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칼린의 양다리
(99/155)
97화. 칼린의 양다리
(99/155)
97화. 칼린의 양다리
2023.06.09.
오를에게 ‘붉은 눈물’을 선보인 후, 출궁을 위해 마차를 타러 가던 칼린 앞에 황궁 하인이 나타났다.
“잠시 따르시지요.”
“방금 알현을 마치고 가는 길이야.”
“다른 궁으로 드시라는 분부입니다.”
칼린은 자신을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즉각 깨달았다.
2황자 그레이언.
그녀는 잠자코 그를 뒤따랐다. 어차피 거절은 불가능했다.
칼린은 처음으로 2황자궁에 들어서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생각했다.
1황자궁은 화려하고 밝으며, 모든 것이 새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황자궁은 타가르 황궁이 가진 세월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새로 사들여 꾸미는 대신 옛것을 잘 닦아 빛을 낸 건물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생각했다.
‘그레이언 전하는 내가 오를 전하와 만난 것을 알고 화가 나셨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아니. 이건 기회일 수도 있어. 내 몸값이 더 올라갔다는 뜻이니까.’
칼린은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몇 가지 대안을 머릿속에서 조심스럽게 검토했다.
그레이언은 그녀를 형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오히려 더 빠른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결정이 빠를수록 그녀의 제안을 수락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오를의 분노를 피할 수단이 필요했다. 벌써부터 오를을 적으로 돌리기에는 아직 앙카르트가는 충분히 강력하지 못했다.
칼린 앙카르트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더 큰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두 별궁을 오가며, 권력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 손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은 그녀의 내면에 엄청난 흥분을 일으키고 있었다.
칼린은 그레이언의 응접실 앞에서 깊은 심호흡을 한 다음 안으로 들었다.
“칼린 앙카르트가 타가르의 작은 태양 2황자 그레이언 전하를 뵙습니다. 타가르에 위대한 광영을.”
그레이언은 답이 없었다. 차가운 듯도 하고 날이 선 듯도 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예를 갖추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입궁하였군.”
“오를 황자 전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칼린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호.’
“황후 폐하께서 ‘붉은 눈물’을 구경하기 원하셨습니다. 여성들이 보석에 끌리는 것은 본능이 아니겠어요.”
그레이언은 제 모후의 본능 따위를 지껄이는 칼린의 얇은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어디, 거짓말쟁이는 입술을 얼마나 부드럽게 놀리는가.
그레이언은 전쟁 중 수많은 인간을 만나면서 이제야 그런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모후를 기쁘게 해 드렸다니 감사할 일이군. 모후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칼린은 상자를 열어 그레이언 앞에 놓는 동안 그를 올곧게 응시했다.
“‘붉은 눈물’은 위대한 여자에게 어울리는 보석이란다.”
“…….”
“황후 폐하께서는 정확하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레이언은 대답 대신 침음을 흘렸다. 그는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짚어 관자놀이를 괴었다.
“지금 나를 가늠하는 것인가, 칼린 앙카르트. 주인을 고르는 종이라니, 금시초문이군.”
하지만 칼린은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저는 전하께 구애하여 선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망설이셨고, 오를 전하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감히…….”
“지금 전하의 시종은 어디에 있습니까?”
“칼린.”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님은 지금 자신의 승리에 취하셨어요. 전하께서 내리신 새끼 사자라는 명성에 취해 황궁에서 사생아와 불장난이나 하고 계시죠. 온 제국에 소문이 파다한데 알고 계십니까?”
“…….”
“전하께는 전하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하를 갈망하는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칼린은 열망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레이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과 대단히 유사했다. 평생 변하지 않을 욕망과 집념은 그것을 실현해 줄지도 모를 상대 앞에서 그토록 빛났다.
오를이 그녀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 점 때문이 아니라도, 그녀는 이미 다른 ‘위대한 여자’의 지배를 받는 오를보다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그래서 칼린은 지금 마지막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언은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다 되물었다.
“로카르드가 사생아와 불장난을?”
그녀는 그것이 그의 명령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비통하게 대답했다.
“가십과 추문은 한 끗 차이입니다. 경연 중이신 전하께 좋을 일 없는 소식입니다.”
“흠.”
“지금부터 저를 전하의 숨겨진 시녀로 쓰세요. 반드시 조기 졸업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저를 정식으로 전하의 곁에 받아들여 주세요. 그러면 앙카르트가의 모든 것을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전하를 반드시 황태자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장래의 ‘위대한 여인’의 자리를 걸고?”
“…….”
칼린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언에게 향한 뜨거운 눈빛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레이언이 마침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거절하지.”
“……!”
“그대가 오를 형님에게 해야 할 대답이 있는 듯하니 이만 놓아주지. 칼린 앙카르트.”
칼린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속으로 셋을 센 다음 입을 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너를 받아들이면 오를 형님이 나를 어찌 보리라 생각하느냐?”
“그건…….”
“내가 너를 초대하지 않았다면, 앙카르트가 아가엘 사신 환영 파티장에 발을 들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느냐?”
“……!”
“너 또한 나의 추문이 될 것이다. 네가 저 한미한 앙카르트에게 의지할 정도로 초조한가, 형님 전하는 나를 비웃으실 것이다.”
“전……!”
그레이언은 비열한 미소를 띠며 등을 뒤로 한껏 기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내 시녀 자리는 이미 다른 자에게 주었다. 나에게 단순하고 올곧을 마음을 바칠 자에게. 타가르의 말은 천금과 같아야 한다.”
기사들이 검의 궤적을 완성하려 수년간 수련하듯, 칼린은 어릴 적부터 지독한 연습으로 우아한 몸짓을 몸에 배게 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칼린은 얼굴에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미한 앙카르트.’
그녀가 지금까지 해 온 노력, 쟁취한 성과는 황족에게 그 한마디로 축약될 뿐이었다. 거기에 ‘단순하고 올곧은 마음을 바칠 자’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이 타오르는 갈망이, 어째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그레이언은 느긋하게 일어나 내실로 돌아갔다.
칼린은 그가 문을 닫았을 때야 밭은 숨을 내쉬고 테이블로 몸을 숙였다.
“하아.”
‘붉은 눈물’ 상자를 닫는 그녀의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레이언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오늘을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그레이언 전하.’
* * *
미샤의 성년식 다음 날, 밤새워 잠을 설친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아침부터 불러들였다. 그는 어째 저만큼이나 지쳐 보이는 로카르드를 짜증스럽게 쏘아보았다.
“성년식에서 뭘 했기에 꼴이 왜 너덜너덜해? 설마, 그 시녀와…….”
로카르드는 등을 축 늘어뜨리며 소파 등에 목뒤를 걸고 말했다.
“네. 맞습니다.”
“너, 이 새끼!”
로카르드는 그제야 그레이언이 말한 상황과 자신이 말한 상황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들어 그레이언을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레이언이 지금 어떤 스트레스 상태에 있는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전하?”
“하! 내가 그녀를 유혹하라고는 했지만 즐기라고 한 적은 없어.”
“즐거운 걸 어떡합니까.”
그레이언이 이를 바드득 갈자 로카르드도 정색을 했다.
“그녀는 밀리오라 전하를 생각보다 더 견고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앞으로는 전략을 바꿔 볼까 해요. 밀리오라 전하를 직접 공략하는 걸로요.”
타가르의 신뢰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레이언이 더 잘 알았다. 그런데 그 사생아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걸 해낸 것이다.
그는 로카르드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젠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무섭다.”
“…….”
로카르드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레이언은 방금 그의 눈에 스친 이상한 열기를 의아하게 여기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가십에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칼린 앙카르트가 1황자궁에 들었다.”
“아. 네.”
그레이언은 로카르드가 놀라는 척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했다.
“아주 바람둥이 계집애야.”
“능력이 되니까요.”
“너는 누구 편이야?”
“제 충성과 목숨은 오직 전하께 있음을 아시잖습니까. 제 연정만 로리샤 로아르에게 나눠 주라는 건 전하의 ‘강요’셨고요.”
그레이언은 짜증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술을 가지러 갔다.
로카르드는 그제야 웃음을 거두고 차분히 물었다.
“그녀가 오를 전하와 무엇을 거래했다고 합니까?”
“모후께서 ‘붉은 눈물’을 보고 싶다 하시어 들고 왔다더군. 그러려고 천만 골드나 들인 게지. 그것 말고는 물어보지도 않았어.”
“꼬치꼬치 물어보면 전하께서 겁먹은 듯 보이셨을 테니까요.”
“아카데미 생도 모두 세 번째 사자의 딸의 성년식에 있을 시간에 여기 와 놓고, 네가 지금 나를 지키지 않고 어디 갔느냐고 비난하기까지 하더군.”
“그랬습니까.”
칼린은 자신이 이런 부분에서 트집 잡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카르드는 그 사실을 재미있게 여겼다.
그레이언은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했어. 한미한 앙카르트 주제에, 내 앞에서 추문이 되지나 말라고 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