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한가한 시녀 (103/155)


101화. 한가한 시녀
2023.06.13.


“…….”

“에이, 밀리오라 전하가 저보다는 경을 훨씬 더 많이 의지하시는 것 다 알아요.”

“크흠.”

“그러지 말고 말씀해 주세요, 네?”

나는 기왕에 놀고먹게 된 것, 확실히 놀자는 기분으로 론드 경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는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너무 적극적이자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몹시 축약되어 있었다.

“내가 황녀궁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황가의 소풍이 있었소.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습니다.”

“어머, 세상에!”

“오를 전하가 황녀 전하의 마차 축을 헐겁게 해서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마차가 길가로 처박혔소.”

“예에……?”

론드 경이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나는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미운털 박힌 여동생이라고, 그런 짓을 장난이라고 하다니, 오를 전하는 제정신인 거냐고!

시간이 지나도 타가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아 내가 마차를 밀어 전하를 구해 냈소. 전하께서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헉! 그때쯤이면 아마타전의 부상 때문에 겨우 운신만 하실 때 아니었어요?”

론드 경은 그때의 고통이 떠오르는 듯 살짝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그때 부상이 더 심해지긴 했소. 의료원에서도 별수가 없다고 하여 몸을 키워 버틸 수밖에 없었소.”

기사가 전쟁터도 아니고, 누구나 안전하리라고 믿는 황궁에서 몸을 더 망가뜨리고 말다니…….

“그걸 어디다 말씀도 안 하셨죠?”

“시녀님이 내게 약을 줬잖소.”

론드 경은 무덤덤했고 나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게 충성인데.

그러고 보면 나는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론드 경의 태도와는 달랐다. 약속과 책임을 넘어선 저런 헌신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있는 것이다.

나는 그레이언 전하가 어째서 나를 비난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헛헛하게 물었다.

“오를 전하는 왜 그러셨던 거예요?”

“오를 전하를 위해 준비된 과자를 밀리오라 전하가 실수로 먹어 버리셨다더군요.”

“…….”

나는 기가 막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론드 경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황가는 여러모로 보통의 가정과 다른 겁니다. 시녀님.”

정상적인 가정과 다른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화가 날 뿐이지만.

* * *

멀리 새의 맑은 지저귐 속에, 오를은 그의 병증에 좋은 약차를 마시며 신문을 펼쳤다.

곧 그는 손가락을 바르르 떨며 흔들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수십 년간 악명 높았던 공해 해적 자멸의 진상은 이렇게 밝혀졌다. 바다의 쓰레기들은 위대한 타가르 황가의 영웅적인 자손의 손에 처단된 것이다.

아마타전의 영웅은 여전히 제국의 영웅으로 건재하고 있으니, 제국의 백성들은 그 사실을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있다.」

“황후 폐하 드십니다!”

하녀가 다급히 고했을 땐, 황후는 이미 화가 난 걸음으로 들어온 후였다.

그녀는 오를의 떨리는 손과 신문을 보고 두렵게 말했다.

“괜찮니, 오를? 상태가 나빠진 게 아니니?”

“크흠…….”

황후는 사람을 불러 진정제를 가져오게 한 다음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달랬다.

“카이델 공자가 제 아버지가 빚지는 꼴을 보아 줄 수 없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오를, 황위는 백성들의 인기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니 평정을 잃지 말거라.”

“이게 다 그 계집 때문이 아닙니까. 비천한 것이 제멋대로 나서 카이델가를 공격하니 일이 이리되지 않았습니까!”

황후는 파르르 떠는 오를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론을 짓듯 말했다.

“걱정 말거라. 앙카르트가는 이 일을 책임지게 될 거다.”

오를은 흥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떠도는 의구심은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황후 폐하, 이것이 사실일까요? 그레이언이 로카르드와 단둘이 공해로 나가 해적단을 쳐부수었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어느 해군도 성공한 적 없는 일입니다.”

“오를. 그레이언이 저지른 일은 반역이다. 공해상의 불법 군사 행동이야.”

그러나 오를은 신문을 집어 던졌다.

“황후 폐하, 백성들이 그놈을 제국의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폐하 말고 또 누가 그리 불렸습니까!”

신문에 걸려 쏟아진 찻잔에서 흐른 찻물이 탁자 아래로 쪼르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황후는 흥분을 추스르지 못해 벌떡 일어나 돌아가 버렸다.

그사이 안으로 들어온 하인은 오를을 보고 겁을 먹어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칼린 앙카르트 영애가 입궁 허가를 청하였습니다. 오를 황자 전하.”

오를은 고함을 쳤다.

“앙카르트는 제 돈더미 위에서 썩어 버리라 해!”

* * *

제3황궁 마차 대기 장소에서, 칼린은 긴장 속에 입궁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로카르드와 그레이언은 제3황궁 발코니에서 그런 칼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레이언은 조소를 띠고 말했다.

“네가 가 보겠어? 양보하지.”

“기꺼이요.”

로카르드는 삐뚠 웃음을 걸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1황자궁 하인이 칼린에게 가는 걸 보고 일부러 대기 장소로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하인이 칼린의 마차로 다가갔을 때, 그녀는 마차 안에서 마부가 사 온 신문을 막 받아 읽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금세 새하얗게 질려 갔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1황자궁 하인은 마차 문을 두들기고 말했다.

“칼린 앙카르트 양, 입궁 허가는 불허되었으니 돌아가십시오.”

칼린은 충격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자 하인이 덧붙였다.

“오를 전하께서는 지금 심기가 불편하십니다. 그럼.”

오를이 가서 글자 그대로 전하라고 명령하지 않은 한, 하인은 ‘가서 돈더미 위에서 썩어 버리시랍니다.’라고 전할 이유가 없었다.

칼린은 오를 황자의 ‘친우’가 되기 위해 그레이언 황자를 적으로 돌렸건만, 로카르드의 반격으로 양쪽에서 버림받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하인이 돌아간 후, 칼린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때 로카르드가 웃으며 다가왔다.

칼린은 때마침 나타난 로카르드의 여유로운 얼굴을 보고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앙카르트 양. 이른 시간인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

칼린은 한마디도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입안의 살을 씹었다.

로카르드는 평소처럼 매력적으로 웃고 있었지만,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분노로 새파란 빛을 토하고 있었다.

칼린은 그런 눈빛을 받느니 차라리 그가 욕을 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오기가 피어올랐다.

‘아니, 나는 여기서 포기 못 해.’

칼린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쥔 채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마치 로카르드를 만나 반가운 듯 말했다.

“이제 우리는 온 제국이 다 아는 동지네요. 카이델 공자님.”

“…….”

“공해의 해적을 물리치는 그레이언 전하의 대업에 저희 앙카르트가가 ‘붉은 눈물’을 빌려드렸으니까요.”

그녀는 그 증거라는 듯 신문을 들어 보였다.

“앙카르트 양.”

“오를 전하가 저를 협박한 다음 버리셨어요. 부디 그레이언 전하께 전해 주세요. 저를 믿지 못하시더라도 제 복수는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거라고.”

로카르드는 칼린의 갈급한 눈빛, 경직된 표정과 파르르 떨리는 입가 따위를 천천히 음미했다.

그의 목소리는 퍽 깊고 부드러웠다. 그는 가장 잔인한 말을 온화하게 뱉을 줄 알았다.

“저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주군의 신뢰를 잃은 적이 없었는데, 당신의 외도는 너무 위험했어요. 칼린 앙카르트 양.”

“…….”

“그럼, 아카데미에서 만나죠.”

로카르드가 황궁이 제집인 양 여유롭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칼린은 이를 갈았다.

그녀는 마차 문을 쾅 닫으며 고함쳤다.

“전속력으로 달려! 즉시 아버님을 만나야 해.”

* * *

칼린이 앙카르트 저에 도착했을 땐, 하인들의 표정이 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집무실로 들어가자 머리를 싸매고 있던 자작이 고함을 쳤다.

“행정관이 갑자기 내 투자권 구매를 중단시켰다. 내 지불 능력을 증명할 자료를 전부 새로 작성해서 내라면서! 그놈들은 오를 황자 전하가 무섭지도 않단 말이냐?”

“…….”

“이놈들이 뇌물을 원하는 거야! 그걸 다 준비하다간 내가 지불 기한을 맞추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거다. 칼린, 지금 당장 입궁해서 오를 황자 전하를 뵙거라!”

“그만 하세요.”

“당장 가서 오를 전하께 행정관 놈들을 꾸짖어 주시라고 해!”

“아버지, 그만 하세요!”

칼린의 고함에, 그제야 자작이 시선을 맞춰 왔다.

“그건 오를 전하의 명이에요. 뇌물을 달라는 게 아니라고요.”

“뭐라…… 고? 하지만 네가 카이델 공자를 나락으로 떨어트렸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레이언 전하도 날개를 잃은 것인데, 어째서 우리를 박대한단 말이냐!”

그녀는 입술을 씹다가 중얼거렸다.

“타가르를 우습게 본 죄죠.”

칼린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으나 온몸의 털이 곤두선 듯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좀 전에 본 로카르드의 경멸적인 눈빛이 저를 베고 또 베는 기분이 들었다.

“타가르? 황족이면 대수야? 누구보다 욕심 많고 비열한 인간들이!”

그녀는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를 오를 황자에게 갈취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카이델 공자의 즉각적인 반격은 대단하여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였다.

지독한 패배감보다 수치심이 더 살 떨렸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하다못해 오를 전하의 협박을 그레이언 전하와 상의했었더라면!’

칼린은 결국 엎드려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우는 소리에 하녀들이 달려왔으나 잠긴 문을 두드리다 그냥 돌아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칼린은 퍼석하게 말라 갈라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이건 모두 카이델 공자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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