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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한 번쯤 날아오르고 싶었어요 (111/155)


109화. 한 번쯤 날아오르고 싶었어요
2023.06.21.


나는 문득 올가 부인을 다시 보고 그녀에게 엄청난 불만과 반감을 느꼈다.

아마 그녀가 말하는 결혼은 내 것인 모양인데, 나는 털끝만치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그녀는 어째서 저렇게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냔 말이다.

심지어 놀림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카이델가의 하녀장이면 콧대가 하늘을 찌를 텐데, 나를 멸시하는 기색을 꼭꼭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음흉하게 느껴졌다.

“부족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녀는 돌아서려다 살짝 망설이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작고하신 지 수년이라, 저희는 집안에 안주인이 들어오신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은 마님.”

이것 봐.

나는 올가 부인이 점점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공작가의 하녀장이라면 사교계 소문은 빠삭하게 꿰고 있을 거면서.

내 소문 다 들었을 거면서!

나는 새침하게 말했다.

“부인은 제가 누군지 아시지 않아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세 번째 사자, 로아르가의 영애시지요.”

내 입으로 먼저 언급하려니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여기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알고 계실 텐데요? 최근의 소문요.”

“송구하오나 제가 그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마님.”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이런 반응은 정말 상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로아르 백작님의 사생아인 건 알고 계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

이제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

기사단을 길러내는 집안에서 일하는 사용인이라 그런가, 그녀는 말이 짧고 생각에 잔가지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말했다.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 불편하실 줄로 압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실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작은 마님.”

나는 그녀가 이토록 불편한 이유를 조금 깨달았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나를 서슴없이 ‘작은 마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올가 부인을 조금도 믿을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어색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올가 부인이 나간 후, 나는 황궁에서 나를 따라온 열한 벌의 드레스와 간단한 소지품과 함께 방에 남겨졌다.

조용한 방에서는 집중하면 연무장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렸다.

이곳이 내게 얼마나 낯선 공간인지.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는 자각이 불길처럼 일었다.

“작은 마님? 카이델 부인? ……이 음모를 짠 게 어떤 인간인지, 걸리기만 하면 조져 놓겠어!”

나는 혼자서 이를 박박 갈다가, 이 앞이 카이델 공자의 방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단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 속에 몰래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카이델 공자의 방은 방금 있던 곳의 반 정도 크기에 특색이 없었다.

벽에는 각종 표지와 휘장이 든 액자가, 벽장에는 전술서가 빼곡했다. 구석에 오래된 아머가 장식된 것을 제외하면, 카이델가 후계자의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소했다.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저절로 떠올랐다.

두 세대 전쯤의 어떤 유명한 장군은 황제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나 자택은 초라할 정도로 검소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든 출정해야 하는 자신이 일상의 사치와 편리에 물들면 몸을 사리게 된다고 말이다.

카이델 공자도 그런 선례를 따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속이 화르륵 끓어올랐다.

‘좋다 이거야! 존경스럽다고. 하지만…….’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그런데 내 뒤에서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당신이 어쩔 건 없어요. 이미 우리가 어쩔 건 없는 것 같군요.”

“으으!”

나는 그 순간 겁을 집어먹고 잔뜩 사나워진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카이델 공자를 보자마자 달려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흔들었다.

심지어 이성을 잃은 순간에도 그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존경스러운 내 ‘남편’이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의 멱살을 흔들며 반쯤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 힘에 불쌍하게 흔들리고 있는 건 나였다. 카이델 공자는 석상처럼 단단히 서서 내 힘에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님? 어떡해요, 공자님! 여기 오는 동안 뭐라도 방법을 생각해 내셨죠? 그랬다고 말씀하세요! 뭐라고 좀 해 보시라고요. 네?”

“…….”

그는 이마를 일그러뜨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석벽 같은 단단함과 그의 침묵에 더 큰 패닉에 빠졌다.

나는 그를 놓고 뒷걸음질 치며 두렵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계시려고요? 분명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예요. 결혼……, 이건 결혼이라고요!”

“…….”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나는 두려웠다. 그의 침묵과 굳은 시선, 우리가 처한 상황 모두 말이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탁자에 걸려 털썩 앉았다.

그제야 카이델 공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해서 더 무서웠다.

“폐하께서는 우리 둘 다 시종 자리에서 해임하시길 원했어요. 그걸 저희 부친들께서 이 결혼으로 무마했습니다. 제가 그레이언 전하 곁을 지키는 대신 말입니다.”

“…….”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결혼으로 위기에 몰린 것이 아니라, 위기에서 결혼이라는 막다른 출구로 빠져나온 것이었다.

카이델 공자가 그레이언 전하 곁을 지켜 주지 않으면, 나를 죽이려 했던 오를 전하가 황태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카이델가가 입게 될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천천히 이성을 되찾아 갔다. 지금은 당황할 때가 아니라 다음 해법을 생각할 때였다.

그제야 내가 카이델 공자 앞에서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인 게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붕괴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정신 차리란 말이야, 로리샤!’

나는 고개를 획획 저은 다음,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건 폐하께서 중재하신 결론이니까 우리가 되돌릴 방법은 없어요. 눈가림도 불가능해요. 그렇죠?”

나는 점차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거의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우리 이혼도 폐하의 허가가 필요해요! 그렇죠?”

고급 귀족의 이혼에는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다. 카이델가는 말할 것도 없다.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이혼?”

카이델 공자는 자신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상상해 본 적 없겠지만, 어쨌든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미샤가 카이델 공자의 입장이었다면, 백작 부인은 이혼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사위를 독살한 다음 재혼시킬 것이다.

카이델 공작님이 지금은 상황에 몰려 허락하셨겠지만, 그분이 나를 맨정신으로 며느리로 받아들이실 리 없었다.

나는 카이델 공작님을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이 저택에서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나는 절망감 속에서 저기 장식된 아머만큼이나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카이델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목소리는 바르르 떨렸다.

“카이델 공작님은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아버님은 지나간 결정을 후회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분에게 미래란 언제든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죠?”

“로리샤 양.”

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소박맞고 시골 별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저는 카이델가에서 쫓겨나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제가 그런 처지가 되면 백작님이 가슴 아파하실 거라고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나는 카이델 공자의 두 팔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저도 돕게 해 주세요. 그레이언 전하가 제위에 오르시도록 저도 도울게요.”

그의 눈썹은 의혹으로 기울어졌다.

“로리샤?”

“오를 전하는 제위에 오르시면 카이델가를 억누르기 위해 우리 이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그레이언 전하라면 기꺼이 허락해 주실 거예요. 공자님을 위해서요!”

“…….”

그는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빠르게, 간절하게 말했다.

“저는 이 저택에서 살아서 나가고 싶어요, 공자님!”

“감히 누가 당신을 해친다고……!”

카이델 공자가 언성을 높였지만 내가 먼저 고함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저는 또다시 누군가가 바란 적도 없는 가족이 되어 여생을 마치고 싶지 않아요! 불청객으로 사는 건 그만하고 싶다고요!”

빌어먹을.

그의 앞에서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되다니.

카이델 공자는 충격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입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숨이 찬 듯 말하고 있었다.

“한 번쯤은 아무에게도 손가락질당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아무와도 싸울 필요 없이 살고 싶어요.”

입술을 꽉 무니 뜨거운 눈물이 내 뺨 위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저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싶었어요. 살면서 단 한 번쯤은……. 하지만 여기선 그럴 수가 없잖아요. 흑…….”

“…….”

카이델 공자의 턱이 이를 악문 듯 경직되나 싶더니, 그는 몸을 획 돌려 나갔다.

그가 나간 문이 닫히는 쾅 소리와 함께 나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눈물을 닦아도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그곳이 심지어 내 방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사방이 캄캄해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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