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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인생 최대의 위기 (112/155)


110화. 인생 최대의 위기
2023.06.22.


로카르드가 연무장에 들어온 이후, 기사들은 그곳을 비웠다. 그의 기세를 보니 다가가서 좋을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거칠게 검을 휘두르던 그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을 때쯤에야 탈진하듯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의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술 교관 하이넬, 로리샤가 그토록 경멸했던 그의 ‘선생’이었다.

“공자님, 지금 다들 궁금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럼 죽어 버리라고 해요.”

하이넬은 손끝으로 염소수염 한쪽을 돌돌 말아 잡아당기며 로카르드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상대해 드릴까요?”

“흥.”

하이넬이 그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건 것은 피차 아는 바였다.

“저택에 아름다운 금발 아가씨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진짜입니까?”

“아가씨가 아니라 카이델 부인입니다.”

“호오. 우리 금욕적인 공자님께서 최근에 어째 화끈하게 노신다 했더니, 결실을 얻으셨군요! 하하하.”

“…….”

하이넬은 이 대화를 농담처럼 이끌어 가려 필사적이었지만, 로카르드는 마치 밤샘 전투 후에 부하를 반쯤 잃었을 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이넬은 여자를 임신시키고 코가 꿰여 결혼하며 절망한 사내들의 얼굴은 부지기수로 보았지만, 지금 로카르드의 얼굴은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 그는 적잖이 당혹했다.

“그 정도로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아니. 머릿속이 복잡한 것뿐이에요.”

“하긴, 좀 더 즐기셔도 되는 때긴 하죠.”

하이넬이 대충 장단을 맞췄지만, 로카르드는 듣고 있지 않았다. 하이넬은 작은 주인의 속을 알기 힘들어 관자놀이를 벅벅 긁다 돌아갔다.

마침내 혼자 남겨진 로카르드의 시야에 든 하늘은 검게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가 오늘 부친으로부터 ‘결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자유를 제한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쁨을 느꼈다. 자신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이었다.

아무튼 이제 로리샤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싫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부친도, 그레이언 황자도, 심지어 저택으로 돌아와 그에게 말을 건 기사들도. 모두 우려만을 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기쁨을 부정하듯이 말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로리샤.

그녀의 말, 그녀의 절망, 그녀의 슬픔…….

그의 가슴을 짓이긴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가 꽁꽁 싸매고 있던 가슴속 너덜너덜한 상처를 엿보고 나니 아팠다.

막막했다. 그가 좀처럼 경험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면 그녀는 원하는 대로 행복해지겠지만, 저는 보나 마나 많이 불행해질 것 같았다.

나중에 또 그녀를 붙잡으러 다닐 생각을 하니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부글거렸다.

이렇게 미칠 것 같은 날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 * *

카이델가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올가 부인은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주며 공작님의 말을 전했다.

당분간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문안은 필요 없고 자유롭게 지내도 좋다는 것이었다.

내가 꼴 보기 싫어 그러신 것일 테지만 그래도 나는 고맙게 여겼다. 이렇게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인사하러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엉망이었다. 어제 카이델 공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의 낯선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어가 볼게요. 차는 필요 없어요. 고마워요.”

“다른 필요하신 것이 있으며 언제든 부르십시오.”

곧 올가 부인이 노크했다.

“미샤 로아르 양께서 오셨습니다. 작은 마님.”

“네! 들여 줘요.”

미샤는 방을 쓱 훑어보더니 나를 보자마자 코웃음부터 쳤다. 내 퉁퉁 부은 눈을 보고 그런 것이었다.

“하!”

“…….”

나는 창가 의자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서로를 외면했다.

나는 미샤의 치 떠는 배신감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먼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지, 속으로는 미샤가 반가웠다. 꼭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미샤는 야멸차게 말했다.

“카이델가의 작은 마님? 좋겠다, 로리샤?”

“…….”

“왜 말이 없어?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한가 보지?”

“응. 그래서 말을 못 하겠어. 미샤.”

“아무튼 말은!”

“…….”

평소라면 계속 투덕거리며 말싸움을 이어 갔을 테지만, 오늘은 미소만 지어졌다.

그때문인지 미샤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왜, 카이델 공자님이 화내셔? 아니면 공작님이 구박하셔?”

“무슨 소리야. 아무도 안 그래.”

미샤는 그제야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도 나를 걱정하는 티를 내기 싫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보내서 온 거니까, 너 오해하지 마.”

“응. 고마워.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미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아니, 안 괜찮아. 너라면 괜찮겠니?”

“아니? 좋아서 열 번쯤 기절했겠지. 나는 너도 그럴 줄 알았는데, 좀 뜻밖이다?”

나는 힘없이 말했다.

“내가 카이델 공작가의 작은 마님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니?”

“참……. 내가 할 말이 없다.”

“내가 분수를 잘 아니까, 그렇지?”

“응.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는 다시 서로를 외면하며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침묵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잡아. 괜찮아.”

“뭐?”

“사실은 내 머리채 잡고 싶지? 내가 카이델 공자님을 진짜로 뺏어 갔잖아. 잡아. 정말 괜찮으니까.”

“하! 말이나 못 하면.”

미샤는 코웃음을 쳐 놓고는 천천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되게 뻔뻔하잖아. 그냥 받아들여. 어차피 온 제국이 떠들썩하게 그렇고 그런 짓 하고 다닌 셈인데, 지금부터 진짜로 하면 되잖아.”

“네 마음은 고마워, 미샤.”

음란한 짓을 응원하고, 거기 감사하는 우리의 대화는 어딘지 이상했다. 미샤도 나도 그걸 깨닫고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너는? 너는 괜찮니?”

“사람 말을 뭐로 듣니? 난 벌써 마음 정리했다고 했잖아. 아무튼 카이델가와의 혼맥은 로아르가에도 이익이니까. 좋게 생각하려고.”

“너 정말 많이 컸구나?”

내가 하도 뚱하게 말해서인지, 미샤는 오히려 정색을 했다.

“아버지가 결혼식 준비를 하시는데 네가 원하는 것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셨어. 아카데미 방학이 끝나기 전에 식을 치르려니까, 아니, 무슨 결혼식을 일주일 만에 준비하니? 아무튼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하든지 영원히 입을 다물든지 하도록 해. 로리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방학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백작님이?”

미샤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눈을 피했다.

혹시 백작 부인이 자기 사위를 내게 빼앗겼다며 앓아누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니 결혼식 준비도 백작님이 직접 하는 거고.

“백작 부인이 잠을 못 이루시겠네, 그렇지?”

미샤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진정제 드시고 잠드셨어. 공자님이 아까운 것보다 네가 잘되는 꼴이 배가 아파서 그러시지, 뭐.”

“참고로 말하는데…….”

“알아. 엄마가 나 대신 너를 황궁에 들여보낸 것. 엄마가 제 발등 찍은 걸 누가 뭐라고 하겠어?”

백작 부인은 참 한결같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결혼하는데 미샤가 와서 필요한 걸 묻다니, 꼭 진짜 자매 같지 않은가.

“와……. 너 오래 살아라. 미샤.”

“뭐, 철들면 일찍 죽는대서? 웃기지 마. 아무튼 필요한 것 있니?”

“없어. 아무것도.”

“내 그럴 줄 알았다만……. 알았어. 그럼 내 마음대로 준비할게.”

나는 미샤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멋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결혼식에 내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써 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유지될지 모르는 이 결혼생활에 백작님의 재산을 탕진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니? 아니야! 간소, 간소하게, 나는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게 좋아. 내가 신부니까 네 마음대로 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준비해 줘. 뭐든 싸고 검소하게!”

“웃기는 계집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얼굴에 꽃물이나 부지런히 바르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공자님은 뭐라고 하셔?”

“응?”

“공자님도 통보만 받으셨을 것 아냐…….”

‘뭘 뭐라고 하시겠어. 그분이 나보다 더 죽고 싶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카이델 공자는 얼핏 느긋해 보여도 야망 가득하고 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레이언 황자 전하를 황제로 만들 때까지 그는 아마 경주마처럼 쉬지 않고 달릴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발목에 달리고 말았으니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지금까지 나를 몇 번이나 살려 놓은 자기 손목을 도끼로 잘라 내고 싶은 기분이겠지.

“놀라셨지, 뭘. 당연하잖아.”

“…….”

미샤는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돌아갔다.

미샤의 동정을 받을 정도라니, 나는 정말 끔찍한 상황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결혼이라니.

지금까지 내 인생에 이런 위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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