 사람과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는 건 좋은 방법 같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치를 잔뜩 보며 말했다.

“공자님도 저와 결혼은 상상도 한 적 없으시잖아요. 안 그래요?”

“내게 결혼은 계획하는 거지, 상상하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옳다구나 말했다.

“봐요! 그렇잖아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고, 그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등을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아주 나직이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와 결혼했을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전 결혼 생각 없어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

“비밀 지켜 주실 수 있어요?”

그가 끄덕이자, 나도 등받이로 등을 깊이 기댔다. 우리는 퍽 비슷한 꼴로 소파에 나란히 늘어져 앉아 있었다.

“저희 백작님은 우리 엄마를 엄청 사랑했어요. 제가 백작님을 미워할 때도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요. 우리 엄마도 그랬을걸요? 하지만 그 끝에 뭐가 남았는가 보세요.”

“당신.”

그의 대답이 퍽 진지해서, 나는 풉 웃고 말았다.

“그게 꼭 좋은 일이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좋은 일이니까.”

어느 틈에 그의 더운 손바닥이 내 뺨에 얹혀왔다. 그를 돌아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볼 때는 몰랐는데, 그의 손바닥은 내 얼굴 반을 다 덮을 만큼 컸다.

어색하게 웃으며 얼굴을 뒤로 빼려 하니 그의 상체가 딸려 왔다. 어어, 하는 사이 그의 상체가 소파에 길게 누운 내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바르작거리며 억지로 웃었다. 어색해서 숨도 쉬기 힘들었다.

“공자님, 이거 좀 불편한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나는 이게 불편한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 좀 비켜 주시면 좋겠어요, 공자님.”

“비켜 주기 싫어요. 로리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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