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칼린의 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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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칼린의 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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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칼린의 묘안
2023.06.14.
그녀는 원한으로 눈을 이글거리며 지금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칼린이 산발에 퉁퉁 부은 눈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하인들이 질색했다. 하지만 말을 거는 자는 없었다.
그녀는 부친의 집무실로 찾아가 말했다.
“아버지, ‘붉은 눈물’을 꺼내 주세요.”
“칼린, 무슨 소리냐?”
“제철소 투자권을 되찾아 와야죠. 복수는 그다음부터예요.”
* * *
오를은 황후를 찾아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니, 오를?”
“제 선물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직접 가져왔습니다.”
“……!”
상자를 연 황후는 입을 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를! 세상에, 오를!”
황후는 ‘붉은 눈물’을 꼭 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숨결마저 흐트러졌다.
그러자 오를이 일어나 그녀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칼린 앙카르트가 이걸 바쳤습니다. 제가 가질 물건이 아닌 걸 이제야 깨달은 거죠.”
황후는 적다이아몬드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물었다.
“제철소 투자권은 돌려주었니?”
“네.”
“어리석은 아이 같으니. 제 것이 아닌 것을 이리 오래 쥐고 있었다니.”
오를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마 그녀는 앞으로 그레이언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저에게 다시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쓸 겁니다. 경연도 잠잠한데 당분간은 그걸 구경하며 지내 볼까 해요. 황후 폐하.”
“그러려무나. 너는 좀 더 즐겁게 지낼 필요가 있어.”
황후는 오를과 함께 흐뭇하게 웃었다.
12. 뜻밖의 해법
나는 근신 처분 후 방과 후원을 오가며 빈둥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자 지겨워졌다.
나는 오랜만에 휘니드 로이만 실장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로아르 양. 오랜만이군요.”
“실장님, 제가 뭐 도울 것 없나 하고요. 제가 오늘 시간이 많아서요.”
그러자 실장님은 바쁘게 약을 조제하다 말고 나를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근신 중이라서요. 헤헤.”
내 가식적인 웃음에 실장님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내가 바닥에 흩어진 약초 껍질을 모아 비질하기 시작하자 어깨를 으쓱하더니 작업을 계속했다.
“어쩌다 근신 처분을 당했어요?”
“음……. 품행 불량이요?”
“아니, 로아르 양처럼 조신한 아가씨가 어디 있다고!”
“……그러게요.”
나는 카이델 공자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자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그리고 로이만 실장님에게도 살짝 실망했다.
나더러 조신하다니, 나는 실장님이 입에 발린 소리를 못 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묵묵히 약초 껍질을 내다 버린 다음, 작업대 구석에 쌓여 있는 약초 더미를 가져와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수작업에는 수다가 필수다.
“그런데 실장님은 카이델 공자님과 어떻게 친해지게 되셨어요?”
로이만 실장님이 보기보다 수다를 좋아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맞았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야긴데…….”
“해 주세요, 해 주세요.”
실장님은 주저하면서도 내가 조르자 못 이기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로아르 양, 이건 비밀이랍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어요?”
“그럼요, 그럼요.”
내가 격하게 끄덕거리자 실장님은 헛기침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번 물꼬가 터지니 실장님의 이야기는 쓸데없이 상세했고, 이야기가 길을 잃고 이리저리 건너뛰기도 했다. 아무튼 요약하면 이야기는 그랬다.
몇 년 전 실장님은 이 연구실에서 연금술 실험을 하다가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마침 근처에 있던 카이델 공자가 정신을 잃은 그를 불타는 연구실에서 들쳐 업고 나왔다.
그는 연금술사로서 연구를 계속할 생계 수단으로 황궁 약제실에서 일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 사고로 연구와 생계가 모두 끝났다고 울먹거렸다.
실장님은 자신이 하던 연구에 대해 설명했는데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온갖 분야에 학식이 깊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모두 연금술 연구에 적용할 수 있을까 싶어 공부한 것들이라고 했다.
아무튼 정신을 차린 그가 연구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보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황궁 병사들이 달려왔다.
카이델 공자는 그들에게 자기가 약품을 엎질러 일으킨 사고라고 사과하고 모든 피해를 변상했다고 한다.
“카이델 공자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러시더군요. ‘저는 꿈꾸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실장님.’”
그리고 실장님은 엄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연금술은 꿈의 영역이 아닙니다. 숨겨진 비의와 인간의 투쟁일 뿐.”
“아…….”
이제 그의 플라스크에는 약액이 예쁘게 고여 가고 있었다.
“아무튼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어도, 내가 보기엔 그냥 사람 돕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긴 해요…….”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하다. 뭐가 예쁘다고, 그는 내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제 업무가 업무다 보니 처음에는 경계했어요. 혹시라도 누가 무슨 약을 지어 갔는지 정보를 알아내려 하신다든가 할까 봐…….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순수한 우정을 쌓게 된 거죠.”
‘폭탄 화살을 만들어 주는 것만 빼고요?’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로이만 실장님도 그걸 떠올렸는지, 갑자기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무릎에는 어느새 약초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놀라운 이야기네요.”
“로아르 양은요? 공자님과의 인연이 어찌 됩니까? 그날 밤 다시 만났을 때 솔직히 놀랐어요.”
황가의 서고에서, 실장님은 나를 수상하게 여겼었다. 약재상 점원이 공자님과 여기서 뭘 하는가 하고 말이다.
나도 카이델 공자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게, 우연이었어요.”
“우연이요?”
“길 가다가 공자님이 웬 여자 손목을 붙잡고 있길래 치한인 줄 알았지 뭐예요. 그 여자는 사실은 소매치기였는데!”
“아이고, 저런!”
“제가 거기다가 욕을 했다니까요.”
“로아르 양이요?”
실장님이 너무 크게 놀라서,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가 아무래도 나를 단단히 오해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실장님은 근엄하게 말했다.
“로아르 양이 정의감에 평소에 못 할 행동을 용기 내서 한 거군요.”
“아……. 예, 뭐…….”
실장님은 아무래도 나를 오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로아르 백작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다시 마주쳤는데, 글쎄 그분이 카이델가의 새끼 사자님이라지 뭐예요? 그때 심장이 멎을 뻔했다니까요.”
“그럴 만도 하지요! 흠……. 공자님이 로아르 양을 왜 특별하게 대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예에? 특별이라니요!”
나는 억울해서 약초를 꽉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실장님은 무덤덤했다.
“카이델 공자님을 본 제국 영애들의 반응이 뭐겠어요?”
“‘꺄악’? ‘엄마’? ‘사랑해’……?”
물오른 대화에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더니, 말한 내가 다 낯이 부끄러웠다.
실장님은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헉……. 제가 공자님에게 반하기는커녕 초면에 욕을 해서 공자님이 절 특별하게 대한다는, 지금 그 말씀이세요?”
“바로 그거예요. 로아르 양.”
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실장님은 그분을 대체 얼마나 심각한 변태로 보시는 거예요?”
“흠. 로아르 양, 연금술과 남자 마음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나는 그 공통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내가 지금 그의 대답을 경멸할 거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요.”
“예상하지 못한, 폭발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거죠.”
“…….”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리고 다듬은 약초를 바구니에 담아 치워 놓고 바닥에 떨어진 껍질은 쓸어서 버렸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실장님.”
그는 내가 다듬은 약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많이, 미안해서 어떡해요.”
“아휴, 별말씀을요.”
하지만 내 대답에는 영혼이 없었다.
연금술과 남자 마음이 뭐?
아무튼 나는 실장님에게 좀 실망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싫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 또 놀러 올게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로아르 양.”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막 문을 노크하려 주먹을 든 하인과 눈이 마주쳤다.
“로아르 시녀님이십니까?”
“그런데요?”
“지금 2황자궁으로 드시지요.”
* * *
나는 잔뜩 긴장한 채 2황자궁으로 향했다. 같은 타가르라도 황녀 전하와 그레이언 전하가 내게 주는 긴장감은 종류가 달랐다.
그레이언 전하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절대 유쾌하게 끝날 리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카이델 공자를 만나는 것도 껄끄러워서 더 부담스러웠다.
그레이언 전하는 발코니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새하얀 면포로 검을 닦고 있었다. 주변을 흘끔 보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없었다.
그는 내가 인사하자 검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와 잘 닦여 번쩍이는 장검은 특이한 대비를 이루었다.
‘나한테 쓰려고 검을 닦고 계신 건 아닐 거야. 그렇지?’
내 시선이 검에서 떨어지지 않자, 그레이언 전하가 냉랭하게 말했다.
“내 거야.”
“네. 전하……. 아름다운 검입니다.”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누구 목을 칠 생각 없으니 걱정 말아.”
“감사합니다. 전하.”
내 대답이 내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나는 민망해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그레이언 전하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밀리오라에게 근신 처분을 받았다지?”
“제가 모자라서 일어난 일이라,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그게 네 탓은 아니겠지.”
그레이언 전하는 살짝 빈정대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는 카이델 공자가 무슨 짓을 벌이고 다녔는지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닌 걸 알지!
자주 느끼는 거지만, 이 두 사람 쓸데없이 친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오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