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시녀 칼린 앙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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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시녀 칼린 앙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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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시녀 칼린 앙카르트
2023.06.25.
“전하, 무슨 일이세요?”
“보고 싶어 불렀어. 지금 내 속이 속이 아닌데, 네가 그걸 무시하고 있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왜 속이 속이 아니십니까?”
“오를 형님에게 참패했으니까!”
로카르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단지 1패입니다. 여전히 전하가 이기고 계시고요.”
“전쟁의 승패가 승수로 갈리나? 중요한 건 승부를 가르는 단 한 판이야. 지금 나를 애 취급하는 거냐?”
그레이언의 짜증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웠다. 그래서 로카르드는 지금을 쉬어 갈 때라고 판단했다.
전쟁이라고 매일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때로 쉬어 힘을 비축하고, 진지와 물자를 정비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쉰다.
그리고 로카르드에게는 이제 새롭고도 중요한 다른 일이 있었다. 타가르의 투정을 일일이 삼키는 것 말고.
그는 그레이언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전하. 저는 결혼했습니다.”
“알아. 전적으로 내 덕이지.”
“하.”
로카르드는 알면서 그런 거냐고, 어이없다는 듯 무릎을 탁 쳐 보였다.
“내 선물은 받았나?”
“전하가 보내 주신 명마를 보고 제 가신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리샤와 함께 타고 다니겠습니다.”
대충 이때면 신부와의 첫날밤에 대해 물어볼 때였다. 로카르드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레이언은 잠시 말을 곱씹다가 예민하게 말했다.
“밀리오라도 결혼 선물을 보냈던가?”
“아니요.”
“그러면 제3황궁에나 다녀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
* * *
「짐을 싸 입궁하시오.」
칼린은 르네 자작의 전갈을 받았을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지겨운 싸움이 끝난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마침내 거둔 승리의 흥분에 압도되지 않으려 입술마저 깨물었다. 절대적인 평정을 유지한 얼굴로 오를 앞에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작에 성취했어야 할 일을, 이렇게 멀리 돌아오다니.
하지만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그녀는 각오를 다지며 하녀를 모두 불러들여 짐을 싸게 했다.
칼린이 바쁘게 입궁했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르네 자작이 아니라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은 칼린을 찍어 누르는 듯한 시선으로 기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칼린은 그녀가 안중에 없이 자신의 흥분을 추스르는 데 집중했다.
어차피 힘의 우위는 그녀의 것이었다. 시녀장쯤이야.
그녀는 제가 오를의 새 시녀가 되었으니, 그레이언 황자도 시종을 하나 더 들여야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공평한 경쟁을 위해 시종의 수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과연 누가 들어오게 될까, 칼린은 그것을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시녀장은 자기 앞에서 긴장하기는커녕 딴생각에 빠진 듯한 칼린이 못마땅하여, 마치 경고하듯 말했다.
“따르세요.”
“르네 자작님은 어디 계시죠?”
“따르라 했습니다.”
시녀장은 코웃음을 치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칼린은 그제야 시녀장의 뒷모습을 집중해서 쏘아보았다.
‘저 할멈, 가만히 두지 않겠어.’
잠시 후 도착한 화려한 방문 앞에서, 칼린은 깊이 심호흡했다. 처음 오는 별궁의 여성적인 분위기를 살피며, 그녀는 자신이 황후에게 인사를 왔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절차였다.
에리아가 문을 열자, 칼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몸짓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장은 자신을 따라와야 할 칼린이 저를 제치고 먼저 들어가자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시녀장은 입가에 삐뚠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긴 경력에 이런 시녀가 한둘뿐이었으랴.
응접실 안, 실내의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사물들이 칼린의 시각을 압도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밀리오라는 칼린을 보고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걸음 하나하나, 날 때부터 타고난 우아함이 밴 몸짓이었다.
“……!”
이곳이 황후궁이 아니라 황녀궁이었다니, 칼린은 밀리오라를 발견하고 놀라 눈과 입을 다 크게 열었다.
‘밀리오라 황녀? 어째서…….’
칼린은 당황하여 예를 올릴 박자를 놓치고 말았고, 밀리오라의 걸음은 그녀에게 다가오며 갑자기 빨라졌다.
밀리오라는 그대로 상체의 힘을 모두 실어 팔을 휘둘렀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칼린의 뺨을 갈기고, 그 팔을 회수하는 회전력으로 다음 따귀를 때렸다.
순식간에 뺨을 넉 대나 맞은 칼린은 산발이 된 채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꺽 하는 소리 말고는, 놀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밀리오라는 칼린을 내려다보며 씩씩대며 소리쳤다.
“너는 내가 방금 고른 옷도 기억 못 하는 멍청한 황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쩌니? 나는 네가 한 짓을 똑똑하게 기억하는데. 칼린 앙카르트.”
“전, 전…….”
칼린은 전하 소리를 다 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몸은 고통에 반응하여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으나, 머리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다.
밀리오라는 시종의 메달을 칼린의 가슴에 집어 던지고 말했다.
“자, 지금부터 너는 내 시녀야. 네가 첫 번째로 할 일은 근신하는 거야. 네 방에서 나와 황궁 안을 돌아다니는 꼴이 보이면 매운맛을 보게 될 테니 그리 알아.”
“전…….”
“에리아!”
에리아는 즉시 달려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황녀가 이 정도로 패악을 부린 것이 오랜만이라 에리아도 당황하고 있었다.
“뭐 하니, 방 치우지 않고!”
에리아가 칼린을 부축하여 방에서 내보내자마자, 시녀장은 송구하다고 머리를 숙인 다음 따라 나갔다.
황녀는 피식 웃었다. 시녀장의 표정을 보니 칼린은 지금 저승사자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녀는 에리아를 바로 다시 불렀다.
“황녀 전하.”
“선물은?”
“네?”
“로리샤의 결혼 선물 말이야.”
“늦어도 며칠 안에는 완성될 거라고 했습니다!”
에리아는 겁을 먹었으나, 밀리오라는 방금 있었던 난장으로 오히려 기분이 시원해져 화사하게 웃었다.
“더 늦으면 안 돼, 알았지? 나 기대하고 있다고. 내가 확인한 다음에 로리샤더러 오라고 해야겠다.”
“네. 전하. 그런데 새 시녀님은…….”
황녀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계집애의 방은 창문 없는 데로 줘. 로리샤의 방 건드리지 말고.”
“네. 전하.”
에리아는 바쁘게 나갔다.
그사이 전실에 있던 칼린은 머리를 대충 정리한 후였다. 하지만 뺨에 멍이 피어오르기 시작해 그녀의 몰골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칼린 앙카르트가 유명한 부호의 딸이며 아카데미 차석을 유지하는 우수한 인재라고 해도 시녀장에게는 길들이기가 필요한 신입 시녀일 뿐이었다.
시녀장은 칼린에게 바늘 끝만큼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이제 황후 폐하께 인사를 가야 합니다.”
칼린은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듯 턱을 쳐들고 말했다.
“제 하녀는 어디 있죠?”
칼린은 흐트러진 머리를 새로 다듬고 얼굴의 멍을 화장으로 가려 줄 하녀가 즉시 필요했다.
그러나 시녀장은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고, 칼린은 그 대꾸가 분해 입술을 꽉 씹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시녀님. 시간이 없으니 저를 따르세요.”
“지금은 안 돼요.”
칼린의 날카로운 대답에 시녀장이 우뚝 멈추어 돌아보았다.
시녀장은 마르고 키가 훌쩍 컸기 때문에 노력 없이도 칼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죠?”
“절 보세요. 저는 지금 폭행을 당했어요. 이런 모습으로 황후 폐하를 뵐 수는 없단 말이에요. 악!”
칼린의 고개가 다시 획 돌아갔다.
칼린은 방금 시녀장이 또 제 뺨을 때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충격에 입술을 달달 떨며 말했다.
“지, 지금……. 미쳤어요?”
“타가르께서 내리신 벌을 무슨 무도한 범죄인 듯 말하다니, 기본이 글러 먹었군!”
“지금, 당신이 날 때렸어요? 이러고도 당신이 무사할 줄…….”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몇 명쯤 봤을 것 같아요, 앙카르트 양?”
“하……!”
칼린이 입을 다문 것은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이었다.
시녀장은 그녀를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이 황궁이라는 밀림에서는 자신이 포식자라는 것을 확신하는 자의 행동거지였다.
칼린은 자신이 지금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의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시녀장은 서릿발같이 말했다.
“당신보다 더 고귀한 가문 출신에, 아카데미 최우수 졸업생들도 여기서는 모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당신은 여기 황녀 전하를 모시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특별 대접은 기대하지 말아요.”
시녀장은 말을 마친 다음 칼린의 뒤로 돌아가 또 흐트러진 칼린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리고 앞장섰다.
칼린은 영혼이 빠져나간 채로 시녀장을 따랐다.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떨지, 수치심이 걸음마다 피어올랐으나 멈출 수 없었다.
칼린은 이를 악물고 걸으며 곧 제게 유리한 지점을 찾아냈다.
세상에 하나뿐인 천만 골드짜리 뇌물을 받은 황후가 제 이런 몰골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황후궁으로 들어섰을 때, 황후를 만나면 시녀장이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황녀궁의 새 시녀 칼린 앙카르트 양을 데려왔습니다. 황후 폐하.”
시녀장이 황후에게 칼린을 소개했을 때, 황후는 칼린의 붉어진 뺨을 보고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시녀장이 말했다.
“황녀 전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자 황후는 다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끄덕이더니 말했다.
“앞으로 밀리오라를 잘 보필해 주렴.”
“……!”
황후와의 알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칼린은 황후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결국 한마디도 뱉지 못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