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지저분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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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지저분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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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지저분한 소문
2023.06.12.
“흠.”
“이미 철광석과 관련한 아가엘과의 협상 조인은 끝났고 제련공도 모두 타가르 땅으로 넘어왔어요. 그레이언 전하의 무모함을 비난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분이 일궈 낸 성과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없어요. 오히려 백성들은 그분의 과단성과 용기를 영웅시할 거예요.”
“…….”
“아마타전의 영웅은 귀환하여서도 여전히 영웅적인 전투를 벌이고 계셨던 거라고요.”
나는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제게서 물러나실 건가요?”
카이델 공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나는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유혹하는 척하는 것도, 해적과 싸움박질을 한 것도 모두 그레이언 전하를 위해서였다.
내 제안은 이제부터 진행될 소리 없는 경연에서 그레이언 전하를 다시 한번 돋보이게 할 기회였다. 그러니 그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은 겁이 날 정도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안 받아들이죠. 당신에 대한 가짜 유혹은 오늘부로 끝났습니다.”
휴우. 나는 어깨를 다 들썩이도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제가 전에 말했을 겁니다. 제가 집착이 좀 있다고요.”
“공…… 자님?”
“이 경연이 끝났을 때 당신 거취는 내 것이니, 그리 알아요.”
“잠깐만요. 공자님?”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획 돌아서 칼바람을 일으키며 가 버렸다.
“하아.”
나는 긴장이 풀려 벤치에 털썩 앉았다. 꼭 사기당한 기분에 헛웃음이 나왔다.
산들바람, 쾌청한 하늘. 명랑한 새의 지저귐.
지저분한 음모가 난무하는 건 인간 세상뿐이었다.
* * *
터덜터덜 걸어 내 방으로 돌아가자 에리아가 황녀 전하의 호출을 알렸다.
나는 복도에서 심호흡을 하여 표정을 정리했다. 드디어 카이델 공자를 떼어 냈지만 하나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황녀 전하.”
그녀는 소파에 앉아 나를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최근에 사이가 좋아진 후에는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살짝 긴장했다.
내가 눈치를 보고 있으니 그녀가 말했다.
“피곤해 보인다?”
“아닙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본가에 다녀왔으면 빠릿빠릿하게 일해야지, 뭘 하는 거니?”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떠올려 보았으나,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땐 일단 사과하고 보는 게 편했다.
“그래서, 미샤 로아르의 성년식은 어땠니?”
“성대했습니다. 미샤가 바이올린도 연주했고요.”
“아아, 그러니? 그런데 미샤는 왜 네가 자기 성년식에 안 왔다고 화를 냈을까?”
“……!”
밀리오라 전하는 로아르가의 편지 봉투를 내 앞으로 툭 던졌다.
열어 보니 미샤가 카이델 공자님과 내가 성년식에 오지 않아서 분노했다는 내용을 한가득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네게 춤을 가르쳐 준 줄 아느냐는 비난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 불참하여 손님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냐고, 내 정신 건강의 온전함을 의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밀리오라 전하는 목소리를 바르르 떨며 말했다.
“로카르드 공자는? 둘이 거짓말하고 함께 황궁을 나가서 뭐 했어? 마차를 같이 타고 나갔다는데!”
“그야 행선지가 같아서, 물자 절약 차원에서…….”
“로리샤!”
나는 패닉에 빠져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앙카르트를 물리치고 카이델 공자를 내게서 떼어 냈다고 기뻐했는데, 미샤가 폭탄을 던지다니!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 말했다.
“황녀 전하, 오해세요. 사정이 복잡한데…….”
“어디 말해 봐, 그 복잡한 사정.”
“…….”
황녀 전하의 날카로운 추궁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델 공자가 수도 외곽에서 해적 잔당을 물리친 사건은 곧 신문에 실릴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카이델 공자가 행한 일에 가담했다는 걸 언급했다간, 그레이언 전하가 칼린 앙카르트에게 보내려던 자객을 내게 보낼 테니까!
게다가 황녀 전하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꼼짝없이 카이델 공자와 하룻밤 밀회를 즐겼다는 의심을 견뎌야 할 모양이었다.
“너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알아?”
“……!”
“내가 이상해서 알아봤더니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아? 차마 입으로 옮길 수도 없을 정도야. 그가 미샤 로아르의 성년식에 불참한 이유도 네가 적녀의 성년식을 망치려고 그를 유혹했기 때문이라던데?”
“제가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황녀 전하는 냉소적이었다.
“나는 네가 카이델 공자를 유혹할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없어. 로리샤. 그와 너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니까. 하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는 그런 소문이 나지 않을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황녀 전하.”
“상관없어. 나는 이런 추문을 일으킨 시녀를 곁에 둘 수 없어. 사람들이 나와 너를 싸잡아 얕볼 텐데, 내가 왜 너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해?”
“……!”
“하지만 너를 황궁에서 쫓아내지도 않을 거야. 그랬다간 황후 폐하가 내가 경연을 포기했다고 몰아세우실 테니까.”
“전하…….”
“그러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휴가는 얼마든지 내고. 경연이 끝날 때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만 말아.”
내 목구멍에 걸린 말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나는 힘없이 그곳을 나왔다.
내가 나가자 황녀 전하가 에리아를 불러 티 파티 멤버들을 부르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나는 갑갑한 마음에 후원으로 갔다. 론드 경은 거기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말 다 회복되신 모양이네.’
나는 거구의 기사가 수련하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그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밀리오라 전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내가 슬그머니 벤치에 가서 앉았지만, 론드 경은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목검에 집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카이델 공자를 열렬히 원망했다.
결국 황녀 전하가 나를 버리게 만들다니!
하지만 내게 그를 원망할 권리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가 내 목숨을 구해 준 것만 두 번? 세 번? 기억도 잘 안 난다. 목숨을 구해 주는 것과 버금가는 도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녀 전하는 경연이 끝날 때까지는 나를 명목상 시녀로 황궁에 두실 모양이니, 내가 가정 교사 자리를 얻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을 듯했다.
카이델 공자와의 이상한 소문이 나 버렸지만, 그런 건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기 마련이다.
스캔들이란 언제나 현재형이니까.
그렇게 보면 그가 내게 끼친 실질적인 해악은 내 감정적 실망감과 내게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내 명예의 추락 정도였다.
하지만 기분이 한없이 찜찜했다.
“하아…….”
나는 결국 내가 그를 진짜로 미워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마 내가 내 성년식 생일의 기억을 가진 한은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로리샤 로아르. 한심하구나.”
“뭐라고 했소?”
론드 경이 턱에서 땀방울을 떨어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예?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제가 물었소만.”
“아……. 죄송해요. 수련 계속하세요. 저는 가만히 바람 쐬고 갈게요.”
하지만 그는 목검을 벤치에 내려놓더니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말해 보시오, 시녀님.”
“…….”
나는 눈을 굴리다 시선을 회피했지만, 실은 나도 대화가 필요했다.
“황녀 전하께서 저한테 화가 나셔서 근신 처분을 내리셨어요. 경연이 끝날 때까지 얼굴도 보이지 말라고요.”
“어쩌다가?”
론드 경의 목소리가 꽥 하고 올라가서 나는 움찔 놀랐다.
“그게…….”
빌어먹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로카르드 카이델 나쁜 놈!’ 말고는.
“그게 아마, 제 생각에 경연은 계속 지지부진할 거예요. 그러니까 경연 걱정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론드 경.”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나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황녀 전하에게 경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분이 티 파티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나쁜 일이오. 그것이 잠깐의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전하가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 있겠느냔 말이오.”
“아…….”
“시녀님이 온 후로 좀 달라지셨다 했더니,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나는 카이델 공자를 언급했다간 론드 경이 그를 더 미워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내가 황궁에 온 뒤로 나를 퍽 아껴 준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유하게 표현했다.
“제가 경연에서 유일하게 여자 시종이다 보니, 카이델 공자님과 대화하고 하는 모습이 사교계에 오해를 산 모양이에요.”
“쳇. 그게 어제오늘 일이라고!”
론드 경은 화난 듯 중얼거렸고, 나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수년 전에는 카이델 공자의 비밀 약혼녀라는 여자가 사교계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 적도 있소. 물론 공자님은 그녀를 체포하고서야 처음 보셨소만.”
“저런. 잘생긴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네요.”
나는 내 일로 론드 경을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표정을 정리하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어떡하겠어요. 경께 황녀 전하를 부탁할 수밖에요.”
“전하께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시오?”
“티 파티…… 요.”
그러자 론드 경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나는 괜히 먼 산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화제를 전환하기에도 적당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경은 어떻게 황녀 전하와 친해지게 되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