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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젊은 영웅의 타락(1) (107/155)


105화. 젊은 영웅의 타락(1)
2023.06.17.


“차는 그레이언 전하 혼자 드셨어요. 저는 긴장해서 입술도 못 댔어요.”

“나는 댔는데, 입술.”

카이델 공자가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때, 나는 무심결에 약초 이파리를 하나 뜯다가 그대로 얼어 버렸다.

너무 큰 소리로 ‘허억’ 하고 숨을 들이쉬어 버린 게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이 상황을 극복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못 들은 척하기.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살다가 황족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카이델 공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레이언 전하는 공자님에게는 고맙다, 사랑한다, 그런 말씀 자주 하세요?”

“소름 끼친다거나 목을 치겠다는 말씀은 자주 하십니다.”

“공자님에게도요?”

그것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야 나니까 황녀 전하에게 욕을 먹는가 보다 하지만, 그가 그런 취급을 받을 줄이야.

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타가르를 이해하는 요령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레이언 전하께서 당신을 때로 거칠게 대하시더라도 이해해요. 그분은 당신에게 악의가 없으니까요. 분명.”

자기는 죽이려고 안 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요. 앞으로 그분을 다시 뵐 일이 있겠어요?”

로카르드는 뚱한 얼굴로 말하는 로리샤를 바라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 * *

그가 잠시 카이델가로 돌아가 가신들에게 해적 잔당 수색 작전의 보고를 받은 다음 환궁했을 때, 그레이언은 발코니에 늘어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모습은 그레이언이 생각에 빠졌을 때 하는 것이라, 그는 웃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여자.”

“칼린 앙카르트 말씀입니까? 전하께 야멸차게 차이고 원한에 찬……. 후훗.”

“시끄러워.”

로카르드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레이언 곁에 앉았다.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 로카르드.”

그레이언이 불쑥 건넨 말이 로카르드를 당황하게 했다.

그레이언은 이따금 감상에 빠지곤 했다. 로카르드는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그레이언은 그의 기분을 무시하듯 말을 이었다.

“내게는 여자 로카르드가 필요해.”

“전하, 말씀을 좀……!”

로카르드가 진심으로 화를 냈으나, 그레이언은 음울한 기색으로 제 말을 이었다.

“제 앞가림 확실하고, 나를 보호해 줄 만큼 강하고 유능한 것은 물론이지. 나를 쉼 없이 긴장시키면서도 두렵게 만들지는 않을 여자. 의무가 아니라 당연함으로 나를 모실……. 물론 같이 있을 때 짜증이 나지 않아야 해.”

그는 그레이언의 말을 들으며 가벼운 오한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의 주군이 그를 두려워하여 때로 위협적으로 느낀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또한 때로 그레이언에게 긴장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황제와 신하 사이의 그러한 긴장감은 숙명이 아닌가.

그것은 개선하거나,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씹어 삼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을 리…….’

“그 사생아처럼 말이야.”

“…….”

“무엇보다, 그녀가 저 자신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나는 참 흥미로워.”

로카르드는 내내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얼굴로 담백하게 물었다.

“그녀가 전하를 긴장시켰단 말입니까?”

“무슨 대답을 할지 예측할 수 없으니,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긴장이 되더군. 그런데 그게 불쾌하지 않았어.”

로카르드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고 대답했다.

“확실히, 로리샤가 훨씬 예쁘죠. 칼린 앙카르트보다는.”

그레이언은 그제야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았다. 격의 없는 호칭이 신경을 거슬린 것이었다.

“로리샤?”

“스캔들의 공동 주연인데 이름 정도는 끈끈하게 불러야죠.”

로카르드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그레이언은 고개를 획 돌려 그를 외면했다. 무심결에 여자 이야기를 한 걸 수치스러워하는 몸짓이었다.

“꺼져. 로카르드.”

그가 나가자마자, 그레이언의 얼굴은 싸늘해졌다.

그것은 주군과 신하가 아니라, 수컷끼리만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로카르드는 그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로카르드가 그 말고 다른 무엇을 신경 쓴다는 사실이 그토록 거슬릴 줄이야.

* * *

로카르드는 며칠 만에 만나는 로리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그녀의 천진함을 처음으로 거슬려 했다.

세상을 꽉 짜인 틀 안에서만 바라보던 그레이언 타가르를 흔들어 깨워 놓고, 뒷감당할 자신은 있는지.

그는 문득 그녀를 납치했던 해적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쌈해서 어디 가둬 놨으면 좋겠군.’

어쨌든 그건 나중에 집중할 문제였다. 지금은 수도를 돌아다니며 지저분한 사기극을 벌인 범인을 찾는 게 먼저였다.

오를 황자 아니면 칼린 앙카르트.

로카르드는 나이에 비해 인간을 보는 통찰이 깊었다.

그는 오를 황자가 떠들썩한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런 역겨운 수단을 동원할 테지만 그것은 최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칼린이 그 정도로 물러나 패배를 곱씹고 있을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 * *

“상관없어요. 앞으로 그분을 다시 뵐 일이 있겠어요?”

나는 약초 이파리 하나를 따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카이델 공자는 그런 내가 웃기는지 미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생길수록 더 빈정 상하나 보다.’

내가 그런 비논리적인 결론을 내렸을 때, 그가 되물었다.

“그러다 그레이언 전하를 자주 뵙게 되면 어쩌려고요.”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 인생에 타가르는 이미 충분해요. 어서 경연이 끝나서 황궁을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그러다 다시 끌려 들어오면요?”

“공자님! 절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네.”

“……하.”

나는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었다.

“전 이만 가서 근신하려고요. 공자님은 지금부터 무조건 계속 공개 석상에만 계세요. 사람 많은 회의, 파티, 살롱, 어디든요. 그러면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문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겠죠.”

“지금 저를 걱정하는 겁니까?”

“아니……!”

나는 울컥해서 지금 농담이 나오냐고 말하려 했는데, 그러면 아무래도 걱정하는 듯이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카이델 공자는 화려한 몸짓으로 예를 올리더니 나를 배웅해 주었다.

* * *

르네 자작이 1황자의 침소로 들었을 때, 오를은 침상에서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고 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며칠간 열병을 겪었고 근육에 힘이 빠져 거동을 제대로 못 했다.

“전하, 상태가 좀 어떠십니까?”

“하루 이틀 일인가. 며칠 이러다 또 며칠 나아지겠지. 무슨 일인가?”

“기다릴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야.”

오를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르네는 서신을 내밀었다. 오를은 창백한 얼굴로 그것을 훑어보며, 점점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칼린이 연출한 연극의 결과 보고서였다. 거기에는 로카르드 카이델과 로리샤 로아르의 각종 추문과 수도 경비대의 출동 일지 따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로카르드가 이렇게 더럽게 노는 자였단 말인가?”

“칼린 앙카르트가 보냈습니다. 전하.”

“로카르드가 계집질을 어찌하든……. 지금 칼린이라고 했나?”

오를의 눈이 커지자 르네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맞추어 왔다.

“이것은 앙카르트가가 전하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어찌할까요?”

“하.”

오를은 경멸인지 즐거움인지 모를 웃음을 띤 채 서류를 다시 훑어보다 말했다.

“로카르드가 로아르 백작 저에도 드나들었다고? 세 번째 사자도 이 일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백작 저 하인들에게 접근해 보았으나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인들이란 돈 몇 푼이면 무슨 소리든 하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경비대가 풍기문란 신고를 받고 시내에 몇 차례 출동한 것은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카이델가의 압력은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들은 계속 해적 잔당 소탕에 집중하느라 바빴습니다.”

오를의 눈매는 잔뜩 가늘어졌다. 병증에 의한 급격한 기력 저하는 그 눈매를 더 잔인해 보이게 했다.

“카이델을 음해해? 그 앙카르트 계집애가 단단히 돌았군.”

르네 자작은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는 단지 세간의 소문을 모아 온 것뿐입니다, 전하. 2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골치 아픈 두 시종을 동시에 제거할 소문을 말입니다.”

르네의 음성은 은근하며 나긋했다.

“새 시종이 들어온들, 그 둘만 하겠습니까, 전하. 그러면……. 경연은 수월하게 전하의 것이 될 겁니다.”

오를은 제 시종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면서도 미심쩍게 물었다.

“그녀는 어째서 자작에게 연락한 것이지?”

“앙카르트 자작과 사업 관계로 연이 있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전하. 이 기회를 잡을지 말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제철소 건설 공사가 시작된 이상, 네 번째 경연은 언제라도 재개될 겁니다.”

“…….”

르네 자작이 앙카르트가에서 어떤 뇌물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를은 침상에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을 알았어도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일은 첫 번째도 마지막도, 오직 경연이었다.

오를은 나직이 물었다.

“자작은 어찌 생각하나?”

“시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증거가 없어도 믿게 만드는 것이 소문의 힘입니다. 게다가 젊은 영웅의 타락이 아닙니까.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거부하고 싶어 하는 자는 없습니다. 전하.”

“좋아. 맡기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전하는 타가르의 진정한 작은 태양이십니다. 부디 어서 건강을 어서 회복하십시오.”

르네 자작은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리고 곧장 귀족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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