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검댕이 키스
(98/155)
96화. 검댕이 키스
(98/155)
96화. 검댕이 키스
2023.06.08.
내가 풀썩 앉은 건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아, 빌어먹을.”
“아카데미에서 제게 합격 통보를 하며 말하길, 진짜 수석은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고요.”
수석이라니, 뜻밖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도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러면 어째서입니까? 오랫동안 궁금했어요. 제가 아는 한 로아르 백작님은 당신을 믿고 지지해요. 백작님은 당신의 아카데미 입학을 반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백작 부인의 협박과 그날의 절망감.
지난 기억이 빠르게 스쳐 괴로웠다.
하지만 숨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지쳐 있었고, 그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카데미와 제 소중한 사람 중에 선택해야 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공자님과 처음 마주쳤던 게 그날이었네요.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날.”
“소중한 사람?”
“엄마요. 저를 낳아 준 엄마의 명예. 백작님의 명예…….”
“누구도 그런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의 격앙된 말투에서 그가 내 삶을 대충 짐작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굳이 서로 입에 담을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저는 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선택을 했어요. 저는 그게 부끄럽지 않아요.”
“…….”
카이델 공자는 나처럼 동편 하늘을 보며 놀란 듯한 얼굴을 숨겼다.
그는 툭 뱉었다.
“당신을 질투했어요.”
나는 ‘내가 뭘 잘못 들었지?’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삐뚤게 웃었다. 또 잘생기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어요.”
“……?”
“나는 카이델의 장자로 태어나 누리지 못한 것이 없이 자랐습니다. 하지만 내 지위의 덕을 보는 인간이 되기는 싫었어요. 그런데 당신처럼 없느니만 못한 토대에서 혼자 시작한 사람에게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가 게을렀던 것이 아닌가, 자만했던 것이 아닌가…….”
나는 머리를 잔뜩 기울였다.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나를 질투해? 세상에 질투할 사람이 없어서?
나야말로 그를 얼마나 동경하는지 그가 안다면…….
내 목소리는 의도하지 않게 뚱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공자님 같은 지위에서 그만큼 겸손한 노력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안 겪어 보면……!”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어이가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어쩐지 그 코웃음에 쪼는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그도 몸으로 웃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눈을 맞춘 채 함께 웃었다. 세상에 둘이 없는 바보끼리의 웃음이었다.
그러다 나는 카이델 공자의 따뜻한 손이 내 뺨을 감싸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죽을 고생을 한 밤, 우리는 해묵은 감정의 앙금을 털어 냈다.
우리의 감정은 지금 하나나 다름없이 닮은 꼴이었고, 서로에게 거부감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그의 눈빛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그의 눈빛과 얼굴이 몹시 엄하게 변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건 아마도 그 때문이었다.
카이델 공자의 얼굴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피하려 했으나 내 뒤통수를 감싼 그의 손이 단단해서 불가능했다.
우리의 맞닿은 입술에서 따뜻한 느낌이 퍼져 갈 때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닿았던 입술을 떼고 초점이 없이 크게 열린 내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다가왔다.
또 한 번 오래 맞닿았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을 때, 나는 이제는 숨을 쉬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머릿속이 텅 비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사이 내 입술이 다시 열리고, 그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약간 매캐한 검댕의 맛과 함께, 아까 끈 불길이 내 입안에서 넘실대는 기분이 들었다.
“…….”
한참 후, 카이델 공자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나는 얕게 헐떡이며 눈을 떴다.
‘방금…….’
나를 향한 보랏빛 눈동자는 기이하고도 강렬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로카르드 카이델이라는 남자의 욕정임을 깨달았다.
그것을 오롯이 바라보며, 나는 광기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 짓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다.
‘나는 이제 죽어야 하나 봐. 카이델 공자를 범해 버렸어.’
그러나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는 태생부터 뻔뻔하고 후회를 모르는 자였다. 심지어 적극적이기까지 한.
그는 밭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다가왔다. 나는 그의 가슴을 꾹 밀어 버텼다.
그는 아주 나직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부족해요.”
“안, 안 돼, 안 돼요. 공자님.”
“알아요. 알겠으니까 손 치우라고요.”
“이건 부적절……”
카이델 공자의 입술은 부적절했으나, 내 손 또한 그랬다.
그의 어깨를 밀어야 할지 당겨야 할지 모르는 내 손은 이리저리 방황하다, 결국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 * *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내가 냇물에서 세수를 하며 얼굴의 검댕을 씻어 내는 동안, 카이델 공자는 우리가 있던 풀밭에 사지를 뻗고 드러누워 있었다. 세상 나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입술이 살짝 부은 느낌에 머릿속은 흐렸고, 지쳐 손끝도 무거울 정도였다.
‘죄를 지으면 이런 느낌인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카이델 공자가 내 곁에서 세수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흑단 같은 머리를 털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반짝거렸다.
참 깨알같이 잘난 척한다. 햇빛과 물방울까지 그걸 다 도와주고.
나는 내게 존재하는 이성이라는 걸 다 끌어모아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공자님, 아까 일은 실수였어요. 공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우리 성인들답게 깨끗하게 잊기로 해요. 실수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덕목 아닌가요?”
“…….”
“지금 제 말 들으셨어요?”
“실수?”
“네. 그러면 그 일을 부를 다른 방법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죽다 살아났고, 지쳤고…….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뿐이었다고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실수? 그게 당신이 내리는 정의입니까?”
“그…….”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그 큰 키로 나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로리샤 로아르 양. 다시 확인시켜 줄까요? 실수인지, 아닌지.”
“고, 공자님!”
“우리 행위가 부적절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실수라고 부르지는 말아요. 그건 완전히 진짜였으니까.”
나는 거의 울먹이며 소리쳤다.
“해, 행위라니요!”
그때 카이델 공자가 내 어깨를 붙잡아 끌어 올렸다. 내 몸이 그토록 가볍다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는 해적 잔당에게 미처 못한 협박을 꼭 해 보고 싶었다는 듯, 내게 이를 갈 듯 지껄였다.
“지금은 제가 좀 바쁩니다. 로리샤 양. 그레이언 전하를 황태자로 만들어 드려야 해서요. 그러니까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그 자리에 딱 가만있어요. 알았습니까! 날 믿으란 말이에요!”
“예? 예……?”
“대답!”
“예…… 에.”
내 대답은 대답과 의문 사이의 미묘한 가락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은 대답처럼 들렸고, 카이델 공자는 나를 거의 끌어안듯이 내 등을 받치더니 자기 때문에 구겨진 내 옷자락을 다른 손으로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며 소리쳤다.
“실수? 제길, 이런 게 실수면 세상에 실수가 아닌 게 뭐야!”
숲에 혼자 남겨질 수는 없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울먹이며 그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 * *
황궁에서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알지 못했다. 나는 미샤의 성년식 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음에도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자, 나는 그날 밤 일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황제궁에서는 여전히 경연에 대한 소식이 없었고, 미샤도 단단히 삐졌는지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후원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서 지냈다.
방에 가만히 있노라면, 시도 때도 없이 입술에 열감이 도는 기분이었다. 그럴 땐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고, 그러면 무섭고 겁이 나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졌다.
문득문득, 카이델 공자의 협박이 나를 괴롭혔다.
‘딱 가만있으라니…….’
하지만 그러한 패닉 상태도 시간이 갈수록 차츰 견딜 만해졌다.
아마도 우리는 그의 말대로 ‘진짜’ 키스를 했고, 그 순간은 진실했다.
그 순간, 그 감정, 그리고 그 압도감.
그건 진실이었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도 그 순간에 충실했을 뿐일 것이다.
그가 내게 어떤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질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내가 그를 특별하게 여길 이유도 없었다.
우리에게는 각자 다른 주인이 있었고, 우리의 삶의 방향은 판이했다.
나는 안락한 노후를 준비하는 가정 교사, 그는 차기 황제 폐하 곁에서 제국을 책임질 첫 번째 사자.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아무 착각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면, 이런 데 쓸모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