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누군가 함정을 파고 있어 (106/155)


104화. 누군가 함정을 파고 있어
2023.06.16.


“그럼. 박수 소리에 저택이 흔들릴 정도였어. 영식들에게 받은 꽃이 수북이 쌓여서 하인들이 트레이로 실어 가야 했다니까?”

“어머, 그랬구나!”

때마침 에리아가 차를 들여 주어서, 나는 호들갑을 떨며 차를 권했다.

“마셔. 향이 좋을 거야. 미샤.”

그녀는 차를 마시고 한층 진정한 듯 말했다.

“답장은 왜 안 했어? 당연히 사죄의 답장을 보내야 하지 않아?”

이제는 편지라는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웃었다.

“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어. 뭐라고 사과할지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가 버리고 말았지 뭐야. 성년식에 못 가서 정말 미안해.”

그러자 미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내 성년식도 빼먹고 카이델 공자님과 뭐 했어?”

며칠을 고민해도 모르겠더니, 일이 닥치니까 그럴싸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쥐어짰다.

“가다가 마차 사고가 났어. 로아르령 초입의 한적한 길에서 그러는 바람에 대여 마차도 못 잡고……. 그러다가 카이델 공자님이 나와 마차를 타서 재수가 없나 보다고 해서 나도 화를 냈고, 그러다 싸우고…….”

“하! 욕했어? 카이델 공자님에게?”

“어……. 음……. 응!”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될 대로 되라, 자포자기 상태였다. 요 며칠 계속 거짓말을 일삼았더니 배가 아픈 기분마저 들었다.

미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불쌍한 카이델 공자님!”

‘뭘, 불쌍할 것까지야…….’

내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흘끔거리자, 그녀는 발끈해서 말했다.

“네 욕이 어떤지 알아? 인제 와서 하는 말인데, 네 그 독한 욕을 듣고 나면 며칠은 잠을 설친단 말이야. 소화도 안 되고, 비슷한 단어만 들어도 경기가 난다고!”

“어……. 미안.”

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내 욕의 파괴력을 확인한 것이 싫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티를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아, 카이델 공자님이 로아르가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을까!”

‘아니래. 내 욕 때문에 날 좋게 본 것 같대. 미쳤지?’

나는 뚱한 얼굴로 공중을 바라보다가 미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더니 못되게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너, 이틀 전 밤에 어디 있었어?”

“황궁에 있었지. 당연하잖아.”

“미치겠네!”

나는 예감이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미샤?”

“이틀 전 밤에 수도 번화가에서 너와 카이델 공자님을 봤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야.”

“무슨 개소리래?”

내가 저도 모르게 막말을 하자 미샤가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에 장신, 독수리 문장이 달린 옷을 입은 남자와 아담한 금발 머리 여자가 번화가 골목에서 아주 뜨거운…….”

“뜨거운?”

“애정 행각! 껴안고 막……. 이상한 소리랑……. 사람들이 신고해서 수도 경비대까지 출동했다. 공자님을 체포했는데 카이델가의 영향력으로 눈감아 줬다는 소문도 돌아.”

“무슨 소리야, 난 황궁에 있었어. 카이델 공자님도 그러실걸? 얼마 전 기사 봤지?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바쁘셨을 분이 무슨 애정 행각을…….”

순간 내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끼쳐 올라왔다. 카이델 공자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었다.

미샤는 말했다.

“에트랑, 술집, 골목. 너와 공자님을 봤다는 목격담이 한둘이 아니야, 로리샤.”

에트랑은 몰라도 나머지는 말도 안 된다. 이 소문에서는 음모의 썩은 내가 풀풀 났다.

“카이델 공자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추문에 휘말린 적이 없었어. 가끔 이상한 여자들이 나타났지만, 결국엔 진실이 밝혀졌고. 여자들은 그분의 결백을 확인하며 더 열광했어.”

나는 미샤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그녀는 나를 보며 찬찬히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 일은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거야.”

미샤는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정말 아니야? 지난번 공자님이 우리 집으로 숨어든 것도 그렇고…….”

“미샤, 누군가 함정을 파고 있어.”

“뭐?”

미샤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떴다.

“누가 감히 카이델 공자님에게 그런 짓을 꿈이라도 꾼단 말이야!”

“그분을 싫어하는 사람이?”

그러자 미샤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건 너를 위한 함정이 분명해, 로리샤.”

나는 한편으로는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미샤가 내 불행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떡할 거야?”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미샤는 굳은 얼굴로 일어났다. 이것이 누구를 노린 음모이든, 경연과 관련된 것일 테니 그녀가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알려 줬으니까 간다?”

“으응. 잘 가. 고마워.”

우리는 그렇게 석연치 않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미샤가 이 수상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 내 머릿속을 제일 먼저 스친 것은 의심이었다.

카이델 공자가 약속을 깨고 내 대역을 내세워 연극을 계속하는 걸까?

하지만 그를 한나절이라도 만나 본 사람이라면 그런 의심을 할 수는 없다. 내가 그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저열한 방법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이미 근신 중이었고, 더는 이 경연의 변수가 될 수 없…….

“돌겠네.”

나는 내가 그동안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위치를 말이다.

나는 제국의 중심, 황궁에 있었다.

내가 황궁에 있지 않았다면, 카이델 공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거래하여 그레이언 전하를 다시 한번 해전의 영웅으로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를 전하가 이 사건에 내가 영향을 끼쳤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되었다면, 그는 나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이 궁에 들인 것이 본인이니,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쓰겠지. 나를 해치면서 주변 사람들도 함께 공격할 수 있는 방법으로.

“…….”

아무리 그래도 이건 타가르가 저지르기에는 지나치게 추잡한 술수였다.

하지만 겨우 과자 때문에 여동생의 마차 바퀴를 뽑아 버릴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온건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이 음모의 사악하면서도 영리한 점은 그 부분이었다. 나와 카이델 공자 두 사람을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

나아가서는 그의 주군인 그레이언 전하도 한껏 물오른 명성에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하……. 이렇게 반격당하나?”

나는 망연한 기분으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는 칼린 앙카르트가 낸 신문 기사를 역이용해 그레이언 전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오를 전하는 나와 그를 동시에 함정에 빠뜨리고 있었다. 나와 스캔들을 일으켜 나를 경연에서 빼내려는, 카이델 공자의 계략을 역이용해서 말이다.

어디든 학습이 빠른 사람은 있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습득력 좋은 사람이 오를 전하라는 사실이 굉장히 유감이었을 뿐.

‘결국 카이델 공자를 찾아가게 생겼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혼란스러워서 아직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오늘은 생각을 정리한 후, 내일 그를 찾아가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

* * *

우리는 로이만 실장님의 약초밭에서 만났다. 남의 눈을 피하기 가장 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약초밭으로 온 카이델 공자는 나를 보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보고 싶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내가 알아서 찾아갔을 텐데.”

“하…….”

그가 너무 기정사실처럼 말해서, 나는 순간 얼떨떨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오늘은 농담할 틈 없어요, 공자님.”

그는 농담이라는 말에 항의하려다가 내 심각한 얼굴을 보고 집중했다.

“소식 들으셨어요? 우리에 대한 소문이요.”

“‘우리’ 소문이요?”

“풍기문란으로 수도 경비대까지 출동할 정도였대요. 우리가 수도를 돌아다니며 과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대요.”

“그런 건 내 취향 아닌데?”

“공자님! 지금 심각하다고요. 카이델가가 체포된 공자님을 힘으로 빼돌렸다는 말까지 돈대요. 누군가 공자님을 음해하고 있어요.”

카이델 공자의 눈매는 금세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제 의도가 아닙니다, 로아르 양. 저는 당신을 이런 추문에 끌어들이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저는 지금 공자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공자님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카이델 공자는 로이만 실장님이 약초를 다듬을 때 쓰는 허름한 벤치에 앉아 나를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미안해요.”

그가 너무 정색하고 사과하는 바람에, 나는 멋쩍어서 시선을 피했다.

그는 내가 이 추문에 상처 입고 그를 원망하고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를 뭐로 보고는, 참.

나는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오를 황자님이 공자님과 저를 함정에 빠트리고 있어요. 공자님의 계략을 역이용하면서요.”

“…….”

하지만 그는 어쩐지 내 말을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이런 짓을 할 다른 사람이 있어요? 설마 해적 잔당 중에 이 정도로 영악한 자가 있을까요?”

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카이델가와 수도 경비대가 그동안 수시로 검문검색을 해 왔습니다. 수도에 남은 해적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카이델 공자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 얘기만 합니까? 그 일은 제가 해결할 테니 잊어요. 로리샤 양.”

보아하니 그에게는 분명히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자기가 책임지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서 심술이 났지만, 이 일에 개입해서 그와 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잘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옆자리에 조금 떨어져 앉자 그가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

“그레이언 전하와 차를 마셨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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