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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한가한 황자 (105/155)


103화. 한가한 황자
2023.06.15.


그때 하인이 내게도 차를 내왔고, 그레이언 전하는 다시 검을 닦으며 말했다.

“심심해서. 너도 논다기에.”

“…….”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말에 다섯 개쯤의 욕설을 동시에 떠올렸다.

이놈의 사생아가 동네 똥강아지도 아니고! 내가 엄연한 귀족 영애였으면 이렇게 함부로 불러 댔겠냔 말이다.

“이 검은 나와 아마타전을 함께 했어.”

“영광스러운 검이군요.”

“영광으로 치면 네가 내게 준 것 또한 만만치 않지. 로아르. 폐하께서도 흡족해하고 계신다.”

“…….”

“로카르드가 말했어. 이번 신문 기사가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나는 순간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레이언 전하가 자기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내 목을 뎅강!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하찮고 안쓰럽게 보일까를 열심히 고민하여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부끄럽습니다.”

“해적의 엉덩이도 어쩌다 보니 발길질했나?”

“헉!”

로카르드 카이델, 이 인간은 황자 전하에게 어디까지 나불거린 건지!

설마…….

갑자기 동트는 숲에서 격한 입맞춤 속에 들었던 카이델 공자의 거친 숨소리가 다시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거야. 설마!’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뭘 그리 얼굴까지 붉혀. 살려면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

‘모르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안도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네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 웃었어. 황궁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 말이야.”

나는 몹시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마구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그레이언 전하는 아마도 이번 일에 감사를 표하려고 나를 부른 것 같았다. 타가르가 감사라니, 어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간 로카르드가 너를 꽤 괴롭힌 걸로 아는데 그래도 도움을 주다니. 그것은 순수한 선의인가?”

역시,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짓느라 용을 쓰며 말했다.

“부채 상환입니다.”

“부채 상환?”

“황궁 사냥터에서 카이델 공자님이 저를 구해 주신 것을 전하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일. 그럼 내가 너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었군. 로카르드의 덕을 본 것뿐이니 그에게 감사해야지.”

‘그게 그렇게 된다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그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최근에 내가 배운 것이 하나 있어.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

사람을 앉혀 놓고 혼자만 이야기할 거면 날 뭐하러 불렀담. 그냥 앞에 돌멩이 하나 갖다 놓고 떠들지.

내가 뚱한 가운데, 그레이언 전하가 갑자기 옳은 말을 했다.

“로카르드는 자주 옳지만 다 옳은 건 아니야.”

당연합니다, 전하!

“아무리 잘나도 사생아는 사생아고, 돈에 기대 신분 상승하려는 하급 귀족은 하급 귀족인 거야.”

“…….”

하.

별 개똥 같은 소릴. 오늘은 그 얘기를 왜 안 하나 했다.

역시 나는 타가르와는 상성이 맞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뚱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온 힘을 끌어모았다.

“신분에 따라 바칠 수 있는 충성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농사꾼의 충성과 기사의 충성이 어찌 같을까.”

“…….”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이 과연 충성심뿐일까? 로아르.”

헉, 지금 나한테 물은 거였어?

그가 갑자기 내게 시선을 마주쳐 와서, 나는 얼굴에 당황을 드러내고 말았다.

“제가 어리석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충성을 모르는 자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대신 매질을 당하고 위험을 감수하더니, 최고의 교육을 받은 자가 제 충성을 거래하려 들더군. 그것이 진실이야.”

‘충성을 모르는 자라 죄송합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레이언 전하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이 대화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이미 길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도 자신의 충성심을 거래하려 든 자는 칼린 앙카르트였다.

이번 사건은 그레이언 전하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며 주변 모든 것을 재점검해 보는 중인 것 같았다.

검신을 감싸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면포가 멈추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도움에 대해 예를 표하지. 물론 밀리오라가 알면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황공한 말씀입니다.”

사과를 꼭 이렇게 얄밉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나는 일단 머리를 숙였다.

‘고마우면 빨리 돌려보내 주세요, 전하.’

“그래서, 너는 그 만족감을 얻고 있나? 그것을 매일 느껴?”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난번에 네가 말했잖아. 최선을 다한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밀리오라를 모신다고.”

나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다.

뭘 쪼잔하게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그러는지.

게다가 말의 초점이 미묘하게 엇나간 것이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걸 꼬집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 앞에 놓인 차는 한 모금도 비워지지 않은 채 식어 가고 있었다.

그레이언 전하의 행동은 대체로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었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악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잘 대답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매일 느끼지는 못합니다, 전하.”

“밀리오라가 너를 내쳐서?”

“아닙니다. 전하.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보통은 시간이 다 지난 다음에 느껴지더라고요. 아, 그때 그러지 말걸, 그때 그렇게 할걸, 하는 식으로요.”

“흐음.”

“그래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나중에 큰 후회는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나 싶을 때는 자주 있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걸 최선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커서…….”

나는 민망함을 꾹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면 사는 데 별로 불만이 남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살면 되는구나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태도로군.”

그의 대답은 퍽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언뜻 스치는 동요를 본 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 거대한 회한. 그리고 억울함, 슬픔 따위가 마구 뒤죽박죽인 그런 감정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일 것이다. 그는 타가르다. 밀리오라 전하와는 입장이 다른 그가 그런 뒤죽박죽인 마음으로 살아갈 리 없었다.

몇 번 더 닦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는 느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성공한 것 같은가? 밀리오라를 후회 없이 모셨나?”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살짝 쉬고 말았다.

“저……, 근신 처분당했습니다. 전하.”

그가 어깨를 움직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군. 그러면 다시 돌아가도 네 선택을 최선이라 여길까?”

이 자식이 사람을 불러 앉혀 놓고 놀리고 있다.

“몇 가지 시도는 새로 해 볼 수 있겠지만,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기운이 빠졌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내가 카이델 공자에게 가진 부채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뻔뻔한 인간이 달라질 리도 없고. 칼린 앙카르트는 더 말해서 뭘 할까.

카이델 공자와의 키스만은 내가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서라도 피하겠지만, 그레이언 전하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근신을 막아 줄 수도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나는 침착하게 말하면서도, 이미 엉덩이를 살짝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언 전하는 내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빌어먹을…… 놈.

“네 생각엔 경연이 언제 재개될 것 같은가, 로아르.”

나는 잠시 고민했다. 백작님이 일러준 고급 정보를 그에게 알려 주어도 될지 아닐지.

하지만 그런 정보를 독점하는 건 내가 상대보다 앞서 나가려 할 때 의미가 있다.

다만 백작님이 내게 조언을 주었다고 하면 백작님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것을 내 생각인 척해야 했다.

“세 번째 경연은 시작 고지만 있었습니다. 전하.”

그레이언 전하의 눈썹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절대 보기 원하지 않던 그 표정이었다.

“돌아가도 좋아. 오늘 대화 즐거웠다. 로아르.”

“황공합니다.”

나는 정중히 예를 갖추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레이언 전하의 응접실에서 나와 회랑으로 들어서자 바람에 내 식은땀이 식어 서늘했다.

* * *

미샤가 찾아온 건 며칠 후였다. 에리아가 그녀의 방문을 알렸을 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떨어야 했다.

그녀의 항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고민하는 사이에, 그녀가 못 참고 찾아온 것이다.

미샤 로아르는 남을 위해 손끝도 까딱하지 않고 큰 애다. 그런데 날 위해 땀까지 흘리며 춤을 가르쳐 줬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가 야심 차게 연 성년식에 불참했으니…….

이게 다 해적 때문이다.

“지옥에서 소금물에 팔팔 끓을 해적 놈들!”

내가 버럭 욕을 했을 때 문이 열렸고, 미샤는 화가 나 뾰족한 얼굴로 물었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미샤! 아니? 방금 아무 말도 안 했어.”

“하긴 네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안 그래?”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댈 핑계를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샤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그녀가 날 정말로 미워했다면 황궁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샤, 성년식은 잘 치렀니? 못 가서 미안해.”

“잘 치렀지. 내가 너 없다고 뭘 못할까 봐? 그렇게 생각했어?”

“아이, 아니지. 물론 아니지. 네 바이올린 연주는 분명히 멋졌을 거야, 안 그래?”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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