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로리샤의 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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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로리샤의 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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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로리샤의 묘안
2023.06.11.
“…….”
공작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기도 하지. 너는 폐하 앞에서 내가 경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지 모를 거다.”
“아버님을 보는 오를 전하의 시선이 따뜻해지면, 아버님이 운신하시는 데도 여유가 생기겠군요.”
“아마도.”
“그럼, 저를 칭찬…….”
“닥치렴. 로카르드.”
“네, 아버님.”
공작은 아들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 함정을 판 자가 누군지 아느냐?”
“앙카르트입니다.”
“앙카르트 자작이?”
“아니요, 그 딸이요. 자작을 움직이는 것도 그녀입니다.”
“아카데미에서도 늘 순위를 다툰다더니, 네가 호적수를 만났구나.”
로카르드는 나가려다 찌푸리며 돌아섰다.
“저는 그녀와 순위를 다툰 적 없습니다. 아버님. 그녀가 저를 따라오려 애쓰고 있을 뿐.”
카이델 공작은 아들이 드러내는 오만함이 싫지 않았다.
“입궁하는 거냐?”
“네, 아버님. 지금 그레이언 전하가 흥분하셨을 겁니다.”
“잠깐, 로카르드.”
로카르드는 다시 부친을 향해 돌아섰다. 의아한 얼굴의 미청년에게, 공작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사교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나는 오히려 그쪽이 더 걱정스럽다, 로카르드.”
“…….”
“제브론 호텔에서 만났던 그 아이지? 실제로는 무슨 사이냐?”
로카르드는 잠시 공중을 보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님은 제가 공해로 나가도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더니, 이 문제는 추궁하시는 겁니까?”
“네 자식에게 내 지분이 없다고 말할 셈이냐?”
“…….”
여자와 만나면 당연히 아이가 생길 텐데, 카이델가의 적손 일에 내가 왜 상관 못 하느냐는 뜻일 터다.
로카르드는 부친의 말법이 하도 기이하여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아직 자식 계획이 없습니다. 아버님.”
“확실하냐?”
“네. 확실합니다.”
다른 계획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카이델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말거라, 로카르드.”
“네, 아버님.”
* * *
나는 신문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어떻게 그날 밤 사건이 이렇게 빨리 기사로 날 수가 있는 건지!
게다가 여기 언급된 귀족은 누가 보아도 카이델 가문이었다.
‘공자님이 함정에 빠진 거야. 누군가 공해 사건을 아는 게 틀림없어!’
신문을 쥔 내 손은 마치 남의 손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로이만 실장님에게 2황자궁에 전갈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제3황궁 후원에서 만났다.
카이델 공자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직 지난 밤을 새운 피로를 풀지 못했고, 황궁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공자님, 괜찮으세요? 어떡해요! 대체 누가 공자님을 함정에 빠트린 거죠?”
“진정해요, 로리샤 양.”
“제가 어떻게 진정해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내게로 상체를 쑥 기울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지금 저를, 걱정하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보고 싶어 달려왔어요? 로리샤 양.”
“아니, 그게 아니고……! 집중 좀 하세요, 공자님.”
그러자 그가 눈썹을 불쑥 기울였다.
“그러면 저를 걱정도 하지 않는 겁니까? 반역자와 동급으로 간주되는 공해 해적과 밀거래라니, 저는 최악의 경우 사형당할지도 모릅니다.”
“헉!”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버리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지금 나를 한껏 놀려 먹는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겁에 질리고 말았다.
“걱정, 걱정한 것 맞고요, 저도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건의 진실을 아는 한 명의 백성으로서 걱정하는 거지…….”
“…….”
하지만 카이델 공자의 가늘어진 눈은 내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런 동물적인 눈빛을 그에게서 볼 줄이야.
갑자기 내 온몸의 털이 다 솟는 것 같았다.
“공자님!”
“걱정 말아요. 다 잘 해결되었으니까.”
아무리 그가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도, 나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요?”
거짓 누명이라면 단번에 깨끗이 벗어날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사건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실제로 해적과 장물 거래 교섭을 했고, 그것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해적들은 다 죽어 버린 후였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말했다.
“제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를 회수했습니다.”
“정말…… 요?”
“정말요.”
나는 긴장이 풀려 바로 근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그는 마치 우리가 함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웃으며 하늘을 감상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허탈함을 느꼈다.
“대체 누가 제보한 거예요? 오를 전하요?”
“오를 전하의 시녀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가요.”
“…….”
“그녀가 경연의 새 변수가 되었으니 당신에게도 말해 주죠. 나를 밀고한 건 칼린 앙카르트 양입니다. 오를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해서요.”
“하!”
“그녀는 당신과도 악연이죠? 그러고 보니 우린 공통점이 참 많아요, 로리샤 양.”
“예. 그러네요오?”
나는 이제 어이없음과 허탈함 속에서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그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바짝 은근하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강조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엉덩이를 슬쩍 움직여 그에게서 떨어져 앉은 다음 물었다.
“그레이언 전하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세요? 공자님께 화내지는 않으세요?”
“…….”
내 물음에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걸 보니, 그레이언 전하가 엄청나게 난리를 친 모양이었다.
“앙카르트 양에게 자객이라도 보낼 기세이셨습니다.”
“어머.”
우리가 앉은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이만 실장님의 약초밭이 있었다.
바람에 은근히 실려 오는 약초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뒤끝을 장렬히 늘어뜨려 복수하고 어쩌고 하는 건 내 성질과는 맞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우리 거래해요.”
“싫어요.”
“어머? 무슨 대답이 그렇게 빨라요?”
“이젠 우리는 서로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아는 사이입니다. 우리 같은 사이에는 거래가 성립할 수 없어요.”
나는 또 악을 쓸 뻔한 걸 초인적인 힘을 내어 꾹 참고 말했다.
“저를 유혹하는 연극은 그만하세요. 대신 칼린 앙카르트에게 복수하게 해 드릴게요.”
“그녀는 이제 오를 전하의 사람입니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요.”
“저는 함부로 건드리셨잖아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사나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어느 부분을 두고 그렇게 느낀 거죠? 처음임을 감안하더라도, 저는 신중하고 섬세하며, 몹시 유능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그건 인정하지만……. 으아아!”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 같아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짜증이 나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이런 순간일 것이다.
카이델 공자가 내가 괴로워하는 동안 괜히 먼 산을 보는 것도 더 미웠다.
나는 울먹이는 기분으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말했다.
“다시는 그 일에 관한 언급을 듣고 싶지 않아요, 공자님. 제가 말한 건 저와 스캔들을 낸다는 공자님의 계략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요즘 하도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보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벤치에 앉았다. 그러자 그도 다시 내 곁에 앉았다.
너무 기운이 빠져 그런지 내 목소리는 퍽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공자님, 그런 건 솔직함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당신 앞에서 그다지 솔직해지려고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만.”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거라고요.”
“우리는 그 밤에 진실을 나눴고, 그편이 전보다 훨씬 기분 좋지 않았습니까? 로리샤 양은 제가 거짓말을 하기 원해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이합체시 편지를 내가 썼다고 고백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그도 자신이 라보리 시하를 질시했던 걸 고백하고 나서 홀가분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용기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순수한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대답을 떠올리지 못하고 그를 외면했다.
나는 그가 거짓말하기를 바랄까, 아닐까.
나는 그걸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속이 상했다. 대신 내가 뭘 원하는지는 뚜렷하게 알았다.
“거래하실 건가요, 거절하실 건가요?”
“…….”
“공자님?”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불만스러웠지만 지금은 내가 먼저 튕길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진실을 공개하세요.”
“로리샤 양.”
“그레이언 전하께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기사로 내세요. 대신 거기서는 앙카르트가가 ‘붉은 눈물’을 비밀리에 대여해 준 걸로 해야 해요.”
카이델 공자는 내 말에 반박하려는 게 분명한 표정이었으나, 조금 뒤에 깨달은 듯 눈을 천천히 크게 열었다.
“모든 것이 그레이언 전하의 영웅적인 계획이었다고요?”
“앙카르트가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천만 골드를 건 거고요.”
카이델 공자의 입가가 음모가의 웃음으로 길어졌다.
“그러면 앙카르트가는 오를 전하에게서 버림받겠군요.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앙카르트가가 그레이언 전하를 후원한다고 믿는 한, 오를 전하는 그녀를 곁에 두실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레이언 전하께서는 그녀를 지옥처럼 생까 주시는 거죠! 굳이 그것까지 말해야 한다면, 복수를 위해 추적해 온 해적을 공자님이 해치웠다고 하세요. 사실이잖아요.”
“생까요……?”
“무시한다고요! 그러면 칼린 앙카르트 같은 애들은 분해서 잠도 못 자고 이불 속에서 데굴데굴 구를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