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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취한 초야 (114/155)


112화. 취한 초야
2023.06.24.


로카르드는 흠칫 놀라 손을 물리고 아머와 같은 미소를 띠었다. 그녀 앞에서 약해 보일 수는 없었다.

로리샤는 흐릿한 초점을 잡으려 눈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더니,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공자니임!”

그의 목소리는 몹시 나직이 흘러나왔다.

“말해요.”

“아까 제가 어떤 부인에게 실수한 것 같은데 어쩌죠? 로리샤가 친 사고 1호입니다!”

“누구?”

“그……. 눈이 쪽 찢어지고 적금발에, 드레스도 피 색깔이고……. 말투는 재수 없고…….”

로카르드는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훈련 대장 하이만 남작의 아내였다.

그는 설핏 웃음을 담고 나직이 물었다. 그녀가 여전히 그가 알던 로리샤라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어떤 실수?”

“백작 부인이 공자님 가신 부인들에게 제 험담을 했는데, 그런 소릴 듣고 나면 누구든 절 싫어하는 게 당연한데, 그래서 싫은 소리 좀 한 걸 가지고 제가 째려보면서…….”

“째려보면서?”

“째려보면서 단숨에 마셨어요.”

그녀는 아까 했던 동작과 표정을 과장되게 흉내 냈다.

로카르드는 낮고도 부드럽게 물었다. 방 안을 꽉 채운 적막과 회한에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했기에, 로리샤?”

그는 언젠가부터 이걸 해 보고 싶었다. 소꿉놀이 친구처럼, 그녀와 천진하게 반말을 해 보고 싶었다.

순수하게. 솔직하게.

하지만 그녀는 취해 그의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음, 몸을 흉하게 놀리다가 술고래라고 그랬나? 헤헤. 모르겠어요.”

로카르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는 속삭였다.

“욕을 해 주지 그랬어.”

“제가 아무리 로리샤지만 카이델가에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제가 참았어야 하는데…….”

로리샤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고개를 푹 떨궜다. 이미 잠들어 있었다.

로카르드는 천천히 일어났다. 아까의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럴 땐 참지 말았어야지. 내 아내라면.”

그도 오늘은 만취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비슷한 정도로 가슴속에 차오르는 슬픔 같은 것에 압도될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로리샤는 여전히 그의 시야에 있었다.

로카르드는 자신의 욕정이 이렇게 날카롭고 괴로운 감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는 숨을 참은 채 로리샤를 들어 침대에 놓은 다음, 침대 시트를 확 걷어 덮어 주었다.

그러자 종처럼 공중으로 열린 그녀의 패티코트 때문에 이불이 천막 같은 꼴이 되었다.

“못 말리겠군.”

소파에서 자려던 로카르드는 도저히 그 꼴을 보면서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 그녀에게서 이불을 걷어 내고 그녀의 드레스를 조심조심 벗겼다. 그리고 패티코트까지 벗겨 냈다.

그녀의 몸에 손톱 끝도 닿지 않게 탈의하려면 몹시 느리고 신중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마침내 끝나자, 그녀는 몸이 한결 편안해졌는지 꼼지락거리며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에는 그녀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은 코르셋이 들어왔다.

‘오늘 그녀도 아머를 입고 있었구나.’

그는 기가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이 전쟁도 아닌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더 꽉 죄고 있는 코르셋을 풀어 주려고 다가갔으나 그 매듭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나직이 이를 갈다가 단검을 가져왔다. 그리고 코르셋 끈을 한꺼번에 잘라 버렸다. 누가 보았다면 첫날밤에 아내를 살해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는 코르셋을 그녀의 등 아래로 살살 당겨 꺼내 집어 던지고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한 겹 속옷이 눈길을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 틈에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로리샤가 이제 합법적으로 그의 것이라는 자각이 일었다. 마음, 몸, 모두.

그래야 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러다 그녀의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발견했다.

“제기랄.”

그는 그대로 방을 박차고 나갔다.

* * *

결혼식 다음 날.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숙취와 두통에, 취해서 울었는지 눈은 붓고.

무엇보다 기억이 없었다.

이게 내 결혼 첫날이라니!

“아아, 로리샤. 이 미친년아!”

나는 울먹거리며 침대에서 나왔다가 이상한 걸 밟고 말았다.

“……?”

칼로 깨끗이 잘려 나간 코르셋.

카이델가 하녀들이 어제 치장시키며 오늘만은 저걸 입어야 한다고 나를 협박할 때, 저걸 딱 저렇게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긴 했는데.

어제 취해서 실제로 저질러 버린 걸까? 내가?

“술은 끊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자 올가 부인이 차를 들여왔다.

“숙취에 좋은 차입니다.”

“음……. 가로린이네요?”

“차에 대해 아십니까?”

“약초를 아는 것에 가까워요.”

“오, 그렇군요.”

올가 부인은 살짝 반색했고, 나는 잔뜩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저……. 어제…….”

그러자 올가 부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실수 없으셨습니다. 작은 마님.”

“하아, 다행이다!”

나는 대번에 몸에서 힘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헤쭉 웃음이 나왔다.

“로카르드 공자님은요? 공자님도 어제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공자님은 새벽에 연무장에 나가셨습니다.”

“네에?”

나는 그가 불필요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퍼마시고도 새벽 수련이라니, 인간미라곤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그의 단점을 찾아내려는 내 습관은 여전했다.

올가 부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가지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녀는 내 코르셋을 발견하고 목소리가 잠깐 흔들렸지만, 그 정도면 훌륭하게 태연했다.

“새벽에 훈련 대장인 하이만 남작과 대련을 하셨는데, 그분 어깨가 탈골되셨다고 하네요.”

“어…….”

멍한 가운데 어질어질한 기분이 더해졌다.

내가 이쪽 집안 분위기를 뭘 알아야 말이지. 보통 새벽 운동에 서로 어깨를 뽑고 그러나?

하지만 올가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분의 부인은 어제 만나셨지요? 눈이 가늘고 적금발입니다만.”

“헉…….”

안개 낀 새벽 수도 거리처럼 뿌옇던 내 머릿속은, 적금발이라는 말에 갑자기 선명해졌다.

실수가 없기는 무슨!

하지만 올가 부인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내 옷을 옷장에 집어넣더니 망가진 코르셋만 돌돌 말아 손에 쥐었다.

“먼저 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카이델 공자님은 좀 전에 2황자 전하의 부름을 받고 입궁하셨습니다.”

그가 설마 나 때문에 자기 훈련 대장 어깨를 뽑은 건가? ‘마누라 교육 제대로 하지 못해!’ 하면서?

나는 순간 머릿속이 꼬여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버버 하며 대답했다.

“머, 먼저 씻고, 공작님께 인사드려야죠.”

“공작님도 이른 아침에 순시를 나가셔서 점심때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그때 인사드리러 가시면 됩니다.”

다르다. 백작 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백작 저에서는 백작님만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실 뿐, 일상은 백작 부인의 시각에 맞추어 느리게 시작했는데. 그녀는 피부 관리를 위해서 늦잠을 자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내가 절망하자 올가 부인은 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카이델가의 규율은 어느 가문보다 엄격합니다. 누구도 작은 마님이 거기 즉시 적응하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여유를 가지셔도 된답니다.”

“올가 부인.”

“네, 작은 마님.”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버릇 나빠져요.”

나는 뚱한 얼굴로 차를 후후 분 다음 한꺼번에 다 마셔 버렸다. 그런다고 술이 빨리 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올가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해서, 나는 고쳐서 말했다.

“감사하다는 뜻이에요.”

그녀는 그제야 웃었다.

“제가 이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은 뭐죠? 다 알려 주세요. 공작님을 뵙기 전에 알아 두고 싶어요.”

“곧 자료를 가져오겠습니다, 작은 마님.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가슴이 다 철렁했다.

“네?”

“어젯밤 각방을 쓰신 듯한데……. 아랫것들 눈도 있으니 앞으로는 침실을 함께 쓰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말씀 드려 송구합니다.”

‘어제 우리가 각방을 썼구나!’

무서운 말도 아닌데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 방에 가서 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취해서 기억이 없네요. 아마 공자님도 취해서 습관대로 하셨나 봐요. 염두에 둘게요.”

올가 부인은 끄덕이고는 조용히 나갔다.

나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드러누웠다.

낯선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적셔갔다. 나는 그 이상하고 싫은 기분의 원인을 천천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도 내가 싫었던 거야…….’

* * *

로카르드는 얼굴에 피로와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채 그레이언 앞에 나타났다.

“저 어제 결혼했습니다. 전하.”

“그래서?”

그레이언의 불만스러운 시선에, 로카르드는 그를 못마땅하게 보다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그도 끓어오르는 짜증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레이언의 태도를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이것은 분명 질투였다.

그의 주군은 그를 질투하고 있었다. 로리샤를 두고.

로카르드는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레이언이 저를 로리샤와 나눠 가지는 것이 힘들어 투정하는 거라면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그의 가슴을 들쑤시는 듯했다.

눈앞에 있는 타가르가 그에게서 로리샤가 떠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로카르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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