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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부모들의 선택 (109/155)


107화. 부모들의 선택
2023.06.19.


황제는 두 사자를 불러들였다. 그가 피부처럼 머금고 있던 은은한 미소는 오늘 없었다.

그의 두 사자, 카이델 공작과 로아르 백작은 그의 앞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황제는 귀족원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다 치워버렸다.

“선황께서는 사자를 일곱이나 두셨지. 하지만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어.”

두 사자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선대의 사자들은 각기 파를 나누어 다른 황자와 황녀를 후원하여 황제로 만들려다 멸문했다.

그때 선대 카이델 공작은 지금 황제의 곁에 서는 현명한 선택을 했지만, 선대 로아르 백작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다른 황자 편에 섰었다. 그 죄를 기어이 용서받고 지금의 지위를 일군 것은 순전히 현 로아르 백작의 노력의 결과였다.

황제는 자신의 대에 사자의 수를 줄임으로써 그들의 어깨에 더 큰 부담을 지운 채 치세를 이어갔다. 그나마 도중에 하나를 잃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가문이 동시에 도마 위에 올려져 칼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아직 분노를 다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어 해명하지 않았다.

황제는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런 것을 보아야 하나?”

“…….”

“…….”

“그 둘을 시종 자리에서 해임하고 무기한 근신하게 해.”

두 시종의 해임과 그레이언의 고립은 예정된 순서였다. 아무도 밀리오라의 입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레이언이 새 시종을 들일 수는 있겠지만, 로카르드 카이델만큼 그레이언에게 세력을 붙여 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것은 로카르드의 힘이었다.

두 가문은 이번 일을 소문으로 치부하며 전면 부인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황후파 가문들이 일제히 나서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델 공작은 얼굴 앞에 깍지끼고 고뇌하던 손을 내렸다. 그는 로아르 백작에게서 황제를 차례로 주시했다.

“두 사람을 결혼시키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명예를 도저히 참아넘길 수가 없습니다. 결혼으로 책임진다면 그 음탕한 행위는 단지 너저분한 연애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하나 진실은 아닙니다만.”

황제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매를 일그러트렸고, 로아르 백작은 침음을 흘렸다.

“저 또한 동의합니다. 로리샤는 황녀 전하의 시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카이델가의 작은 안주인 역할이 우선이니까요.”

황제는 찌푸린 채 카이델 공작에게 물었다.

“아내의 신분이 평생 로카르드의 뒤통수를 시끄럽게 할 것이야.”

그러자 로아르 백작이 대답을 가로챘다.

“로리샤가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폐하. 이 정도 선에서 이번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황제는 백작이 하지 않은 말을 이해했다. 그도 이 추문이 경연의 부산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르네가 두 사자 가문을 난장판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두 사자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그들의 요구는 부당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거슬렸다. 그녀는 사생아가 아닌가.

황제는 백작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자신감이군. 백작.”

“신뢰라고 해 주십시오. 폐하.”

카이델 공작이 말했다.

“귀족원에서 사과 성명과 함께 결혼을 발표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이번 상황을 마무리하고, 로카르드의 시종 자리는 유임하겠습니다. 폐하.”

“좋을 대로 해. 이만 물러가. 다들 보기 싫으니.”

두 사람은 즉시 방을 떠났다.

중앙 황궁을 떠나자, 카이델 공작은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로아르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함정에 빠진 기분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

로아르 백작이 카이델 공작을 외진 길가로 불러낸 것은 황제를 알현하기 전인 어젯밤이었다.

백작은 길가에 세운 마차 안으로 공작을 맞이했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이러다 우리까지 연애한다는 소문이 날 겁니다.”

카이델 공작이 뼈 있는 소리를 했으나, 로아르 백작은 부드럽게 답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공작님.”

백작은 말했다.

우리 자식들에 대한 세간의 소문은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면 빠른 시일 내에 두 사람은 시종 자리에서 쫓겨나고, 오를 1황자가 후계 경쟁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로아르 백작은 강렬한 시선으로 물었다.

“그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일일까요?”

두 사자는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황후파에 맞서 제국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함께 하고 있었다.

황후파, 군벌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카이델 공작파, 로아르 백작을 존중하는 나머지 중도 가문 세력으로 파벌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흘러간다면 제국에는 황후파 하나만 남게 되었다. 백작이 그들을 ‘우리’라고 과감하게 칭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황제는 두 사자에게 경연에 직접 개입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자식의 안위에 관한 문제였다.

백작은 나직이 물었다.

“공작님과 저에게는 지금에라도 오를 전하를 선택한다는 대안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하기 원하십니까?”

“지금 무엇을 제안하시는 겁니까?”

카이델 공작은 침음을 흘리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나직이 말했다.

“두 아이를 결혼시켜야 합니다.”

“백작님!”

“둘을 이 추문에서 동시에 구해야 합니다. 특히 로카르드 공자는 그레이언 전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공작 또한 돌연 황궁에 나타난 로리샤 로아르가 밀리오라 황녀를 위기에서 구하고, 경연에서도 큰 역할을 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공작의 속내를 파악한 백작은 간단히 인정했다.

“네, 그 아이는 제 사생아죠.”

“백작님.”

“고귀한 공작가에 사생아 출신 며느리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리고 이 제안을 거절하셔도 로카르드 공자는 잠시 근신 후 제 위치를 회복할 겁니다. 하지만 그사이에 오를 전하가 무엇을 어디까지 차지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

“공자가 반만 귀족인 유능한 아내를 얻는 것과 지금까지 공자가 투자해 온 모든 것을 잃는 것. 어느 쪽의 손해가 더 크겠습니까? 공자는 이미 자신을 그레이언 전하께 바쳤지 않습니까.”

카이델 공작은 고통스러운 침음을 흘렸다.

“잔인한 말씀을 참 태연하게 하십니다.”

“상황이 그러합니다. 잔인하고, 더럽습니다.”

카이델 공작은 흥분을 삼키느라 숨결이 거칠어졌다.

로아르 백작은 등을 뒤로 기대앉으며 살짝 오만하게 말했다.

“저 또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로리샤에게 완벽한 짝을 찾아 주고 싶었지, 이렇게 등 떠미는 결혼을 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로아르 백작은 미래에 로리샤의 독신주의와 맞부닥쳐야 할 날을 떠올릴 때마다 겁을 먹었다.

이 상황은 세 번째 사자에게는 위기였지만, 로리샤의 아버지로서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카이델 공작 또한 아버지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백작의 마차를 박차고 나갔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로아르 백작은 어젯밤 실패로 끝난 공작과 대화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카이델 공작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델 공작은 황제 앞에서까지 고뇌하다 결국 마음을 돌렸다.

황제 앞에서 물러 나온 로아르 백작은 피로한 카이델 공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 나도 모르겠소. 연설문은 백작님께서 쓰시지요.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문장가이시니!”

카이델 공작은 화를 내며 가 버렸지만, 로아르 백작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곧 귀족원이 소집되고, 카이델가와 로아르가의 공동 명의로 사과문이 발표되었다.

두 자녀의 혐의는 누명이었으므로, 사과문은 많은 것을 사과하는 듯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 또 감동적이기는 한, 막연하고도 감상적인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지막에 그 해법으로 로카르드와 로리샤의 결혼을 발표하자 모든 귀족, 심지어 르네 자작도 충격을 받아 반응을 하지 못했다.

발표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카이델 공작은, 장내를 채운 정적 속에서 로아르 백작을 불만스럽게 흘끔 보았다.

그도 로리샤 로아르를 직접 만났으니 그녀가 백작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자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만이었다. 그렇게 영특한 아이가 핏줄까지 고귀했으면 얼마나 금상첨화였겠는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백작이 그를 향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선대의 ‘경연’은 별궁마다 잘린 머리들이 굴러다니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것을 우리 대에서 약간 불만스러운 결혼 정도로 끝낼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모든 결혼은 약간 불만스러우니까요.”

카이델 공작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상처한 아내와 몹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래서 결혼의 만족도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로아르 백작이 ‘약간’이라기에는 훨씬 더 불만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는 중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

카이델 공작은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식들에게 이 급작스러운 사실을 알릴 차례였다.

그렇게 네 사람은 2황자궁 후원에서 만나 선 채로 대화했다.

카이델 공작은 자신의 판박이처럼 닮은 반듯한 아들의 얼굴이 의혹으로 찬 모습을 바라보다가, 겁먹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금발 영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아르 백작을 빼닮은 외모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눈에 서린 저 총기와 의지력도 다른 데서 볼 수 없이 특별했다. 보아하니 체력도 좋아보였다.

‘손주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하지만……. 저렇게 잘나게 태어날 것이면 걸맞은 태를 고를 것이지.’

카이델 공작의 의식이 방황하는 동안 로아르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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