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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너희 둘은 결혼하기로 했다 (110/155)


108화. 너희 둘은 결혼하기로 했다
2023.06.20.


“로카르드 공자, 로리샤. 우리는 방금 두 가문의 이름으로 귀족원에 사과 성명을 냈다.”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로아르 백작님.”

“사과할 것 없네. 우리는 더한 물의를 일으켰으니.”

“백작님?”

로아르 백작이 의외의 말을 꺼내자, 로카르드가 설명을 요구하듯 되물었다. 그러자 카이델 공작이 아들에게 쏘아붙이고 돌아가 버렸다.

“너희 둘은 결혼하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

* * *

나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슬쩍 돌아보니 카이델 공자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휴우.”

내가 뭘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뭔지 몰라도 사과를 해서 대충 해결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백작님이 내 망상을 깨듯 말했다.

“로리샤. 너는 밀리오라 전하의 시녀직에서 사임했으니 즉시 카이델 공작 저로 들어가거라. 짐은 내가 보내겠다.”

“…….”

오늘 날씨는 참 쾌청했다. 새파란 하늘이 백작님의 눈 색상과 잘 어울렸다.

이런 지저분한 일로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가문의 이름을 오르내리게 하다니. 나는 그걸 떠올릴 때마다 백작님에게 죄스러웠다.

게다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음해로 카이델 공자와 그레이언 전하가 위기에 몰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괴로웠다.

거기에 백작님이 나를 대신해 귀족원에 들었다고 할 때는 솔직히 조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사실 나는 백작님이 나를 황궁에 들여보냈을 때, 그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네가 죽든지 살든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에둘러 말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나를 위해 귀족들에 맞서 주자 내게도 정말로 아버지가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백작님에게 너무 미안하면서 감동적이기도 한,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엄청난 상황에서도 아주 비참하지는 않은 기분으로 귀족원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갑자기 입은 옷이 작아진 기분이 들었다가 목이 텁텁해지기도 했다.

나는 가까스로 내가 밀리오라 전하의 시녀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 정도 분란의 결과로는 납득할 만했다.

“그, 그럼 일단은 집으로…….”

그러자 백작님은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걸 알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로카르드 공자, 로리샤에게 설명을 부탁하네.”

그리고 백작님도 획 돌아가 버렸다.

“백…….”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설명…….

방금 결혼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누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내가 멍하니 카이델 공자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여전히 저 앞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

“…….”

그도 답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도 지금 충격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

“공자님? 지금……. 어떡하죠?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네?”

“…….”

“흑.”

그런데 그가 나를 획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명 광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겁을 먹고 흠칫 뒤로 물러나니 그가 내게로 상체를 훅 숙여 왔다.

“로리샤 양.”

“네!”

나는 겁에 질려 크게 대답했다.

“가서 짐 싸도록 해요. 데리러 갈 테니까.”

“네?”

“내가 침소까지 데려다줘요?”

“아, 아니요? 아니요!”

카이델 공자는 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획 돌려 돌아가 버렸다.

나는 혼자 남겨진 걸 겁내는 아이처럼 황녀궁으로 반쯤 달리기 시작했다. 이유 모를 눈물이 나와 팔로 닦으면서.

* * *

로카르드는 발코니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레이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숨결은 거칠었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머릿속이 이렇게 텅 빈 적은 전장에서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들어온 걸 눈치챈 그레이언이 고개를 돌렸다.

“왜 넋을 놓고 서 있어?”

“저…….”

로카르드는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잠겨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 더 했다.

“제 아버님과 로아르 백작님이 귀족원에 들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 어찌 되었지?”

“두 사자님의 사과 성명으로 귀족원은 이 일을 불문에 부치기로 했고, 저는 시종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너저분한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고생했다. 로카르드. 두 사자께는 내가 감사의 뜻을 전하지.”

“…….”

로카르드가 말이 없자, 다시 책을 보려던 그레이언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미안해! 너는 처음부터 내 계략을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내가 밀어붙였어.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에게 한 약속은 지킬 테니 걱정 마. 너는 나를 황태자로 만들기만 하면…….”

“로리샤는…….”

로카르드는 그렇게 말하며 떠올렸다.

‘나는 이제 공식적으로, 몹시 정당하게, 그녀를 이름으로만 부를 수 있구나!’

“시녀 자리에서 사임했습니다.”

“그렇겠지. 언제 출궁하지?”

“자격을 잃은 궁인은 즉시 출궁해야 합니다.”

“불러와. 네가 왜 그랬는지는 내가 대신 설명하겠어. 이번에도 그녀에게 신세를 진 것 같으니까. 그녀가 칼린처럼 원한을 가졌다가 뒤통수치는 것도 싫고.”

“다음에 함께 입궁하겠습니다.”

“……?”

그레이언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에, 로카르드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두 사자께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빨리 말하지 못해!”

“저 결혼했습니다. 전하.”

그레이언의 탄성은 한참 후에 터져 나왔다.

“뭐가, 어째?”

로카르드는 공중 어디를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두 사자님이 저와 로리샤를 결혼시키는 것으로 상황을 매듭지으셨습니다.”

“…….”

그레이언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 다음 나직이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제위에 올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구나. 로카르드.”

“……!”

로카르드의 이성이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그레이언이 한 말의 의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신적으로 부하가 걸렸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로카르드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면 저는 로리샤를 제 방에 데려다 놓고 오겠습니다. 전하.”

그는 그레이언의 시선이 제 등에 오래 내리꽂히는 걸 느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 * *

뚜렷한 기억은 없다.

내가 시녀 자리에서 사임하여 지금 출궁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황녀 전하는 내 머리채를 잡으려 덤벼들었다.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네가, 네가 감히! 나를 버리고 가게 둘 줄 알아? 로리샤, 이 못된 것! 너는 내 거라고!’

나는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에리아와 하녀들이 달려 들어와 전하를 말렸다.

소문이 얼마나 빠르게 퍼졌는지 론드 경도 응접실로 들었는데, 그는 몹시 비장한 얼굴로 나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끄덕였다.

마치 ‘잘 가시오, 시녀님.’ 하듯이.

‘흑, 론드 경……!’

에리아는 내 짐을 싸 주며 울었던 것 같고, 나는 내 짐이 황궁 밖으로 나가는 동안 약제실로 갔다.

‘소식 들었어요!’

로이만 실장님은 내가 찾아가자 소녀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후원에서 꺾은 장미였다.

‘실장님은 왜 이렇게 기뻐하시는 거지?’

나는 여전히 멍한 채로 주절거렸다.

‘사임 즉시 출궁하는 법도 때문에 인사를 길게 못 드리게 됐어요. 그동안 잘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실장님. 그리고 론드 경 약도 정기적으로 좀 부탁드릴게요.’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급한 대로 준비했어요. 축하합니다, 로아르 양, 아니, 카이델 부인!’

나는 허억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쳐 달아났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나를 따라오며 윙윙거렸다.

‘카이델 부인. 카이델 부인. 카이델 부인. 카이델 부인. 카이델 부인…….’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카이델 저 3층. 오래된 고급 가구들로 채워진 크고 단정한 방.

커다란 창밖으로는 저택 마당이 보였고, 멀리 한쪽으로는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는 기사들이 수련 중이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왜 여기 있지? ……엄마?”

풀썩 주저앉은 창가의 의자는 참으로 푹신했다. 그 푹신함이 내 비극의 무게를 하찮게 만드는 듯해 원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작은 마님, 잠시 들겠습니다.”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에, 나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났다.

방문객도 내 행동에 놀란 눈치였다. 희끗한 머리를 잘 땋아 말아 올린 노년의 부인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녀는 괜찮은지 확인하듯 나를 죽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저는 카이델 공작가의 하녀장 올가입니다.”

‘아무렴. 하녀장이셔야죠.’

어디들 가든 이런 식이었다. 별장에서 지내다가 백작 부인에게 들켜 백작 저로 끌려갔을 때도, 황궁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어릴 적은 아예 빼자.

어딜 가든 시작은 주인의 수족들이 나를 매질하는 것부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그걸 또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오늘 오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는 있었던 희망이 지금의 내게는 없었다.

결혼이라니. 카이델가의 귀부인은 가정 교사 같은 것은 되지 못한다.

내 미래가 사라졌다.

올가 부인은 대답이 없는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듯이 눈을 굴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올가 부인. 저는 로리샤예요.”

“공자님께서 작은 마님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맞은편 공자님 방보다 이 방이 크니, 결혼식 전에 두 분의 주 침실로 쓰실 방은 상의하셔서 선택해 주시면 그에 맞게 준비하겠습니다.”

“…….”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들려왔다.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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