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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3) (97/155)


95화. 미샤의 성년식 파티(3)
2023.06.07.


“으아아!”

나는 비명인지 뭔지 모를 고함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그자의 엉덩이를 차 버렸고, 카이델 공자는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풀썩, 사방이 조용해졌다.

카이델 공자는 그자를 살피지도 않고 그자의 등을 밟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기둥 뒤쪽을 검으로 내리쳐 밧줄을 풀더니, 내 한쪽 어깨를 확 잡아당겨 자기 코앞까지 데려갔다.

나는 그제야 말문이 트였다.

“고, 공자님?”

“괜찮습니까? 말해요!”

“아, 안 괜찮아요. 아파요.”

카이델 공자는 그제야 흠칫하며 나를 놓았다. 실소를 흘리는 그의 뺨에는 해적의 피가 튀어 있었다.

나는 그가 몹시 흥분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바짝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나 때문에. 내가 자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그가 버럭 소리쳤다.

“괜찮습니까!”

“이제 괜찮아요. 공자님은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전혀 안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미워도 지금 그를 내 걱정으로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제야 한숨을 쉬듯 말했다.

“당신이 이 상황에서도 씩씩해서 고맙군요.”

“천만에요.”

나는 진심이었는데, 갑자기 내 시야가 낮아졌다.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것이다.

그는 성큼 다가와 팔로 내 허리를 감아 받쳐 주더니 혀를 찼다.

나는 너무 쪽팔려서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다, 다리가 풀렸네요? 하하…….”

“겁먹은 게 당연한 거예요. 당신이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면 오히려 걱정했을 겁니다.”

그는 구석에 쌓인 눅눅한 짚단 쪽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자기 재킷을 벗어 깔아 주었다. 그리고 나를 그 위에 앉혔다.

“고마워요…….”

카이델 공자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샤 로아르 양이 섭섭해하겠습니다.”

“아. 미샤. 성년식! 헉! 우리 가야 해요, 공자님!”

그러나 카이델 공자는 혀를 차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앉아 있어요. 걷지도 못하면서.”

“…….”

나는 반항할 기운도 없었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찾아들자 멀리 밤새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역시 미샤 양을 걱정하는군요. 그렇죠?”

“걱정은 아니고……. 사실 얼마 전에 미샤와 화해한 것 같거든요. 조금이지만, 처음으로…….”

카이델 공자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축하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잖아요? 미샤는 제가 해적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성년식에 못 갔다고 하면 절대 믿지 않을 거예요.”

“저라도 그럴 겁니다.”

“해적들이 공자님을 어떻게 알고 타가르까지 온 거죠? 게다가 보물이라니…….”

카이델 공자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몸을 움찔했다.

“공자님……?”

“그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지난번 공해에서의 일을 그렇게 끝내기는 좀 아쉬워서…….”

“허억……! 그들의 보물을 털어 오셨어요? 주인이 없을 거라서?”

이 빌어먹게 알뜰살뜰한 인간!

“흠. 이럴 땐 당신과 말이 잘 통하는 게 불편하군요.”

“하, 하하……. 정말, 공자님은 정말…….”

그가 한쪽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뭐요?”

“정말……! 이상한 냄새 안 나요?”

나는 냄새를 맡으려 목을 쭉 뽑았고, 카이델 공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허름한 창고 바닥으로 연기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불을 질렀어요! 일당이 더 있었나 봐요!”

카이델 공자는 얼른 문으로 달려가더니 고함쳤다.

“잠겼어!”

“젠장!”

나는 창고 안을 돌아다니며 개구멍이나 물동이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낡은 양동이가 몇 개가 다였다.

불길을 뿜기 시작하는 창고 문짝을 보며,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생각만 했는데 내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게 너무 싫었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카이델 공자님을 구해야 하는데! 그래야 빚 하나 깔 텐데, 왜 물이 없는 거지? 이 동네엔 짐승도 없나, 왜 개구멍도 없지!”

불길이 창고 벽으로 번지며 내부는 자꾸만 밝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카이델 공자가 어이가 없어서 죽어 버릴 것 같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눈물을 쓱 훔쳤을 뿐이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내가 다가와 내 양쪽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대충 진정하라는 말 같았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어깨를 내밀고 문으로 돌진했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창고 안이 확 밝아졌다. 그는 불타는 문짝을 발로 차 내서 길을 틔우더니 돌아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갑시다! 불꽃놀이는 다음에 즐기게 해 줄 테니까.”

우리는 그대로 창고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한적한 숲 오솔길 끝에 있었다. 수도 외곽이 분명했다.

나는 부스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악을 썼다.

“공자님!”

수풀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튀어나왔고, 카이델 공자는 즉시 검을 휘둘러 그들을 한 번에 쓰러트렸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이 사람 이럴 땐, 진짜 대단한 기사가 아닌가.

나는 점점 불이 번지는 창고를 멍청하게 보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두면 산불이 될 거예요!”

“빌어먹을!”

“공자님!”

카이델 공자는 말릴 틈도 없이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나는 비명을 겨우 참았다.

그는 삽과 양동이들을 들고 나타나 내게 양동이를 던지며 말했다.

“저기, 물 흐르는 소리 들립니까?”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과연, 냇물 흐르는 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물, 물 떠 올게요!”

나는 양동이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달렸다. 그러자 그가 소리쳤다.

“한 양동이씩만 해요. 힘을 한꺼번에 소진하면 안 됩니다.”

“이 정도는 해요! 제가 무슨 한 떨기 수선화 그런 건 줄 아세요?”

내가 냇가로 달려가 양팔 가득 물을 떠 오는 동안, 카이델 공자는 삽으로 불타는 벽을 부수고 있었다.

불붙은 판자를 풀밭으로 던져 창고를 태우는 화력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사이 나는 창고에다 물을 끼얹었다. 카이델 공자도 곧 물을 떠 와 함께 불을 끄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쌍의 미친 인간들처럼 그 일을 반복했다.

* * *

우리는 풀밭에 나란히 앉아 숲 위로 동이 트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검댕과 땀으로 사람 꼴이 아니었고, 일어설 기운도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휴우.”

내 힘겨운 안도의 한숨에, 카이델 공자가 내 머리를 툭 당겨 자기 어깨에 놓게 했다.

거절할 기력도 없었고, 근육이 두툼한 게 베개로 딱 맞춤한 어깨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폐에 연기가 남은 기분에 가볍게 기침을 하고서, 나는 반쯤 타다 남은 창고를 바라보았다.

이제 숲은 산불에서 안전했다. 그리고 저쪽 수풀 아래에는 해적들의 무덤이 있었다. 카이델 공자의 삽은 하룻밤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했다.

나는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해냈네요.”

“우리가 해냈죠.”

다시 침묵.

“해적 잔당이 더 있지 않을까요?”

“없을 예정입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가,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에 가만히 있었다.

해적 잔당은 카이델가의 손에 있더라도 없어질 거다. 나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 기운을 차리고서, 나는 머리를 들고 말했다.

“죄송해요. 욕해서.”

“그런 놈들에게 차리라고 있는 예의가 아닙니다.”

“아니요, 그 편지요.”

“……!”

카이델 공자는 눈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따가운 느낌마저 들어 괜히 뜨는 해를 꿋꿋이 쏘아보며 말했다.

“미샤가 공자님께 보낼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떼를 써서……. 그때 제가 미샤에게 화가 나 있었거든요. 그래서 에라이, 하고 그랬어요. 절대 들킬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마음 상해하실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공자님.”

“하! 내 그럴 줄 알았어!”

카이델 공자는 그렇게 소리치며 공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내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주먹에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용서…… 해 주실 거예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얼굴에 검댕을 잔뜩 묻힌 꼴로, 지독히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고백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로리샤 로아르 양.”

“아……. 예…….”

“이럴 땐 제 너그러움이 과한가 싶지만, 자백하셨으니 용서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나는 멋쩍어서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런데 풉, 웃음이 터졌다.

카이델 공자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보는데도, 내 웃음은 커다란 폭소가 되었다.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해님과 죽은 해적들도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카이델 공자도 나와 함께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호탕한 웃음이 오늘 쾌청한 푸른 하늘을 불러올 걸 알았다.

카이델 공자는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려 대충 정리하더니 말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참 곱기도 했다.

저렇게 검댕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도 잘생길 수 있다니, 저 자식은 변태였다.

“그럼, 저도 고백하죠. 로리샤 양.”

“공자님이 뭘요?”

“라보리 시하.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라보리 시하’는 ‘로리샤 로바’의 애너그램이죠?”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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