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젊은 영웅의 타락(2)
(108/155)
106화. 젊은 영웅의 타락(2)
(108/155)
106화. 젊은 영웅의 타락(2)
2023.06.18.
귀족원 원로 다수가 황후파였기에, 르네가 귀족원을 소집해 발표권을 얻기까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칼린 앙카르트가 정리해 올린 로카르드의 추문은 입구에 커다랗게 게시되었다. 입장하며 그것을 확인한 귀족들은 모두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르네는 연단에 나아가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위대한 타가르 전쟁 영웅이 이렇듯 범인의 욕망으로 타락하여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다니, 오늘 이 르네 호르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소!”
* * *
“네가 지금 여기서 빈둥댈 때야?”
내 방문을 벌컥 연 밀리오라 전하를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전하?”
“지금 귀족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근신 중인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났나요?”
그녀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고, 나는 불안을 삼킨 채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나 없는 동안 정무에 귀를 열어 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내용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인 모양이었다.
“내가 너 때문에 정말! 이래서 근신을 내렸던 거라고, 알았어?”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찬찬히 알려 주세요.”
“르네 자작이 귀족원을 소집했어. 거기서 귀족의 품위를 해친 죄로 로카르드 공자의 처벌을 주장했다고!”
“…….”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카이델 공자가 한발 늦은 것이다. 아니, 그들이 너무 빨랐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며 진실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우리의 적은 그 시간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가지고 귀족원을 소집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뭘 믿을 수 있는지가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귀족원 분위기는요?”
“황후파 귀족들과 카이델 공작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이 격론을 벌였대. 증거가 있네, 없네 싸우다 로아르 백작이 나서서 중재했어. 황제 폐하에게 정식 조사를 요청하라고 말이야.”
“……황녀 전하, 이게 정말로 귀족원이 소집되고 폐하께까지 보고될 만한 일인가요?”
그러자 밀리오라 전하가 나를 바라보더니 커다랗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은 로카르드 공자가 실제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문제 삼느냐가 문제인 거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경연에 황후 폐하의 세력이 한꺼번에 뛰어든 거네요……. 고급 귀족이 다요.”
“그래. 그레이언 오라버니의 시종을 제거하려고! 그리고 나도…….”
‘오를 전하의 첫 번째 승리인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오를 전하는 이 방법을 쓰려고 그렇게 착착 추문을 쌓아 갔나 보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밀리오라 전하가 짜증을 냈다.
“뭐 하고 있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전하.”
“로리샤! 너는 내 시녀잖아.”
나는 눈치를 잔뜩 보며 말했다.
“근신 중인데요…….”
“하! 내가 이런 애를 믿었다니. 이런 애를 믿고 여기까지 달려왔다니!”
나는 충격에 얼얼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먼저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전하. 진정하세요. 이 일은 그레이언 전하가 해결하실 거예요. 그분은 유능하시니까요.”
“로리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레이언 오라버니가 나를 무시한다지만 오를 오라버니는……! 오를 오라버니가 그레이언 오라버니를 제거하고 승리한다면 난…….”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좀 알아보고 올게요, 전하.”
“그래, 그렇게 해.”
나는 나가려다 문득 다시 돌아섰다.
“그럼, 저 근신에서 풀린 건가요?”
“너는! 이 일을 해결하면 풀어 줄게. 어서 가지 않고 뭐 해?”
나는 얌전히 방에서 나온 다음, 문에 기대 퍼석한 웃음을 지었다.
‘황족들이란 정말.’
하지만 내가 알아보긴 뭘 알아본단 말인가. 황녀 전하 진정하라고 알아보러 가는 척한 거지.
내 머릿속에는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비좁도록 꽉 차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만날 때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함께 있는 광경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가는 우리가 진짜 이상한 사이라는 확신을 줄 뿐이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후원으로 향했다.
내 기운이 얼마나 암울한지, 론드 경은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시녀님?”
“이제는 로리샤라고 불러 주세요. 경.”
“근신에서 곧 풀릴 테니 걱정 마시오, 시녀님.”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저는 황궁에서 쫓겨날 테니까요.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론드 경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쪼그라들어 그런지, 오늘따라 그가 더 거대해 보였다.
“무슨 일이오, 말해 봐요.”
“귀족원에서 카이델 공자님을 귀족의 품위 손상으로 고발했대요.”
“…….”
론드 경은 콩이 나무에서 열린다는 걸 믿지, 그 소리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예요. 공자님이 수도 시내를 누비며 엄청 음탕하게 노셨대요.”
“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분이 진짜로 그랬다면, 세상이 망할 징조인 게 분명하오.”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가 이런 면에서는 사람들의 확실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론드 경은 역겹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도 자작극이 틀림없소. 대체 상대는 어떤 여자요?”
“…….”
“시녀님?”
“저래요. 하…… 하하.”
론드 경은 눈이 휘둥그레져선 말을 잇지 못했다.
“시…….”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제가 안 그랬어요!”
그리고 이 로리샤 로아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면으로 전혀 신뢰받고 있지 못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그러자 론드 경은 몹시 멋쩍게 말했다.
“미안하오. 워낙 믿기 힘든 일이라, 카이델 공자님은 소년 시절부터 보아 온 분이기도 하고…….”
예. 예. 됐어요.
저는 사생아고, 만난 지 고작 몇 달이니까, 됐어요.
론드 경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그 품위 손상죄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오.”
“카이델 공자님은 함정에 단단히 걸렸어요. 명예라는 게, 이런 식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명상을 입은 것 아닌가요.”
“그건 시녀님도 마찬가지잖소. 이런 소문은 여성에게 더 치명적인데.”
“저야 로아르 가문에서 저를 부정하면 그만이에요. 사생아가 사고를 치면 흔히 그러듯이요.”
“아니, 백작가의 명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론드 경은 못마땅하다고 침음을 흘렸다.
나는 이때라고 신이 나서 나를 족보에서 들어내려 할 백작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론드 경이 중얼거렸다.
“크흠. 고약해. 고약한 일이군.”
“네. 고약하네요. 이거나 저거나.”
“그래서 어쩌실 셈이요?”
“제가 무슨 수가 있겠어요. 이 일은 황제 폐하의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으니, 저는 나중에 발가벗겨져서 거리에서 돌을 맞거나 하겠죠.”
그 꼴을 상상해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 마을 아이들이 내게 돌을 던졌을 때, 나는 엄마를 위해 그 돌을 집어 들고 반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그게 사실인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짧은 인생, 이렇게 덧없이 살다 가라고 우리 엄마가 날 낳은 게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건 내 탓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백작님의 얼굴은 아마 죽어서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아.”
나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내가 쉰 것 중 최악의 한숨이었다.
론드 경은 침통하게 말했다.
“내가 도울 게 있다면 말하시오, 시녀님.”
내가 그에게 얼마나 더 ‘시녀님’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론드 경.”
* * *
깊은 밤, 칼린 앙카르트는 제 방 책상에 촛불을 켜고 앉아 있었다.
르네 자작으로부터 귀족원의 상황을 상세히 전해 듣고서, 그녀는 로리샤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르네 자작의 개입은 그녀의 부친이 그에게 광대하고 비옥한 땅을 바친 대가였다.
그녀가 카이델 공자와 비슷한 남녀 배우를 고용해 수도 여기저기서 음란한 짓을 벌이게 한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승리해야 했고, 지금까지 어긋나 버린 그녀의 계획과 잃어버린 기회 모두를 보상받아야 했다.
앞으로 어느 황족 곁에도 둥지를 틀 수 없다면, 아카데미 조기 졸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촛불 빛이 만드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비밀을 곱씹으며 두려움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오를은 그녀를 이용하고 버리려 했지만, 보라.
그는 결국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녀로 인해 귀족원이 움직였다. 황제도 이 일로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적 로카르드는 무려 첫 번째 사자의 아들이었다. 새끼 사자를 끼고 으스대던 전쟁 영웅 그레이언 황자의 명예에도 잔뜩 잔금이 났다.
이것이 그녀의 힘이었다.
칼린 앙카르트는 제힘으로 다시 날아올라 오를의 창틀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제는 그곳에 둥지를 틀어야 했다.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버릴 순 없어. 내가 선택할 거야.’
칼린은 그렇게 다짐하며 촛불을 껐다.
그 밤에 오를이 스스로 제 꼭두각시가 되어 열성을 다한 갈색 머리 계집애를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은, 막대한 뇌물을 받은 르네 자작도 전해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