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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로카르드의 실수 (100/155)


98화. 로카르드의 실수
2023.06.10.


그레이언은 로카르드가 얼굴을 굳히며 등을 곧추세우자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나는 그렇게 사람 간 보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 없어. 게다가 앙카르트라니, 타가르의 명망을 어디까지 추락시키란 말이냐. 내 시녀 자리는 너보다 훨씬 믿을 만한 자에게 이미 주었다고 했어.”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이 로리샤를 믿을 만하다고 표현한 것이 귀에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점을 언급할 때가 아니었다.

“전하, 그녀가 ‘붉은 눈물’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과연 보석이 궁금해 불러들이신 게 맞는 겁니까? 아니면 전하와 저의…….”

그레이언은 그제야 소름이 돋아 입을 다물었다.

칼린 앙카르트가 그들이 ‘붉은 눈물’을 훔쳤던 사실을 두고 오를 형님과 거래를 했을까?

문제는 보석 절도보다는 공해상의 불법 군사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빌미로 오를과 거래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레이언은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폐하도 묵인하시는 일이지. 그 사건이 제국에 얼마만큼의 이익을 가져왔냔 말이야. 그녀도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아.”

“멍청하지 않으니 문제인 겁니다. 그녀는 그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크흠.”

“그녀가 황후 폐하께 ‘붉은 눈물’을 보인 것이 확실합니까? 그걸 전하께만 보이며 오를 전하와 거래하는 척, 전하를 압박한 것은 아닙니까?”

그레이언은 칼린이 ‘붉은 눈물’이 든 상자를 자기 앞에 열어 보인 의도를 읽지 못했던 것부터 화가 났다.

그런데 칼린이 자신을 이중으로 기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로카르드는 로리샤가 납치된 숲에서 쌓인 피로 때문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이번 일에서 제 주군이 더 자존심을 세우고 당당하게 굴기를 바랐다. 그래도 이 미묘한 타이밍에서는 그레이언이 조금 더 간을 보았어야 했다.

그녀도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와서는!

“아직은 섣불리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칼린 앙카르트라면 경연이 끝날 때까지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신중하지 않아. 저돌적이지.”

로카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저는 나가서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 * *

타르간지의 기사는 유명한 보석 ‘붉은 눈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 비운의 ‘붉은 눈물’은 대부호 앙카르트 자작의 저택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후 세간에는 이 천만 골드짜리 목걸이가 다시 공해의 해적 수중에 흘러 들어갔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공해를 공포에 떨게 하던 해적단의 괴멸은 내막이 밝혀진 바가 없으나, 그로 인해 해적은 ‘붉은 눈물’을 거래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해적 잔당은 앙카르트 자작의 천만 골드짜리 보물을 가지고 제국 본토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수도 외곽의 음침한 숲속 창고에서 제국인과 ‘붉은 눈물’을 거래하려 했으나, 남은 것은 불탄 건물과 해적의 시신뿐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과응보라는 교훈을 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에 있다.

그 악취 나는 건물의 불법적인 거래와 해적들의 죽음의 현장에, 대를 이어 제국에 헌신하는 가장 명예로운 가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황제 폐하를 보필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타가르의 귀족이 진귀한 보석에 눈이 멀어 해적과 장물을 거래하려 했다는 혐의는 그들을 존경하는 많은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주고 있다.」

오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신문을 테이블에 놓았다. 만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그가 읽은 신문은 황궁 하인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바친 것이었다. 그 신문에는 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오를은 이미 읽은 카드를 다시 한번 집어 읽었다.

「오를 전하께 제 마음을 바칩니다.

-칼린 앙카르트」

“하…….”

오를은 칼린을 협박했을 때, 그녀가 그레이언에게 주려던 선물을 저에게 바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레이언이 제 것을 빼앗기고 분노를 추스르지 못해 방황하는 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심 많은 계집애가 이렇게 유별난 선물을 준비할 줄이야.

기사에서 묘사한 대로 ‘대를 이어 제국에 헌신하는 가장 명예로운 가문’이라고 하면 백이면 백, 카이델가를 떠올릴 터였다.

르네 자작은 새벽에 입궁하려 탄 마차 안에서 신문을 보고 즉시 수도 경비대로 방향을 돌렸다.

수도 경비대에서 입궁한 자작은 자신도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타르간지의 암시가 정확했다고 오를에게 보고했다.

카이델.

해적들의 거래 장소에서 발견된 것은 카이델가의 문장이 새겨진 재킷이었다. 고가의 최고급 예복이라 카이델가의 가신이나 기사의 것일 수 없었다.

첫 번째 사자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다. 보나 마나 로카르드 카이델, 그 겁대가리 없는 새끼 사자가 과욕을 부린 것이다.

오를은 참지 못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 그레이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사이 들어온 황후가 신문을 들어 읽더니 오를을 빤히 보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카이델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자가 대로했다고요.”

“카이델 공자가 그랬단 말이니? 그가 왜 ‘붉은 눈물’을 노렸지?”

황후의 말투가 너무 날카로워서, 오를은 얼굴이 살짝 찌푸려질 정도였다.

“황후 폐하, 이건 과거 시점의 기사입니다. 지금 ‘붉은 눈물’은 그 갈색 머리 계집애의 손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어요.”

“그렇다면야.”

황후는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쏘아보았다.

“이건 무슨 소리니?”

“이것이 칼린 앙카르트가 용서를 비는 방법인 듯합니다. 그녀가 이 기사로 로카르드의 뒤통수를 쳤어요.”

“제 아카데미 친우의 등을 온 제국이 다 알게 찌르다니. 나는 이렇게 당돌한 아이에게는 통 마음이 가지 않는구나.”

“모후께서는 그녀가 ‘붉은 눈물’을 바치기 원하셨던 거지요?”

오를은 부드럽게 추궁했지만, 황후는 못 들은 척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무게를 재는 일이다, 오를. 폐하는 첫 번째 사자를 적으로 돌릴 수 없어.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카이델 공작에게 빚을 만들어 두렴. 아들의 죄를 덮어 주겠다고 해.”

“이 기회에 그레이언의 머리이자 팔다리인 로카르드를 꺾어 버리는 게 옳습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릅니다. 황후 폐하.”

“그러면 첫 번째 사자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는 공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귀족도 경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고요.”

황후는 오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복수를 위해 산을 불태우고 바다를 말려 버릴 것이다. 카이델 공작이라고 다를까.”

“감히…….”

“오를, 황가의 힘을 믿는 것은 좋으나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인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황후는 어떤 흥분을 억누르며 말하고 있었다. 오를은 그것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어째서 동요하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캐내려고 그녀와 맞설 타이밍은 아니었다.

오를은 차분히 대답했다.

“황후 폐하의 조언을 감사히 듣겠습니다.”

* * *

“어디다 옷을 흘리고 다니는 게야!”

“…….”

“검을 바르게 쥐고 가문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주변을 바르게 정리 정돈해야 한다고 했다. 제 옷가지 하나 챙기지 못해서야!”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님.”

카이델 공작의 집무실.

정자세로 서서 부친의 질책을 듣던 로카르드는 흘끔 눈치를 보았다.

로카르드는 그동안 제가 해적 소탕을 위해 거액의 재정과 사람을 빼내 가는 걸 부친이 몰랐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부친을 사랑하는 점이었다.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그의 부친만큼 인내심과 배포가 큰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지금 공작의 질책 방향이 살짝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려면 똑바로 하라. 이런 사소한 부주의로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공작은 못내 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탕 때렸다.

로카르드가 물었다.

“수도 경비대에서는 연락이 없는 겁니까?”

제국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요직에는 카이델 가문 출신이 다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국에 숨어든 해적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 함께 작전 중이기도 해서, 카이델가는 수사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미 기사가 난 데다 르네 자작이 나보다 먼저 경비대를 방문했다.”

로카르드는 칼린의 마른 이목구비를 떠올렸다.

이 기사는 그녀의 작품이 틀림없었다. 그레이언 황자에게 거절당하자마자 오를 황자에게 구애의 선물을 바치다니, 그레이언 황자의 거절에 대한 그녀의 복수는 이토록 빠르고 과감했다.

‘제길.’

그때 카이델 공작이 책상 위에 종이로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르네 자작이 이걸 보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로리샤가 납치되었던 창고에 두고 온 재킷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그가 해적 잔당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르네 자작이 이걸 들고 황제 앞이나 귀족원 회의에 나아가 처벌을 탄원하는 대신 돌려주다니.

로카르드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공작이 말했다.

“네 녀석 덕에 내가 1황자 전하에게 빚을 졌다. 이 빚에는 이자가 많이 붙을 거다, 로카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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