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로리샤 카이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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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로리샤 카이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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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로리샤 카이델 부인
2023.06.23.
13. 로리샤 카이델 부인
결혼식 준비는 피를 말리는 과정이라고들 한다. 몇 달에 걸쳐 수십 가지 결정을 하고 준비하는 일이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준다고.
하지만 나는 남의 결혼식에 가듯 내 결혼식에 갔다. 식은 카이델 공작저의 넓은 정원에서 열렸다.
외부 손님은 초대하지 않아서, 하객은 두 가문의 주요 가신뿐이었다.
손님은 단출해도 결혼식 준비는, 그 짧은 기간을 고려하면 더욱, 대단한 정도였다.
식장에는 금빛 술이 가득 달린 캐노피를 줄지어 설치해 하객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고, 사방에 향기로운 꽃이 가득했다.
술과 음식 냄새는 달콤했고 음악은 천국에서 들리듯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정원에 꽃관을 쓴 사슴과 귀에 리본이 달린 토끼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았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다.
미샤 계집애가 돈을 물 쓰듯 쓴 것이다.
미샤는 식전에도 제가 우리 엄마라도 되는 줄 아는 듯이 결혼식 진행을 이것저것 지시했다.
그런 미샤를 보는 백작님의 시선에는 온기가 있었다.
‘저 계집애가 내 결혼식에서 제 점수를 따려고.’
하지만 나도 싫지 않았다.
대신 백작님이 야속했다. 백작님은 공작님과 대화하며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백작님도 화가 나서겠지.
내가 몰래 밖을 내다보았을 때, 백작 부인은 건드리면 저주라도 옮길 것처럼 사납고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이델 공작 부인 자리를 내가 제 딸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내게 거의 유일하게 위안을 준 얼굴은 줄리아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별장지기 모리아와 리사까지 한껏 꾸미고 백작님을 수행하는 척 참석하여 나를 보러 왔다.
줄리아 선생님은 울려고 하는 내게 말했다.
‘로리샤. 울지 말렴. 오늘은 네 가장 행복한 날이니까.’
나는 엄청나게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줄리아 선생님은 단지 내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간 후, 나는 신부 대기 장소에서 내가 입은 미치게 화려한 웨딩드레스와 내 몸값보다 비싸 보이는 부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변의 소음은 비현실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백작님이 들어왔다.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백작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백작님은 엄하게 말했다.
“참아라, 로리샤.”
나는 그 말을 듣자 읍, 비슷한 소리를 내며 눈물을 삼켰다. 신기하게 또 참아졌다. 하지만 마음속 서러움은 더 커졌다.
나는 백작님 팔짱을 끼고 식장 입구로 걸으며 속삭였다.
“죄송해요. 백작님.”
“무엇이?”
“……그 날개,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백작님은 사제가 서 있는 연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저기로 갈 시간이다. 로리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카이델 공자는 몹시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나도 세상 얌전한 여자처럼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그가 끼워 준 결혼반지는 내 손가락에 꼭 맞았다. 내가 결혼반지를 맞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 그를 흘끔 보니 그가 속삭였다.
“그 에메랄드 반지, 내가 괜히 끼워 봤을 것 같아요?”
나는 그 긴장된 상황에서도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베일을 쓰고 있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해도 됩니다.”
“……!”
지나친 긴장 때문인지, 나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카이델 공자는 그런 나를 보고 살짝 한숨을 쉬더니, 베일을 걷어 올려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하객으로 참석한 기사들 쪽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가 그 야유에 호응해 진짜 ‘키스’를 했다면, 나는 맹세코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것이다.
피로연이 시작되자 심지어 우리는 춤도 췄다. 사람들에 떼밀려 플로어로 나간 카이델 공자는 나를 안고 제자리걸음만 할 모양이었다.
‘미샤의 수업을 이렇게 써먹게 되다니!’
내가 알아서 스텝을 옮기자 그가 놀란 듯 물었다.
“춤을 언제 배웠습니까?”
“미, 미샤가…….”
허리를 감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그는 옅게 웃고 있었다. 나는 먹먹한 가운데에도 그의 미소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춤출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가 대충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 피로연에서 와인을 두 잔가량 마신 후였다.
카이델가의 가신들은 대개 기사단과 군의 지휘관들이었기에 주연의 분위기는 남성적이고 소란스러웠다.
그들은 카이델 공자에게 쉴새 없이 술을 먹이고 있었는데,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니 죄다 음담패설이었다.
이게 내 시댁인 거다.
훅 오른 술기운 속에 내 주변에 모여 앉은 가신의 부인들을 무심결에 돌아보았는데, 그들은 마치 기다렸던 듯 일제히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유일하게 눈을 마주친 건 그 끝에서 사납게 웃고 있는 백작 부인이었다.
‘아우, 이…….’
나는 부인들의 얼굴에 드러난 혐오감이 백작 부인에게서 비롯된 걸 직감했다. 그사이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은 것이다.
가신의 부인들은 그러잖아도 마땅찮은, 소문 속의 새 작은 안주인을 백작 부인 덕에 제대로 경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는 백작 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뿌린 경멸의 씨앗은 여전히 내 곁에서 자라날 터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이면서, 그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잔을 치켜들었다.
‘백작 부인, 나는 당신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그녀는 굳은 얼굴을 부채로 가리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걸 눈여겨 본 어느 부인이 다 들리게 혼잣말을 했다.
“몸놀림만 흉한 줄 알았는데, 술고래이기까지 한가 봐. 아아, 카이델가의 백 년 명성이 이렇게 끝나다니!”
시끌벅적한 가운데에서도 그 말은 이상하게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나는 성년인 데다, 이제는 결혼까지 한 엄연한 어른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보다 마음이 넓어진 것 같았다. 절대 취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쏘아보는 채로 씨익 웃으며 잔을 한 번에 비웠다. ‘그래, 나 술고래다!’ 하듯이 말이다.
전 같으면 그 부인에게 욕을 하고 싶었겠지만, 이제 내 행실은 카이델 공자의 책임이니 나도 달라져야 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내 시선을 피했지만, 얼굴이 차츰 벌게지는 걸 보니 내 도발이 그런대로 먹힌 것 같았다. 다른 부인들도 얼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카이델 저의 술은 퍽 셌다. 취기가 많이 오른다고 느꼈을 때, 올가 부인이 와서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언젠가 미샤를 겁주기 위해 술 마시며 센 척을 한 뒤로는 술을 끊겠다고 결심했는데, 깜빡한 거다.
“작은 마님, 괜찮으세요?”
나는 대답 대신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올가 부인은 나를 침실로 데려가 소파에 앉힌 다음 물었다.
“잠옷으로 갈아입혀 드릴까요?”
나는 취한 상태로도 그녀가 나를 진짜로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물었다.
“올가 부인은 백작 부인이 한 말 못 들으셨어요?”
“조금 들었습니다.”
“아! 말하지 마세요. 정말로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제 잠옷을 갈아입혀 주시려고요?”
“백작 부인은 단지 외부인이십니다.”
나는 눈에 초점을 모으려고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올가 부인은 되게 이상한 분이네요?”
“그렇습니까? 물을 좀 드세요. 작은 마님.”
올가 부인이 먹여 주는 물이 얼마나 시원한지,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헤실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문득, 내게 필요한 행복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그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올가 부이인!”
“네.”
“저 방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을 마셨어요. 부인은 천사세요!”
“천만에요. 작은 마님.”
“그러면, 저 이제 혼자 있어도 될까요? 저는 혼자 사는 게 꿈이거든요!”
“그럼 좋은 꿈 꾸세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를 남겨 두고 나갔다.
나는 그제야 발가락만 써서 구두를 벗어 던지고 환히 밝혀진 마당을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잘 안 잡혀서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말이다.
“어, 여기 걔네 집이네? 그 재수 없게 잘생긴 애! 흐흐흐.”
* * *
로카르드가 제 가신들에게서 겨우 놓여 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제 신부를 즐겁게 해 주시지요! 초야입니다, 공자님! 아하, 초야가 아니시던가? 으하하.’
그들은 단지 그들의 작은 주인이 여자를 취한다는 사실에 같은 수컷으로서 흥분하여, 함성을 지르며 로카르드를 신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침실로 들어섰을 땐, 로카르드는 거기 가득한 고요에 잠시 숨을 참았다.
그는 소파에 앉은 로리샤의 뒷모습을 보며, 재킷을 벗어 바닥에 흘리며 다가갔다. 더 정확히는 지독한 피로에 앉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가서 보니 그녀는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푹 풍기는 술 냄새가 그녀가 만취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
로카르드는 그제야 안도감 섞인 한숨 속에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그녀의 눈감은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취하니까 좋네. 마음대로 봐도 되고.”
그녀의 홍조 오른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
로카르드는 얕게 호흡하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슬쩍 쓸어 보았다.
마치 성냥을 긋듯 손끝에 따가운 열기가 지나갔다.
그는 아무 감정이 깃들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어쩌다 여기 있는 거지, 로리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울던 로리샤의 얼굴, 목소리, 호흡의 떨림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그녀는 웃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의 시선을 붙잡던 그녀만의 빛은 희끗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불행했다.
그 사실은 로카르드마저 불행하게 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곁에 있어서 불행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때로는 어느 손이 단검을 제 옆구리에 찔러 넣어 휘휘 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 이토록 취한 것도, 오늘 밤 그 혼자서 가장 불행한 로리샤의 얼굴을 목격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언제든 그녀를 웃길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너는 왜 나를 욕심 내지 않는 거야, 로리샤.’
그때 로리샤가 번쩍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